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탄압 피해자에서 북한 인권 수호자로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97년 6월, 1983년생, 14세의 한 북한 소년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 두만강 중국 측 기슭을 홀로 헤맸다. 울먹이며 같이 강을 건넌 외삼촌을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우성에 그쳤다. 지난밤 강을 건넜던 30대 후반의 외삼촌은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간 것이었다. 소년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두만강 기슭을 오르내렸다. 끝내 외삼촌은 찾지 못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유소년기를 보냈기에 굶주림에 시달리며 배움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던 그는 가족을 뒤로하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복음(福音)을 접했다. 날품팔이로 일하던 그는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일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2002년 대한민국에 정착한 소년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천천히 뚜벅뚜벅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세대 법학과를 거쳐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2019년 4전 5기 끝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탈북민 최초’ 변호사가 됐다. 이영현 법무법인 이래 변호사 이야기이다.
‘신(神)의 섭리(攝理·Providence)’를 믿고 실천한다는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폭정(暴政)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 인권 증진 사업을 ‘신이 부여한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지구상 최빈국의 하나이던 대한민국은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여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힌다. 지구상 최악의 인권 탄압국으로 꼽히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한민국에서 법률가가 된, 북한의 인권 탄압 피해자에서 북한 인권 수호자(Advocate)가 된 이영현 변호사의 인생 역정도 닮은 꼴이다.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이영현 변호사를 만나 삶, 인권, 북한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종교 자유가 없는데 탈북 후 신앙인이 된 것인가요?
“탈북 후 저를 처음 돌봤던 중국 동포(조선족) 집사, 가정교회(비인가 교회) 목사를 통해 중국에서 사역하던 한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을 믿게 됐고요. 개신교 장로회입니다.”
이영현 변호사는 중국 체류 시절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비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간절함도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1997년 탈북하여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의 조선족 집사 집에 의탁하게 됐습니다. 그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는데 ‘군식구’가 하나 늘었던 셈이죠. 눈칫밥을 먹다 일자리를 찾게 됐습니다. 지역 인테리어 업자를 따라 다니며 일을 거들었죠. 가끔 학교 외벽 페인트 칠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밧줄을 타고 벽에 매달려 페인트 칠을 하다 보니 제 또래 아이들이 교실 안에서 교과서를 읽고 있더군요. 그 때마다 저는 울먹이며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발 저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라고요.”
배움에 대한 절박함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그 시절을 이영현 변호사는 신앙심이 충만했던 시절로 기억했다. “그 시절은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신의 가호가 없이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때였습니다. 그에 비례하여 간절함은 더해졌고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에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합니다.
“만 19세에 한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부산의 모 고등학교 졸업 무렵 진로 선택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양한 직업들을 탐색했는데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는 직업이 없었습니다. 와중에 ‘변호사’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직업을 탐구할수록 매력적이었습니다. 저는 공익(公益)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이와도 맥이 닿아 있고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나날이 심각해지는 북한 주민 인권 증진을 위해서도 변호사가 되면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 옹호를 위해서는 법률 전문가, 즉 변호사가 되는 게 좋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변호사라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된 20대의 그는 연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사법시험 합격이 새로운 목표가 됐지만 ‘좁은 길’을 통과해야 했다. 한국에 익숙지 않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도 있었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험난했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의 모든 것이 낯설었던 저에게 법률은 이른바 ‘넘사벽(넘지 못할 4차원 벽)’ 같은 존재였습니다. 개념을 익히기는커녕 용어조차 낯설기만 했으니까요. 대학 재학 시절에는 사법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도전했죠. 현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난해한 법률 용어, 법률을 이해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어요. 담당 교수께 허락을 받고 강의 내용을 녹음해 다시 들으며 학습했지만 합격하지 못했죠.”
