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을 건너며…차이콥스키 ‘겨울날의 백일몽’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5년 02월 06일 오후 9:25 업데이트: 2025년 02월 06일 오후 9:25
TextSize
Print

영하로 떨어지는 한파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요즘, 계절에 어울리는 음악이 위안을 주기도 한다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백일몽’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완성된 곡으로, 길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게 될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전해진다.

차이콥스키의 초상화, 에밀 로이틀링거 | 퍼블릭 도메인

포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는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 사계 등이 꼽힌다. 겨울날의 백일몽은 이들만큼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이 곡에 얽힌 일화를 알게 되면 곡에 대한 감흥이 더욱 커진다.

차이콥스키와 루빈스타인의 만남

1900년 사진 속 니콜라이(왼쪽)와 안톤 루빈스타인(오른쪽) | 퍼블릭 도메인

1866년 초, 러시아의 작곡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5~1881)은 모스크바 음악원을 설립했다. 이곳은 현재는 러시아의 줄리아드 음악 대학교라 불릴 만큼 명문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당시 니콜라이는 재능 있는 교수진을 채용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당시 차이콥스키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아직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루빈스타인은 전도유망한 젊은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를 음악이론 교수로 임명했다.

루빈스타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는 반짝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음악가지만, 오만함으로 인해 여러 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자신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체벌을 가하기도 했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친절한 면모를 보였다는 기록도 많다. 그는 가난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급여 대부분을 기부했고, 특히 차이콥스키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그의 발전을 지원했다.

불안감에 휩싸인 예술가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곧 교육과 창작 활동 간의 갈등으로 불안감을 겪기 시작했다. 1866년 봄, 그의 작품 서곡 F장조가 성공을 거두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생애 첫 대작인 교향곡 1번 ‘겨울날의 백일몽’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칸타타 곡이 혹평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체력과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불면증과 두통, 환각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에 끊임없이 곡을 수정하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

엄격한 규율 아래 이어진 탐미

완벽하고 아름다운 곡을 완성하기 위해 차이콥스키는 엄격한 규율에 맞춘 일과를 정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넷째 동생 안토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당시 일과에 관해 설명했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 침실에서 루빈스타인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오전 11시부터는 수업을 진행하거나 진행이 지지부진한 교향곡 작업을 하며 3시간 반 동안 방에서 작업에 몰두한다. 오후에는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고, 사교활동을 한다. 자정에 귀가해 작곡을 하고 독서를 한다.”

그는 사망 전 30년간 이러한 일과를 계속 지켰다. 그의 일생에 걸친 노력에 대해 작가 알렉산더 포즈난스키는 “작업을 완벽히 하려는 철저한 규율”이라고 표현했다.

정신적 붕괴

러시아 클린에 있는 차이콥스키의 동상 | Ninetails/Shutterstock

그는 25세의 청년에 불과했지만, 매일을 부담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며 작업을 진행했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카페인과 담배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환각과 감각 마비를 경험하며 정신적 붕괴를 겪었다. 당시 그를 진료한 의사는 ‘광기에 닿기 한 걸음 전’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평생을 불안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지만, 교향곡 1번을 쓰던 시기에 가장 증상이 심각했다. 그는 결국 요양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해 치료에 전념했다. 그는 루빈스타인의 형이자 음악원장인 안톤에게 미완성인 교향곡을 보내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안톤은 혹독한 비평으로 다시 곡을 수정하라고 지시했고, 그는 곡을 수정해 다시 안톤에게 보냈다. 1867년 초, 교향곡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됐다. 지휘를 맡은 안톤은 전곡 연주를 거부했고 결국 2, 3악장만 대중에게 선보이게 됐다.

이에 차이콥스키는 짐을 싸서 다시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는 다시 곡 수정에 몰입했고, 1868년 2월, 작곡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교향곡 1번이 완전한 형태로 연주됐고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지휘를 맡은 니콜라이는 그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차이콥스키는 수많은 청중 앞에서 처음으로 여러 차례 커튼콜에 응하며 성공을 만끽했다.

‘겨울날의 백일몽’

차이콥스키는 대부분의 교향곡에 정식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첫 교향곡인 1번에만 제목을 붙인 것은 당시 아직 어렸던 그가 멘델스존의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겨울날의 백일몽’은 이 곡의 이미지와 작곡가 자신의 격동적인 감정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악장 ‘겨울 여행의 꿈들’은 플루트와 바순이 도입부를 이끌며 몽환적인 선율로 관객을 순식간에 매혹한다. 이어 바이올린이 경쾌한 음색으로 등장해 겨울날 썰매를 타고 다니며 겨울의 여러 풍광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선율에서는 클라리넷이 등장해 앞부분과 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곡의 서정성은 차이콥스키의 후기 작품을 예견하게 했다. 45분가량 연주되는 1악장은 관객들을 벅찬 겨울 풍경 속에 데려다 놓는다.


2악장 ‘황량한 땅, 안개의 땅’은 1악장에 비해 더욱 명확한 표제적 성격을 띤다. 약음기를 단 현악기들의 합주로 시작되는 2악장은 애수 어린 오보에 선율이 시작을 알린다. 점차 다른 현악기들의 연주가 이어지며 러시아풍 선율이 애절하면서도 감미롭다. 나부끼는 듯한 플루트 소리는 러시아의 황량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악장의 마지막 무렵에는 인상적인 호른 연주가 돋보인다.

3, 4악장에는 제목이 별도로 붙지 않았다. 차이콥스키는 3악장을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올림 다단조에서 가져와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활기차고 우아한 이 악장은 1862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멘델스존의 피아노 전집의 영향이 드러난다. 마지막 악장인 4악장에서 그는 러시아 민요 선율을 차용했다. 이 악장은 뚜렷한 민족적 특성을 보이며, 다양한 관현악적 짜임새를 엮어 장대하고 승리에 찬 결말로 이어진다.

내면의 고난을 이겨낸 송가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완성한 후,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 친구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했다. 그의 동생 모데스트는 이 곡을 쓰던 당시 그에 대해 “다른 어떤 작품도 그에게 이토록 큰 노력과 고통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지난한 고통의 시간은 결국 눈부신 결실을 보였고, 그의 음악 인생에 큰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됐다. 비록 음악가로서의 삶 초반에 탄생한 곡이기에 완성도 면에서 아쉽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제1번 교향곡 ‘겨울날의 백일몽’은 청년기의 차이콥스키가 내면의 고통과 혼란을 극복하고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