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여왕으로…앤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속적인 묘사

제임스 바레셀(James Baresel)
2025년 01월 13일 오후 2:00 업데이트: 2025년 01월 13일 오후 2:07
TextSize
Print

고드프리 넬러와 그의 제자 마이클 달은 앤 여왕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다.

1702년 3월 11일, 영국의 앤 여왕은 첫 의회 연설에서 “나는 나의 마음이 온전히 영국인임을 알고 있다”고 선언했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정치와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앤 여왕의 이 선언이 진심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러한 그녀의 언급은 그녀가 영국의 대중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키웠다는 것을 반영하며, 이는 고드프리 넬러와 그의 제자 마이클 달이 그린 그녀의 유명한 초상화에서 잘 드러난다.

공주의 초상화

앤 여왕 초상화, 1690년경, 고드프리 넬러 작. 캔버스에 유채; 92인치 x 56 1/4인치.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 퍼블릭 도메인

고드프리 넬러가 앤 공주의 초상화(1690)를 그렸을 때, 영국 궁정은 문화적, 정치적, 도덕적 측면 모두에서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1660년에서 1688년까지 앤의 삼촌(찰스 2세)과 아버지(제임스 2세)는 군주가 다양한 비군주적 정부 형태를 대체하면서 시작된 영국의 왕정복고 시대를 통치했다. 이 기간 영국은 내전(1642~1651년)을 겪어야 했고, 1649년엔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참수됐으며 1688년엔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폐위되는 등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 있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유럽의 라틴계 사람들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그들의 부모인 찰스 1세와 부인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플랑드르 바로크 예술을 영국에 소개한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다. 또한,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둘 다 망명 생활의 대부분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보냈다. 찰스 2세는 포르투갈인 캐서린과 결혼했고, 이탈리아인 메리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아내였다.

청교도 통치 10년 후, 영국인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화려한 패션과 같은 과도한 성적 표현과 시대적 환경을 받아들였다. 피터 릴리의 ‘윈저 궁정의 여인들’ 시리즈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에 대한 예술적 묘사는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를 연상시키는 관능미로 기울었다.

많은 영국인이 느슨한 도덕성, 라틴 문화, 비교적 독재적인 군주제, 그리고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경향이 하나의 패키지로 함께 간다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받아들였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었고, 그의 중앙 집권적 독재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비난을 받았다. 제임스 2세가 폐위된 후, 새로운 질서는 영국이라는 섬나라 특유의 국민성과 그들의 개신교적 절제를 연관시키려고 노력했다. 앤은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가 윌리엄(찰스 1세의 손자)과 메리(그녀의 친언니)에게 전복되기 전부터 이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정숙한 공주에서 품위있는 군주로

1690년경, 고드프리 넬러가 그린 앤 여왕 초상화의 일부 | 퍼블릭 도메인

넬러가 1690년에 그린 앤의 초상화에서 그녀는 왕족의 모습과 절제된 모습으로 묘사되길 원했다. 그녀의 드레스와 가운은 각각 황갈색과 연한 갈색이며, 드레스 역시 왕족을 묘사하는 데 종종 사용되는 호화로운 빨간색이나 파란색이 아닌 흰색 트림이 사용됐다. 그녀의 보석은 지위와 부를 보여주지만, 당시 17세기 엘리트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보석이 많이 장식된 옷의 화려함을 연출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중립적인 색상으로 표현했기에 그녀를 돋보이게 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녀의 머리는 품위 있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마 위에 높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 옆의 낮은 기둥 혹은 테이블에 있는 작고 비교적 단순한 왕관은 왕족의 지위를 눈에 띄지 않게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앤 여왕의 초상화, 1702년~1704년경, 고드프리 넬러 작. 캔버스에 유채, 29 9/10인치 x 25 1/10인치. 영국 왕립 컬렉션 | 퍼블릭 도메인

15년 후, 여왕으로서 또 다른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가 이 초상화를 다시 그리길 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702년에서 1704년경에 넬러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에서 앤은 나이 든 40세의 무뚝뚝한 부인이 되어 버렸는데, 이는 17번의 임신, 12번의 유산, 살아남은 다섯 자녀의 죽음, 그리고 반복되는 통풍으로 인한 좌식 생활의 결과였다.

영국의 통치자로서 그녀의 가장 중요한 초상화에서, 앤은 1690년에 그려진 초상화에서 표현됐던 젊음과 순결함에 더해 생생한 색상과 그녀의 지위가 명확하게 표현되기를 원했다. 넬러의 제자 달은 그 이미지를 완벽하게 포착했다. 앤의 얼굴, 머리카락, 포즈, 배경의 표현은 넬러의 초상화와 거의 동일하지만, 이제 그녀는 흰색과 파란색 트림이 있는 반짝이는 금색 드레스와 짙은 보라색 로브를 입고 있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왼손이 몸을 가로지르는 것을 그리는 대신, 그녀의 오른손이 왕족의 왕관과 홀, 구슬을 가리키는 것을 그렸다.

마이클 달이 그린 앤 여왕의 초상화, 1702년경. 캔버스에 유채; 93 1/4인치 x 57인치.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 퍼블릭 도메인

여왕 앤은 영국의 18세기 황금기를 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점 외에도 회화, 연극, 시, 음악 등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을 일궈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모토였던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언제나 같은)’을 앤 여왕 역시 모토로 사용했는데, 이는 영국을 프랑스와 스페인 영향 이전의 가치와 전통으로 되돌리려는 그녀의 사명을 반영한다.

이후 그녀의 세련미와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딴 건축과 가구 스타일이 등장했다. ‘퀸 앤 스타일(Queen Anne style)’은 바로크의 화려한 특성을 버리고 더 정숙하고 신고전주의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그녀의 예술적 미학을 반영한다.

*이혜영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