시진핑, 동남아서 ‘저자세 외교’… 트럼프 고율관세에 궁지 몰린 中

베트남·말레이·캄보디아 돌며 미국 고율관세 공동전선 구축 시도
대규모 투자 약속에도 기대와 달리 미온적 반응…시진핑 경직된 모습도
‘미중 생존게임’ 여론에 지식인 “국민 희생양 삼아선 안돼” 비판 나와
시진핑 중국공산당(중공) 총서기가 지난 14~18일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동남아 3개국을 순방했다. 미국의 대(對)중국 고율 관세 조치와 국내 경기 침체가 맞물린 가운데, ‘반미 연대’를 조성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베트남은 “미국에 함께 반대하자”는 시진핑의 발언을 공동 발표문에서 삭제했고, 말레이시아에서 시진핑은 즉흥적 발언을 자제하며 변수를 최소화하려 했다. 캄보디아는 대규모 투자 선물 보따리를 푼 중공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중공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향후 주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중론도 현지 일각에서 제기됐다.
중공은 이번 동남아 3국 순방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 관세에 맞서려 했다. 이는 위안화 평가절하만으로 관세 상당 부분을 상쇄할 수 있었던 과거와의 차이점이다. 그만큼 중국 경제의 체질이 약해졌다는 의미로도 풀이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4일(현지시각) 편집위원회 사설(오피니언) ‘시진핑의 반(反)관세 외교 순방(Xi Jinping’s Anti-Tariff Tour)’을 통해 “동남아에 집중하는 시진핑의 외교는 오히려 내부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145% 관세 폭탄’ 직격탄… “동남아 돌며 출구 찾기”
시진핑의 이번 순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대중 수입품에 최대 145%의 고율 관세를 예고한 직후 이뤄졌다. 특히 미국의 수입 제한으로 수출길이 막힌 중국은 동남아 국가를 우회 수출 통로로 활용해 관세 회피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외교 행보는 오히려 ‘절박함’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시진핑은 베트남에서 45건의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운명공동체”, “반(反)패권주의”를 외쳤지만, 베트남은 이후 곧바로 미국 측에 감세 협조를 요청하며 거리두기에 나섰다. 이튿날 베트남 부총리 부이 타잉 썬은 한국 외교부 조태열 장관과 업무 대화에서 미국의 관세 정책에 함께 긴밀히 소통하기로 합의했다. 중공과의 연대에만 국가의 운명을 걸지 않겠다는 의미다.
말레이시아는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신기술과 금융 등 37건의 협정을 체결했지만, 시진핑은 정상 간 인사 자리에서 준비된 원고만 읽어 내려갔고 간단한 환담마저 피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한 외교 소식통은 “도무지 즉흥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언가를 우려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AI는 미국과 중공이 미래를 걸고 경쟁하는 분야다. 이 지점에서 말레이시아는 중공을 상대로 몸값을 크게 올렸다. 미국의 수출 통제를 피하려는 중국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허브가 앞다퉈 입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말레이시아는 미중 대결 국면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도 피할 수 없게 됐다. 말레이시아 내 AI 데이터센터가 중공의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3개국 가운데 중공의 제안에 가장 크게 호응한 국가는 동남아의 대표적인 친(親)중공 국가인 캄보디아였다. 중공은 무역·투자·금융·수자원 등 분야의 37개 협정에 서명했고, 캄보디아는 중공이 제안한 ‘운명공동체’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49% 상호관세가 부과된 캄보디아는 미국산 19개 품목에 대한 관세 인하를 약속하는 등 미국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이다.
‘외교 총력전’ 배경엔 경제 위기감…정책 방향성에 ‘오류’
탕칭은 “시진핑의 외교 총력전은 언뜻 미국에 맞서 공동전선을 구축하려는 반격 행보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국내 경제 위기에 따른 ‘외부 탈출구’ 찾기라는 해석이 유력하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시진핑은 중국의 청년 실업률 증가, 부동산 시장 침체 등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외교를 통해 국내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다면서, 이웃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외부 압력, 즉 미국의 대중 관세에 대한 완충지대를 구축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부동산 시장 붕괴와 가계 자산 증발, 지방정부의 재정 파탄, 과잉 생산 문제, 수출 급감 등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내수 시장을 키워야 하지만 시진핑이 강조하는 전기차, AI, 반도체 같은 신성장 동력은 모두 기본적으로 수출 경제에 속한다는 것이 한계점이다. 내수 확대를 위한 동력을 여전히 수출에 기대하고 있다.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현재 16.9%로, 3개월 연속 상승 중이다. 올해 졸업 예정인 대학생은 1222만 명에 달해 ‘역대 최대 졸업 인파’지만, ‘취업 빙하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시사평론가 겸 칼럼니스트 가오톈요(高天祐)는 지난 17일 ‘신보재경신문’ 칼럼에서 “수출은 중국에 중요하다”며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주문이 급격히 감소하면 단기적으로 중국 고용 상황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해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5247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약 15%를 차지했지만, 제3국을 우회한 대미 수출까지 포함하면 20% 이상일 것”이라며 “2020년 상무부 발표에 따르면, 수출은 중국에서 직간접적으로 2억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해 전체 고용의 25%를 차지했다”고 대미 무역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미중 생존게임’ 분위기에 중국 학자 일침 “국민은 총탄 아냐”
현재 중국에서는 미국-중공 간 관세 전쟁을 두고 “중국 인민과 미국 시민 사이에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라는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먼저 터졌지만, 중국인은 기본적으로 저축을 많이 하므로 결국 중국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논리를 깔고 있다.
중공의 보복 관세를 옹호하는 이러한 논리에 대해 내부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중국 런민(人民)대학 경제학과 교수 녜후이화(聶輝華)는 지난 8일 ‘신랑재경’에 실린 인터뷰에서 “‘버틴다’는 것 자체가, 중국인들이 상대적으로 고난에 익숙하다고 그 고난을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 목적이 뭐냐, 상대를 끝까지 버티게 만들어 쓰러뜨리겠다는 것인가”라며 “‘고난’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어 평범한 사람들을 총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인을 잘살게 만들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국가 간 싸움이니 고난을 감수하자’는 중국 내부 여론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풀이된다.
녜후이화 교수는 또한 중공이 미국과 관계를 끊고 탈달러화를 이뤄내고 더 큰 주도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내부 여론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미국과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수출은 여전히 중국 경제의 주축이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세계화의 혜택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관세 정책에 “너무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도 덧붙였다.
중국이 AI 기술로 앞서나갈 수 있다는 맹목적 낙관론도 경계했다. 녜후이화 교수는 “근본적 문제는 고용”이라며 “고용이 안정돼야 국가가 안정되고, 청년도 안정된다. 실제로 AI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앨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의 책 ‘권력과 진보’를 인용해 “기술 발전이 꼭 생산성 증가과 공동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며 첨단 기술 발전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경제 한파에 대비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