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분석] 언론이 외면한 션윈의 진실 : 무엇이 진짜 이야기인가

2025년 03월 23일 오후 1:46

작년 어느 날, 션윈 공연장 객석에 앉아 있었다. 비단처럼 찰랑이는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고요하고도 오래된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객석은 만석이었다. 수천 회에 달하는 전 세계 공연 중 또 하나의 매진 사례였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감동적이다”, “희망이 느껴졌다”, “영감을 받았다.” 이탈리아든 대만이든, 션윈이 발을 디딘 그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익숙한 반응이다. 이 무용단이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고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이런 반응이라면, 언론의 존중 혹은 최소한의 호기심이라도 따를 법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션윈은 비아냥 섞인 헤드라인을 받고 있고, 일명 ‘폭로 기사’의 표적이 되고 있다.

지난 2024년 8월 이후, 뉴욕타임스는 션윈을 겨냥한 비판 기사를 10건 넘게 쏟아냈다. ‘공연 시간이 길다’, ‘무용수들의 훈련이 혹독하다’는 식의 흠집 내기 평가와 “사이비 같다”, “선전용이다” 등의 악평이 이어졌다.

정말 농담이길 바란다.

물론 션윈은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 기사들은 그런 목소리를 묻어버리려 한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는, 진짜 이야기를 흐리거나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감금되고 고문당하고 있으며,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에게 션윈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생명을 잇는 끈이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피어난 위대한 성공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언론은 이를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모든 독자에게,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박해를 견디고 있는 수천만 중국인들에게 부당한 일이다. 션윈은 그들에게 희망의 불빛이다.

언론이 말하지 않는 중국

언론이 외면한 현실을 이야기해 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전역의 감옥, 비밀 구금소, 세뇌 시설에 파룬궁 수련자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단지 명상수련을 하고, 정직하고 선량하게 산다는 이유로 구타와 굶주림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

1999년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불법으로 규정한 이후, 상황은 참혹해졌다. 수백만 명이 구금됐고, 수만 명이 고문이나 학대를 당했으며, 수천 명은 고문 끝에 사망했다. 이 모든 것은 중국 당국의 철저한 정보 통제를 뚫고 확인된 사실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중국 재판소(China Tribunal)’의 조사 결과였다. 전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인 제프리 나이스 경이 이끈 이 재판소는 “중국 전역에서 수년간 강제 장기적출이 대규모로 자행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들은 매년 6만에서 10만 건의 장기 이식 수술이 진행됐다고 추정했으며, 파룬궁 수련자들이 주된 장기 공급원이었음을 밝혔다. 수만 명이 장기를 적출당해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생존자, 병원 내부 고발자, 통계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친한 무용수 중 한 명은 매일 밤 중국 내 수련자들의 비명 지르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뉴욕타임스는 션윈 무용수들이 ‘몸매 관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기사를 썼다. 진심으로 한 말일까?

션윈의 진짜 의미

션윈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다. 절박한 외침이다.

무대 위의 한 번의 도약, 한 음절의 음악, 한 장의 티켓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국의 독재 정권은 악하며, 위험하다. 그리고 이는 단지 중국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고요한 세계에 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싸운다. 중국에서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이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예술로 사람들을 깨우고자 한다.

무용수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중국 정권이 지우려는 아름다움, 억누르려는 자유, 외면당하는 박해를 무대 위에서 말하고 있다.

이 또한 많은 비판 기사가 간과하는 점이다. 션윈은 미국 땅에서 피어난 이민자들의 성공담이다.

합법적으로 이민 온, 교양 있고 교육받은 중국 출신 이민자들이 시작했다. 정부 보조금도, 대기업 후원도 없었다. 오직 신념과 열정 하나로 출발했다. 지금은 8개의 예술단이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전례 없는 성장이다. 그 자체가 자유와 신앙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뉴욕타임스가 놓친 것들

뉴욕타임스는 뉴욕주에서만 20회 이상 공연하고 매진을 기록한 션윈을 두고, 단지 공연 횟수를 계산하며 분석한다. 이 공연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보려 하지 않는다. 이건 ‘직업’이 아니라 ‘생존’이며 ‘희망’이다.

