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초상화에 담긴 美의 기준…‘햄프턴 궁정의 여인들’

제임스 바레셀(James Baresel)
2024년 12월 29일 오후 6:50 업데이트: 2024년 12월 29일 오후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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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리 넬러의 ‘햄프턴 궁정의 여인들’ 연작 초상화는 윌리엄 3세 시대 왕실 궁정에서 절제와 겸손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8점의 연작 초상화 ‘햄프턴 궁정의 여인들’은 아름다움과 절제, 장엄함과 품위가 어우러져 있어 고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는 18세기 중후반의 작품으로 착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 연작은 한 세기 전, 영국 바로크 초상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독일계 영국인 화가 고드프리 넬러(1646~1723)의 그림이다.

렘브란트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볼(1616~1680)의 가르침을 받은 고드프리 넬러의 작품은 북유럽 바로크 전통에서 비롯된 강렬하고 뚜렷한 흔적을 보여준다. 정제된 분위기, 인물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편안한 자세, 중후한 색조의 의복은 플랑드르 바로크의 극적이고 과장된 양식과는 달리 네덜란드 바로크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네덜란드에서 수학을 마친 고드프리 넬러는 영국에서 초상화가로 경력을 시작하기 전 로마에서 6년간 카를로 마라타(1625~1713)를 보조했다. 마라타는 라파엘로의 전통을 계승한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고전주의적 균형과 우아한 특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넬러는 마라타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냈으며, 특히 ‘햄프턴 궁정의 여인들’에서 고전주의적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한 기법의 차원을 넘어 넬러 자신의 예술적 선호도를 반영하며, 고전적 품위와 절제를 강조하는 그의 독창적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드프리 넬러 경의 자화상, 약 1680년경. 캔버스에 유채, 크기: 25 5/8 × 21인치. 예일 영국 미술 센터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찰스 2세 궁정초상화 연작, 윈저 궁정의 여인

1676년 고드프리 넬러가 영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국 예술계는 피터 폴 루벤스와 안토니 반 다이크가 남긴 바로크 양식을 예술적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찰스 2세의 궁정화가였던 피터 릴리(1618–1680)는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며 생애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찰스 2세는 도덕적 해이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잘 알려진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 보낸 시절의 영향을 받아 영국 궁정의 규칙과 문화를 새로 정립했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움은 곧 권력으로 간주됐고, 궁정의 애첩들은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찰스의 통치에 따라, 릴리는 ‘윈저 궁정의 여인들’ 초상화 연작에서 궁정 여인들이 추구하던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모습을 발전시켰다. 그의 11점의 연작 초상화는 당시 이상적으로 여겨진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 초상화들에서 여인들은 관능적이고 나른한 눈매, 느슨한 자세, 목선이 낮은 의상과 드러난 어깨 위로 긴 곱슬머리가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라 벨 해밀턴(엘리자베스, 그라몽 백작부인)’, 약 1663년경, 피터 릴리 작품. 캔버스에 유채, 크기: 49 1/4 × 40인치. 영국 햄프턴 코트 궁전 소장 | 퍼블릭 도메인(PD-US)

당시 영국 예술은 왕당파의 정치, 도덕, 그리고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이는 기독교 유럽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예술적 도덕성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에서 여성의 성적 표현은 주요한 초점이 아닌, 절제되고 미묘하며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됐다.

메리 배곳, 팔머스 및 도싯 백작부인의 초상화, 약 1664년에서 1665년경, 피터 릴리 작품. 캔버스에 유채, 크기: 49 × 39 7/8인치. 영국 왕실 소장 | 퍼블릭 도메인(PD-US)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영국에 영향을 미친 청교도적 관점은 과장되거나 무례하며, 부도덕한 모든 것을 강력히 비난했다. 청교도들은 예술에는 성적인 암시조차 포함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릴리의 초상화는 당대의 도덕성, 혹은 그것의 부재를 반영한 작품으로 간주됐고, 그는 방탕함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청교도들은 의회를 강화하고 군주제를 약화하려 했던 휘그당 정치 세력의 중요한 요소였다. 넬러는 주로 휘그당 계열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지만, 1680년 릴리가 사망한 후 왕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면서 이러한 정치적 연관성은 완화됐다.

초기에는 궁정화가로 임명된 것이 넬러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예술계는 화려하고 극적인 바로크 양식을 선호했지만, 넬러는 더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채택했다. 그는 왕당파의 방탕한 분위기를 반영한 요염하고 관능적인 예술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1688년, 왕의 동생이자 후계자였던 제임스 2세가 권좌에서 쫓겨나고, 찰스 1세의 손자인 윌리엄과 제임스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의 문화적 풍경은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넬러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절제와 품위를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초상화 한 쌍, 1690년, 고드프리 넬러 경 작품. 캔버스에 유채. 윈저 성 소장, 영국 왕실 소장품 | 퍼블릭 도메인(PD-Art)

넬러의 초상화 연작, 햄프턴 궁정 여인

1690년경, 고드프리 넬러는 감정보다는 품위, 장엄함, 지성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적인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초상화 ‘윌리엄 3세’, ‘메리 2세’, ‘베드퍼드 공작 1세’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 같은 고전주의로의 전환이 넬러 자신이 주도한 건지, 아니면 후원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넬러와 새로운 정권은 절제와 겸손에 대한 공통된 헌신을 공유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반영됐다.

(좌) 다이애나 드 베어, 세인트 올번스 공작부인의 초상화, 1691년, 고드프리 넬러 경 작품. 캔버스에 유채, 크기: 91 9/10 × 45 1/5인치. (우) 레이디 메리 벤팅크, 에섹스 백작부인의 초상화, 약 1691년, 고드프리 넬러 경 작품. 캔버스에 유채, 크기: 91 3/5 × 44인치. 영국 왕실 소장 | 퍼블릭 도메인

햄프턴 궁정의 여인들은 이러한 넬러의 가치관이 뚜렷이 표현된 작품이다. 이 연작은 릴리의 ‘윈저 궁정의 여인들’에서 나타나는 열정, 사치, 요염함에 대한 절제된 응답이었다.

넬러의 초상화는 더 절제되고 겸손하며 견고한 네덜란드 양식과 새로운 문화적 조화를 이뤘다. 릴리의 ‘윈저 궁정의 여인들’이 왕의 애첩들을 묘사했던 것과 달리, 넬러의 초상화는 메리 여왕과 가까운 귀족 가문 출신의 부인들, 즉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여인들을 주제로 담았다.

고귀한 기품을 훌륭하게 포착해 낸 초상화를 통해 넬러는 여성의 ‘겸손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찬미했다. 그의 예술성은 후대 영국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1723~1792)이 구현한 예술적 스타일과 견줄 만했으며, 이러한 예술적 전개의 신호탄이 됐다.

*장유빈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