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하는 ‘달’의 위로…두 시인의 마음을 비추다

말레나 피게(Marlena Figge)
2025년 02월 25일 오전 9:17 업데이트: 2025년 02월 25일 오전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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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뛰어넘어,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쓰여진 두 시가 ‘달빛이 비치는 언덕 위’에서 만난다.

해는 슬픔에 잠긴 시인의 친구가 돼 주지 못한다. 적어도 달에게서 받는 위로는 기대할 수 없다. 달빛은 좀 더 유연하다. 때로는 로맨틱하게 차오르기도 하고, 그 생기가 사그라들기도 한다. 몽환적인 은빛으로 빛나기도 하고, 애잔한 순백으로 빛나기도 한다. 

수많은 시가 슬픔에 잠긴 이의 한탄을 함께하는 달을 그렸다. 그러고 보면 슬픔과 한탄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찾으며 또 다른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시 속에서 나의 감정을 비추는 구절들과 만난다. 슬픔 속에 있을 때, 같은 고통을 표현한 시에서 위안을 얻고,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위로받는다. 이미 오래전 누군가가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비추는 시를 남겨 두었다.

‘달빛 아래 바다의 범선’(1840년대 초), 이반 아이바좁스키, 판넬에 유화, 개인 소장 | 퍼블릭 도메인

그중 한명이 바로 필립 시드니 경(1554-1586)이다. 그는 소네트* 연작 ‘애스트로필과 스텔라’ 중 ‘소네트 31’에서 짝사랑의 슬픔을 노래했다. 이 소네트는 짝사랑의 애달픔을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달에 투영하여, 마치 달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것처럼 그려낸다. 이는 감정이입법이라는 시적 기법이다.
(*역주- 14행의 정형시)

1580년대에 쓰인 이 시는 얼핏 보면 단순히 달을 향해 제 처지를 한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이 곱씹을 만한 요소가 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나를 향하지 않는 일이란, 우리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 달이여, 그대는 어찌
슬픈 걸음으로 하늘을 오르는가!
어찌 그리도 조용히, 어찌 그리도 창백한 낯인가!
혹시 저 하늘에서도
바쁜 궁수(*역주- 큐피드)가  날카로운 제 화살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오랜 세월 사랑을 알아 온 눈동자들이
사랑을 판단할 수 있다면, 그대도 연인의 고통을 겪고 있나니
나는 그대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어 냈다

지친 듯한 그 우아함이ㅡ
내게는, 같은 것을 느끼는, 그대의 처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동료애로써, 오 달이여, 내게 말해 다오
그곳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이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가? 그곳의 미인들도 교만한가?
그들도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그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되레 비웃는가?
그들도 감사함을 모르는 것을 미덕이라 부르는가?

시에서는 하늘로 무겁게 올라가는 달을 마치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하늘에서도 상사병이 존재할 거라고 추측한다. 자신 또한 상사병을 겪어 보았기에, 다른 존재의 아픔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고 믿는다.

두 번째 연의 도치법*은 의미심장하다. (*역주- 말의 차례를 바꾸어 쓰는 표현법)

“지친 듯한 그 우아함이ㅡ
내게는, 같은 것을 느끼는, 그대의 처지가 드러난다”

생각이 다음 행으로 이어지면서 ‘내게는’이라는 말이 강조되는데, 이는 달의 슬픔을 읽어 내는 것이 오직 화자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달은 아예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일련의 질문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왜 사랑은 약점이 되는가? 왜 미인은 교만한가? 왜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에게 사랑을 바치는 이들을 비웃는가? 왜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덕목으로 여겨지는가?

특히 그의 세 번째 질문은 인간 본성의 한 가지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냉정해지기도 한다.

1591년판 ‘애스트로필과 스텔라’에 실린 필립 시드니 경의 초상화 | 퍼블릭 도메인

존 바투네크 신부는 마가복음의 십자가형에 대한 묵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이다. 사랑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주고, 손을 내밀고, 주고 싶어 하지만 마음이 닫혀 있는 상대에게는 그 힘이 무력해지고 만다. 또 어떤 때는 상황을 전혀 통제할 수 없어서 사람을 사랑하여도 그들이 마음을 닫아,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던 그리스도처럼 그저 바라보며 기다리고, 기도하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는 어떤 것도 해줄 수 없고, 다만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다.