물론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면, 션윈의 훈련 강도는 꽤 높아 보일 수 있다.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쉼 없이 공연하는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만큼 언론은 ‘혹시 착취당하는 건 아닐까?’ ‘너무 혹독한 건 아닐까?’라는 프레임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잠시만 시선을 돌려보자.

중국에서는 ‘과로’란 강제 노동으로 몸이 망가지는 걸 의미한다. ‘훈련’이란 전기충격봉으로 신체를 지지는 것이고, ‘세뇌’는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평생 가난에 시달리게 되는 것을 뜻한다.

션윈의 엄격함은 착취가 아니다. 저항이다. ‘우리는 꺾이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이다. 25년간 중국 정권은 우리를 침묵시키려 했지만, 무대 위의 한 걸음, 한 미소가 그 실패를 증명한다.

왜 언론은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왜 고문실이 아닌 연습실을 파고드는가?

뉴욕타임스는 우리 조직의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기사를 여러 편 썼고, 반권위적인 메시지를 정치적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거실에서 명상을 하다 체포돼 고문 끝에 숨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춤으로 전하는 무용수에게 ‘정치적’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 기사에서는 션윈의 재정 구조를 문제삼았다. 왜냐고? ‘어떻게 후원이 없는데 이렇게 성공할 수 있느냐’는 의심 때문이다. 열정, 티켓 수익, 이민자 정신이라는 명백한 답은 왜 무시하는가?

사실, 25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을 ‘사이비’로 몰아 학살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들의 선전 기관인 신화통신은 끊임없이 거짓을 퍼뜨려 왔다. 뉴욕타임스는 그 ‘노래’를 고급 문장으로 이어받았다.

이 일치가 언론이라면 반드시 의심해야 할 부분 아닌가?

반면, 월스트리트저널은 실제 중국 내 탄압과 인권 유린을 심층 보도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물론 기자는 중국 출입을 금지당했지만, 진실을 말하는 길은 늘 쉽지 않다. 그에 비해, 고국에서 이민자 예술가들을 비판하는 건 참 쉬운 일이다.

진짜 위험

중국재판소는 이렇게 밝혔다. “매우 많은 이들이 이유 없이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

중국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구금 중 피검사, 엑스레이, 특이한 건강검진을 반복적으로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진료가 아니라 ‘장기 매매용 검사’였다.

외과의사 엔버 토티는 재판소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신장을 적출하고 간을 제거한 경험을 증언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피는 흘렀다.

이게 현실이다. 장기를 강제로 적출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식 산업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권은 늘 그렇듯 이를 전면 부인한다.

하지만 션윈은 이런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대부분이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영역을 비춘다. 실제로 뉴욕타임스의 전 기자 디디 커스텐 태틀로우는, 장기 적출을 보도하려 했지만 편집국에서 막혔다고 재판소에서 증언했다.

공연장에서 나는 이런 장면을 수없이 봤다.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난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요”라고 묻는다. 어느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을 느꼈어요. 순수한 무언가가 어둠을 이겨낸 걸 보면서요.”

이게 바로 뉴욕타임스가 놓친 핵심이다. 션윈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금당한 사람들, 고문받은 사람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더 넓게 보자면, 당신과도 연결된 이야기다. 중국 정권의 영향력은 더 이상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휴대폰, 공급망, 뉴스 피드 속에 있다.

이제 선택의 시간

이건 나에게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는 션윈이 씨앗에서 거목으로 자라는 전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매일, 우리가 침묵하는 사이 또 누군가가 죽는다.

비판자들은 예술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침묵 또한 정치다. 우리가 라떼를 마시며 SNS를 넘기는 사이, 공산당의 어둠은 더 깊숙이 스며든다.

션윈은 진실과 아름다움으로 싸우는 힘이다. 중국 정권이 지우고 싶어 하는 전통 문화, 꺾고 싶어 하는 자유의 정신을 무대 위에서 되살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한 번의 공연이, 한 장의 티켓이 모두 전쟁터에서 이겨낸 하나의 승리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희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