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업체 동원하고 복잡한 거래 구조로 탈세
일당 17명 중 중국인 14명…현지 매체 “중국인 부부가 주범”
이탈리아 당국이 중국산 불법 수입품을 유통하며 대규모 탈세를 저지른 조직을 적발하고 7천만 유로(약 1027억 원) 상당의 자산을 동결했다. 이번 조치는 유럽이 중국발 탈세 상품 단속을 강화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지난 6일(현지시각) 이탈리아 중앙통신(ANSA)에 따르면, 이날 이탈리아 금융경찰은 로마와 피렌체에서 중국산 제품을 불법 수입한 혐의로 17명의 자산을 동결했다고 발표했다.
체포된 이들은 의류, 가방, 액세서리 등 다양한 제품을 중국에서 들여오면서 서류를 조작해 관세와 부가가치세를 회피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작전은 유럽검찰청(EPPO) 로마 지부가 주도했으며, 작전명은 ‘드래곤’으로 명명됐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적발된 17명 중 13명은 중국계, 4명은 이탈리아인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중국계 사업가들이 설립한 29개 회사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불법 유통을 벌였다. 피렌체, 프라토, 로마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중국산 제품을 불법으로 수입한 뒤, 복잡한 유통 과정을 거쳐 세금을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에서 수입된 상품은 먼저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세관 절차를 마친 후 이탈리아의 물류 허브로 보내졌다. 이후 허위로 설립된 ‘유령 업체’들을 거쳐 거래가 이뤄진 것처럼 조작되고 가짜 세금계산서가 대량으로 발행됐다.
현지 매체 ‘로마 투데이(Roma Today)’는 조직의 주요 운영자가 중국인 부부라고 보도했다.
이들은 합법적인 기업과 전문가들을 활용해 중국산 제품을 유럽 시장에 유통하며 부가가치세를 완전히 회피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유럽 내 여러 국가에서 자유롭게 거래가 이뤄진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불법적인 방식의 유통망을 구축했다.
유럽 당국, 중국발 탈세 상품에 골머리…단속 강화
유럽검찰청은 3월 3일 발표한 2024년 보고서에서 부가가치세 탈세가 유럽연합(EU)의 재정 손실에서 가장 큰 비중(53%)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특히 휴대폰 등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탈세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계 업자들이 주도한 중국산 상품의 불법 대량 유통은 정부에 재정적 손실만 입히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유럽 기존 업체들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실정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발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한 탈세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일부 중국 온라인 쇼핑몰은 가격을 속여 관세를 회피하거나, 상품이 다른 EU 국가로 배송된다고 허위 신고해 세금을 내지 않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품이 유럽 각국의 암시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합된 연방국가 성격으로 인력과 물적 자원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는 EU의 특성을 악용하는 셈이다.
벨기에 매체 ‘더 스탠다드(De Standaard)’는 중국 온라인 쇼핑몰 ‘테무(Temu)’ 등이 탈세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검찰청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산 전자상거래 상품의 불법 유통으로 인해 벨기에 정부가 입은 세금 손실만 6억1100만 유로(약 8961억 원)에 달했다.
벨기에의 세 번째 규모 승객 공항이자 최대 화물 공항인 리에주 공항은 중국발 전자상거래 물품의 주요 환적지로, 하루 평균 20만 개 이상의 중국발 소포가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년마다 폐업하고 새 회사 설립해 추적 따돌리기도
유럽검찰청은 탈세 조직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2년마다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밝혔다. 한 기업이 일정 기간 운영되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을 위험이 커지면 폐업하고, 새로운 법인을 세워 같은 방식으로 탈세를 반복하는 구조다.
이탈리아 당국은 이번 단속을 계기로 중국발 불법 수입품 단속을 더욱 강화할 방침이다. 또한, 유럽연합(EU) 차원에서도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에 대한 세금 규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편, 앞서 5일에는 태국 경찰이 자국 내 중국산 위조 상품 유통조직 창고를 습격해 50만 개 이상 물품을 압수한 바 있다.
유럽과 동남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중국 내 과잉생산 구조와 맞물려 이해되고 있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공장 역할에서 밀려나면서 수출 위주의 대량 생산 경제체제를 구축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정부를 이끄는 공산당 지도부는 고통스러운 구조 개혁 대신 과잉생산 체제를 그대로 두고 자국에서 남아도는 물품을 민간 업체를 통해 해외에 덤핑하는 손쉬운 편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이 자국민의 편의를 위해 제공하는 소액 면제세도를 이용해, 품질 우려가 제기되는 중국산 저가 물품을 쏟아내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고용과 생산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상대국의 경제를 왜곡하고 기업을 고사시키려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중국계 유통 조직이 활개를 치면서, 현지 당국의 경계심을 자극함으로써 오히려 대중 무역장벽을 높이고 중국산 물품과 범죄조직에 대한 수사로 이어지는 역풍을 맞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