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 하버드에 약 3조원 지원금 중단…“요구사항 불이행”

미 연방정부는 14일(이하 현지 시간) 하버드대에 지급 예정이던 보조금 22억 달러(약 3조원)와 계약금 6000만 달러(약 857억원)의 집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하버드대가 다양성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학생 시위에 제한을 두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한 데 따른 조치다.
같은 날 오전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은 전 교직원과 학생에게 보낸 성명서를 통해 “하버드대는 대학의 독립성과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 교육부 산하 반유대주의 대응 태스크포스는 “하버드대의 이날 성명은 미국 내 최고 명문대들에 만연한 문제적 특권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며 “연방정부의 투자가 대학의 민권법 준수 책임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갈등은 미국 연방정부와 소위 ‘엘리트 대학’ 간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는 가운데 발생했다.
2주 전 미국 교육부, 보건복지부와 총무청(GSA)은 하버드대에 지원된 약 90억 달러(약 13조원) 규모의 연방 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에 착수했다. 며칠 뒤 연방정부는 하버드대에 ‘미국 정부와의 재정적 관계 유지를 위한 필수 개혁 분야’가 담긴 요구사항 목록을 전달했다.
해당 목록에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 폐지, 시위 중 얼굴 가리개 착용 금지, 인종 및 성별이 아닌 능력 중심의 입학·채용 기준 개편 등이 포함됐다. 하버드대가 국토안보부를 포함한 연방기관들과의 협력에 적극 나설 것과 구조 개혁 등을 통해 장기적인 법규 준수를 보장할 것도 요구했다.
지난 11일 연방정부의 세 기관은 하버드대에 보다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담긴 추가 서한을 발송했다.
서한에는 “미국 정부가 하버드대 운영에 투자해 온 것은 학문적 발견과 교육적 우수성이 국가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면서도 “그 투자가 자동으로 주어지는 권리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투자는 하버드대가 연방 민권법을 준수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하버드대는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적 창의성과 학문적 엄격함이 살아 숨 쉬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정부는 하버드대에 국제학생 입학 절차를 전면 개편해 ‘미국의 가치에 적대적이거나 테러 및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지원자를 걸러낼 것을 지시했다. 전 학과 및 연구 단위를 대상으로 교수진, 학생, 직원의 소위 ‘관점 다양성 (viewpoint diversity)’을 평가하기 위한 외부 감사를 실시할 것도 요구했다.
연방정부는 하버드대의 특정 프로그램, 특히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 대한 감사를 요구했다. 해당 프로그램들이 반유대주의적 괴롭힘을 조장하거나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감사 보고서에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공격 이후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발생한 시위와 관련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 국적 학생을 차별하거나 학생들에게 학교 규칙을 어기도록 선동한 교수진이 있다면 그 명단을 밝혀야 한다고 쓰여 있다.
정부는 이런 혐의를 받은 교수에 대해 학문적 자유와 수정헌법 1조(표현의 자유) 범위 내에서 하버드대 측과 협의해 적절한 제재 조치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일 자로 발송된 최초 서한에는 구체적인 시한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이어진 11일 자 서한에서는 올해 8월까지로 마감 시한을 설정했다.
가버 총장은 최근 연방정부의 요구사항에 대해 “대다수가 하버드대의 학문적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정부 규제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학생과 교직원에게 보낸 내부 메시지를 통해 “법률 자문을 통해 행정부에 해당 제안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이미 통보했다”며 “대학의 독립성과 헌법적 권리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번 사안은 하버드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방정부는 반유대주의 대응 미흡과 관련한 조사를 확대하고 있으며 컬럼비아대 역시 연방 차원의 차별금지법 위반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컬럼비아대가 받는 약 50억 달러(7조 1425억원) 규모의 연방 자금도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지난달 7일, 정부는 보조금과 계약금 총 4억 달러(5714억원)를 전격 철회하고 광범위한 개혁 요구사항을 함께 전달했다.
컬럼비아대 측은 일주일 만에 대부분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현재까지도 해당 자금은 복원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 더해 최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컬럼비아대에 대한 추가 연구지원금 2억5000만 달러(약 3671억원)를 동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에 보류된 4억 달러(5714억원)에 이 금액까지 겹치며 대학의 재정적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기호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