또 다른 달빛 시인

그러나 고통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예술 전반, 특히 시에 있어서 그렇다. 고통은 시인을 만든다.

이탈리아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1798-1837)가 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필립 시드니 경보다 몇 세기 뒤에 활동했는데, 그 또한 ‘달’을 향해 시를 썼다.

레오파르디는 허약해 짧은 생을 살았다. 그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 레카나티의 저택에서 보냈다.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사후 초상화(1897) | 퍼블릭 도메인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라틴어에서 유래한 언어들을 가르쳤던 로망스어 교수, 모리츠 레비는 그의 논문 ‘레오파르디의 시에 나타난 침묵과 고독’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레오파르디가 덜 고통받았다면, 세상은 아마도 위대한 시인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주로 자신의 불행과 절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고통의 표현은 햄릿의 유명한 독백처럼 보편적 불행과 슬픔의 어조가 선명하게 울린다.”

레오파르디는 달에게(Alla luna)’라는 시에서 마치 시드니가 그랬던 것처럼 달을 향해 말을 건넨다.

아름다운 달이여, 나는 얼마나 또렷이 기억하는가
꼭 일 년 전 그때를, 이 언덕에 올라
고통 속에서 그대를 바라보았지
그때도 그대는 저 숲 위에 걸려 있었네
지금처럼, 온 숲을 그 빛으로 가득 채우며

하지만 내 눈은 안개에 물든 듯 흐릿했고
그대는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으로 보였네
내 눈이 억누를 수 없는 눈물로 가득했기에
아, 내 삶은 비참하고 지루했으며,
지금도 그러하구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달이여!

그래도 이 기억이 내게는 기쁨이다
내 슬픔의 나이를 헤아려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청춘의 날에,
희망이 앞에 길게 펼쳐져 있을 때에는,
추억이 적을 때는, 비록 슬픈 기억이라도
비록 그 슬픔이 계속될지라도! 

레오파르디의 시는 과거의 성찰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이다. 그는 먼저 달빛이 비치는 밤을 떠올리고, 눈물이 가득 차 흐려진 시야 속에서 왜곡되어 보였던 달의 모습을 회상한다. 

시를 쓴 당시, 그의 삶의 고통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성찰에서는 묘한 위안의 원천이 더해진다. 청춘은 아직 긴 세월이 남아 있고 기억해야 할 일들이 적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슬픈 기억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슬픔을 되돌아보는 것이 오히려 또 다른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오파르디는 과거와 동일한 장소에서 달을 동일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일관성(연결)을 느낀다. 인류 역사의 더 큰 흐름에서 보면, 레오파르디와 필립 시드니는 달을 바라보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공유하는 데서 서로 연결된다.

그 이상으로, 레오파르디는 자신의 성찰 속에서 왜 위안을 느끼는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리츠 레비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낭만파 시인들과 삶의 권태와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모두 ‘달’을 향해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그들은 아마 자신과 달 사이에서 비밀스러운 친밀감과 교감을 발견한 것 같다.”

어쩌면 시인은 일부러 이 비밀을 달과 자신만의 것으로 남겨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 속에서 달은 그저 묵묵한, 숲을 은은한 빛으로 부드럽게 채우는 존재로 그려진다.

개인적인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레오파르디는 시를 보편적 경험으로 이끈다. 수많은 외로운 이들이 화자처럼 달에게서 위로의 상대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달은 어둠 속에서 빛나며 홀로 떠 있어, 마치 사람들과 같은 처지로 보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이 눈앞에 실제로 구현된 모습, ‘달’을 바라보면서 묘한 위안을 얻는다. 따라서 이 시는 필립 시드니 경의 시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달은 시대를 초월해,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봐 왔다. 지상의 고난에서 떨어져 있는 달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를 넘어선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김지연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