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초탈한 디오니소스, ‘변칙과 필연성의 신’
합리적 질서와 감정엔 균형이 필요…“아폴론·디오니소스 생각하면 분명해져”

20세기와 21세기의 서구 문화는 디오니소스적 행동을 풍부하게 보여줬다. 고대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 숭배의 한 측면은 와인 음주와 황홀경, 특히 난교를 통한 황홀경이다. 신화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는 자주 광적인 수행원 사티로스(Satyrs)와 마에나드(Maenads)를 동반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숲의 신으로 여자와 술을 좋아했던 사티로스와, 춤과 음악에 취한 일단의 여성들인 마에나드는 디오니소스를 뒤따르며 신성한 광기에 스스로를 내던졌다. 이것이 젊은이들(그리고 그리 젊지 않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숭배하며 열광하는 로큰롤 투어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투어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
19세기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여러 저서에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간의 대립을 제시했다. 그러한 첫 번째 저서가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이다. 이러한 대립은 뒤이은 세기에 나타난 많은 악(惡)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이 니체의 가르침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또는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했는지의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니체를 보자. 그가 설명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사이의 이분법이 사실이란 점은 변치 않는다. 아폴론은 질서, 이성, 조화, 이유, 명료성, 개인주의, 그리고 구조화된 아름다움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을 대표하고 디오니소스는 혼돈, 열정, 감정, 비이성, 그리고 집단적 통합을 상징하는 신이다.
19세기 말 니체는 하나의 역사적 현상을 인식했다. 18세기는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의 시작으로 한편으로는 아폴론적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성, 질서, 구조조차 피곤하고 무기력해져서 삶을 새롭게 할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고, 이 무언가는 디오니소스 신의 혼돈으로 나타났다. 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반발처럼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됐고 이성의 신을 감정과 비이성의 신으로 대체해 버렸다. 그 기점은 1798년 영국에서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콜리지의 ‘서정적 발라드(Lyrical Ballads)’가 출간된 시기로 평가된다.
디오니소스의 탄생

아폴론의 탄생과 달리 디오니소스의 기원은 모호하고 상충되기까지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그가 제우스와 인간인 테베의 공주 세멜레의 아들이란 것이다. 이 설화에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그의 불륜을 질투하고, 세멜레에게 제우스가 신의 완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하게 만든다. 제우스의 번개를 견디지 못한 세멜레는 불에 타 죽게 되지만 제우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어 넣고 그 후 디오니소스는 ‘다시 태어나는’ 방식으로 태어난다. 그리하여 그의 별명은 ‘두 번 태어난 자’다.
하지만 다른 버전에서는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와 지하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아들이며, 거인족인 타이탄들에 의해 해체된 후 다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재탄생은 오르피크 전통(Orphic traditions)과 연결돼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고 자연의 순환,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상징한다. ‘오르피크 전통’이란 죽은 아내를 찾아 저승을 다녀온 오르페우스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의 신비주의적·종교적 전통을 의미하며 죽음과 부활, 재생이란 주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두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둘 다 그를 최고 신 제우스와 연결함으로써 디오니소스가 우주와 삶의 근본적인 힘을 대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유사점은 두 이야기 모두 죽음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저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 1926~2011년)은 자신의 저서 ‘성격의 힘(The Force of Character)’에서 타이탄들이 디오니소스를 갈기갈기 찢은 후 그의 할머니인 대지의 여신 레아가 그 조각들을 다시 결합해 그를 부활시켰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와도 유사하다. 오시리스 또한 갈기갈기 찢긴 운명을 맞이한 후 아내이자 누이인 이시스에 의해 재결합되고 결국 저승의 통치자가 됐다. 힐먼은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 (디오니소스의) 생명력은 춤추는 사티로스와 광적인 숭배자들이 함께 등장한 것과 동시에 지하세계에 있는 영혼들의 보이지 않는 신인 하데스와 동일한 존재로 선언됐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매우 위험한 신이다. 그러나 그의 기이한(거의 광기에 가까운) 난무와 과도함, 황홀경은 우주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주는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균형을 요구한다. 이런 극단적인 신에게도 ‘균형’이란 말이 적절하다면 말이다.
세상에 혼돈이 있는 곳
우주가 혼돈을 필요로 한다면, 과도함 대신 균형을 가져오는 방식의 혼돈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영역 중 하나가 바로 연극이다. 디오니소스는 극장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축제(특히 아테네의 도시 디오니소스제)는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탄생을 이끌었다. 니체는 위대한 그리스 비극 작가가 아에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라고 믿었는데, 이들은 두 힘의 균형을 탁월하게 유지했다.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생생한 감정적 힘과 합창에 있었고, 아폴론적 요소는 구조화된 줄거리와 대사에서 나타났다. 니체는 유리피데스와 그리스의 합리주의 철학이 순수한 논리를 선호하며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약화시켰고 결국 비극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생각하며 이를 안타까워했다.
이 개념은 모든 예술 형식, 아마도 모든 위대한 성취로 확장된다. 현대의 이콘(그리스 정교회 종교화 양식 중 하나) 화가인 에이단 하트(Aidan Hart)는 그의 저서 ‘아름다움, 정신, 물질: 현대 세계의 이콘(Beauty, Spirit, Matter: Icons in the Modern World)’에서 17세기 중국 벽화 매뉴얼 문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방법이 없는 것은 한심하지만 방법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방법이 없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이지만 방법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 아폴론적이란 뜻이다.
즉 규칙에 매몰된 예술가는 열등한 작품을 만들며, 규칙이 전혀 없는 자들은 혼란스럽고 무가치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의 비유를 빌리자면 너무 많은 음(陰)은 문제지만 너무 많은 양(陽)도 문제가 된다. 아폴론의 격언을 인용해보자. “과하지 말라. 심지어 아폴론 자신조차도!”
구조, 그리고 규칙의 파괴
창조의 정신에는 어느 정도 디오니소스적 원초성이 필요하다. 시인과 예언자에게 요구되는 신성한 광기나 열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규칙, 구조, 질서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필요하다. 진정한 대가(大家)는 구조와 규칙을 초월할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존 밀턴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사에서 “가장 달콤한 셰익스피어여, 상상의 자식이여,/그대의 야성적인 고유의 숲 노래를 불러라”라고 적었다. 오늘날 우리 귀에는 이 말이 다소 거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밀턴 자신도 실천했던 무언가를, 즉 ‘야성적인 숲 노래’를 인정한 것이다.
밀턴의 걸작 ‘실낙원’의 첫 구절에서도 디오니소스적인 순간을 볼 수 있다. 이 서사시는 무운시(blank verse·끝소리의 운은 없지만 일정한 운율은 유지하는 시) 형식으로, 한 줄에 10음절로 구성된 약강 5보격(iambic meter)을 따른다. ‘약강 5보격’은 각각 강세 없는 음절 뒤에 강세 있는 음절이 오는 형태로 구성된다. 이것이 규칙이다.

