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 성장률 목표 맞추려 제조업체에 대출·보조금
업체들은 공장 계속 가동하면서도 재고 처리하려 가격 인하
WSJ “악순환 못 벗어나…일본 잃어버린 30년 수준 디플레이션”
중국 경제가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도 여전히 과잉생산을 멈추지 못해 가격 하락이 더 심화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4일(현지시각) 중국 최대 규모 종이 생산업체 산둥천밍(山東晨鳴)제지의 사례를 통해 중국 제조업체들의 심각한 현황을 조명했다. WSJ에 따르면, 악성 재고를 처리하려 가격을 낮추는 전략은 이 업체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부분 제조업체가 채택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침체한 수요(소비)가 되살아나지 않고 있어, 가격을 낮춰도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팔리지도 않은 물건을 중국 제조업체들은 계속 찍어낼까. WSJ은 중국 정부의 보조금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경제성장률 목표를 달성하려면 제조업체가 계속 가동해야 한다.
산둥천밍제지는 지난달 공시를 통해 만기가 지난 채권이 18억2천만 위안(약 359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법원은 채무 분쟁 등을 사유로 이 회사의 은행계좌 중 51개를 압수·동결했으며, 25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천훙궈(陳洪國) 회장은 이달 초 사임했다.
WSJ은 산둥천밍제지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여느 중국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제품 가격 인하를 단행했지만, 상황을 전혀 개선할 수 없었으며 회사 적자는 계속 증가했다고 전했다.
중국의 소비 시장은 회복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각종 제품의 가격은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2.5% 하락하며 무려 26개월 연속 하락했다. 조만간 다시 상승할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는 6분기 연속 하락했다. 1분기만 더 이어지면 1990년대 후반 아시아의 금융위기 때와 같은 기록이다. 당시 중국의 GDP 디플레이터는 7분기 연속 하락했다. 현재 중국 경제는 아시아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
내년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산 제품 관세가 예고돼 더 전망이 어둡다. 이미 넘쳐나도록 생산되는 제품을 미국 시장에라도 팔아치우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중국 시장에서는 이미 수요가 생산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WSJ은 “우려되는 점은 디플레이션이 중국에 깊이 뿌리 박혔다는 것”이라며 “가격 하락으로 수익성이 악화한 기업들은 투자를 미루거나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사람이 지출을 줄일 것이고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생각해 지출을 미룰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싱크탱크인 중국연구센터의 페넬로페 프라임 창립이사는 “악순환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 11~12일 개최한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금리를 낮추고 정부 재정지출을 확대하겠다며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을 제시했다. 중국 공산당(중공) 중앙정치국이 주도한 이 회의에서는 ‘적절히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중공이 통화정책을 바꿔 돈을 풀겠다고 공식 발표하고 나선 것은 2008년 이후 처음이지만, 중국 기업에 절실한 ‘제품 가격 인상’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공 당국의 경기부양책이 소비의 지속적인 증가보다는 당장 급한 재정난 해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가격이 오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과잉생산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WSJ은 “중국 지도부가 자국 제조업체에 대출과 보조금을 확대하고 있다”며 산둥첸밍제지는 경영난으로 인해 생산량을 25%로 낮췄지만, 다른 기업들은 계속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1~10월 중국의 종이와 판지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10% 증가했다. 반면 중국의 종이 및 판지 가격은 2022년 10월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전기차 제조사 니오(NIO)의 최고경영자(CEO) 리빈은 지난 9월 애널리스트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중국의 내연기관 자동차 제조사들이 가격 인하라는 ‘지속 불가능한 사이클(악순환)’에 빠져 수익에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본 노무라증권은 중국의 생산자물가지수(PPI)가 내년 1.2%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호주에 본사를 둔 세계적 투자은행 매쿼리는 1% 하락할 것으로 추정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골드만삭스는 올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WSJ은 “문제는 더 낮은 가격에 대한 기대가 굳어지면 이를 뒤집기 어렵다는 것”이라며 중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금융데이터 분석회사인 팩트셋 리서치에 따르면 중국의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2006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보다 낮아졌다. 장기 국채 수익률의 하락은 투자자들이 해당 국가의 경제가 불안정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시장이 중국의 디플레이션 위험을 높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코넬 대학교 무역 정책 교수이자 국제통화기금(IMF) 중국 부문 책임자인 에스와르 프라사드는 “디플레이션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들의 미래 경제 전망에 대한 기대에 디플레이션이 깊이 자리 잡게 된다”며 “(중국은) 거시경제적 자극책을 사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