이후로 약 1만 개의 추가적인 행이 남아 있다고 가정할 때 이러한 서사시의 첫 줄은 당연히 규칙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밀턴은 이렇게 적었다.
“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e fruit(인간의 최초 불복종과 그 열매에 대해)”
여기서 단어 ‘first’가 갑자기 끼어들어 약강의 규칙을 깨뜨린다. 약강 패턴에 따르면 단어 ‘and’는 약하게나마 강세를 받게 된다. 본질적으로 이 행에서는 다섯 번의 강세가 있어야 하는데 여섯 번의 강세가 나타난다.
이 일탈의 천재성은 바로 모방적(mimetic)이라는 데 있다. 아담(그리고 따라서 인류)의 ‘최초’의 불복종은 이 시의 운율 자체를 깨뜨리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른바 ‘원죄’의 순간이다. 만약 디오니소스가 개입해 이 운율의 깨짐과 같은 작은 혼돈을 주지 않았다면 이 시는 단조롭고 의미 또한 덜 강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시든, 예술이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정원이든, 요리든, 독서든 심지어 정기적인 개 산책이든, 때로는 디오니소스가 휘젓고 나서서 약간의 창의력을 추가하거나 지루함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단, 디오니소스의 길로 완전히 들어서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진정한 광기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정보>
제임스 세일은 지금까지 50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최근 출간된 책으로는 2021년 라우틀리지(Routledge) 출판사가 펴낸 ‘최고 성과를 내는 팀을 위한 동기 지도(Mapping Motivation for Top Performing Teams)’가 있다. 그는 2022년 미국에서 매우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푸시카트 시문학상(Pushcart Prize) 수상 후보에 올랐고, 앞서 2017년 고전시인협회(The Society of Classical Poets) 연례대회에서 우승해 2019년 뉴욕에서 시 낭송을 한 바 있다. 그의 최신 시집은 ‘스테어웰(StairWell)’이다. 세일과 그의 ‘단테 프로젝트(Dante project)’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EnglishCantos.home.blog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경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