주변에서는 그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목표가 원대한 것은 좋지만 이건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공부한 학생에게도 사법시험 합격은 쉽지 않다. 변호사가 되는 꿈을 이루는 것은 무리다.’라고들 했다. “현실성 있는 직업을 찾으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습니다. 다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시행됐어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국립대이기에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대구에는 연고가 없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장점도 더해졌다. 법학전문대학원 과정과 변호사시험도 ‘좁고 험난한 길’인 것은 다를 바 없었다. 총 5번의 응시 기회가 주어지는 변호사시험에 4번 낙방했다. 절박했던 그는 말 그대로 촌음(寸陰)의 시간도 아껴가며 불철주야(不撤晝夜) 공부했고 마침내 ‘탈북민 1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영현 변호사는 이후 ‘공익의 대변자’로서 활동에 열과 성을 쏟고 있다. 자신은 비록 신의 가호에 힘입어 한국 땅을 밟고 각고의 노력 끝에 선망하는 직업도 갖게 됐지만 압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의 처지는 늘 가슴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대한변협인권재단 사무총장, 대한변협 북한이탈주민 법률지원위원, 통일부 산하 하나원 정책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북한 인권 문제 개선,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번 만남에서 이영현 변호사는 북한 인권 증진 활동이 ‘하나님이 준 사명’이라고 했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탈출기)’에서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고통받던 유대인 구출의 사명을 모세에게 부여했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북한 주민을 구하라.’는 사명을 주었다는 의미이다.
신앙인으로서 종교가 오늘날 하는 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요?
“탈북하여 중국에서 저를 보호해줬던 분들은 다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 후로도 오늘날까지 제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고 있는 분들도 대부분 성도(聖徒)이고요. 제가 신앙심이 깊고 복음(福音)의 의미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어도 신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의 부름과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는 삶의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늘 기도하며 신의 응답을 기다렸다고도 했다. “저는 순탄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고 고비도 있었죠. 법과대학 진학 등 삶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는 늘 기도하고 주변 분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결정에 앞서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기도 응답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정착 후 공부했던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교내에 기도탑이 있었고 옥상에는 기도실도 있었죠. 교훈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 세계의 청지기’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다하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던 학교였는데 자연 기도하면서 ‘북한 인권 변호사’라는 사명을 가슴에 새기게 됐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고난은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요.”
나름 성직(聖職)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군요. 목사나 사제와는 다른 개념이지만요.
“사실 변호사 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합법과 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일을) 하기도 해야 하니까요. 자칫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 있는 유혹도 존재합니다. 저는 본업 외에도 북한 인권 관련 활동에 나름 열심인데 몸은 힘들고 경제적 도움은 되지 않죠. 헌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소명 의식이 없이는 힘들다고 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고 인도해 주는 분들의 도움도 있고요.”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북한인권재단으로 이어졌다. ‘북한인권법’이 제정됐지만 현 야권의 비협조로 8년째 북한인권재단은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최재형 당시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국회에서 실종된 일곱 살 아이를 찾는다’ 제하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 7년, 그 기간이면 아이를 출산하고 학교에 입학시킬 연령이다. 그런데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출산 이후 어딘가에 버려진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 행적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에 묻는다. ‘북한인권재단, 어디에 버린 것이냐?”며 더불어민주당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6년 제정된 ’북한인권법‘에는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명시했다. 동법(同法) 제12조 1항에 따르면 북한인권재단 이사는 통일부 장관이 추천한 2명, 여야 교섭단체가 각각 추천한 5명, 총 12명으로 구성된다. 재단은 북한의 인권 실태 조사와 관련 정책 개발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여야 간 의견 차이로 이사 추천이 지연되면서 법 시행 8년이 지나도록 재단 설립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무부처 통일부는 2016년부터 올해 12월까지 국회에 재단 이사 추천을 요청하는 공문을 총 14회 발송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3부(재판장 정준영 부장판사, 김형진·박영욱 고등법원 판사)는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김태훈(사법연수원 5기) 변호사가 국회 사무총장과 국회를 상대로 낸 이사 추천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2023누72914)에서 각하 판결한 원심을 뒤집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국회 사무총장이 원고 및 선정자들을 재단 이사로 추천하지 않는 부작위는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즉 현 야권이 이사를 추천하지 않아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막는 행위 자체에 법적 하자가 있다는 의미이다.
북한인권재단이 8년째 출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라며 운을 뗀 이영현 변호사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 개념이 곡해됐다고 했다. “상식적인 일인데 인권은 인류 보편 가치입니다. 천부(天賦) 가치이고요. 그 점에서 ‘북한 인권’이라고 하여 특별하게 취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국 사례에 비춰봐도 한국 사회가 되돌아볼 점이 있다고도 했다. “구미(歐美)에서는 북한 인권 활동 단체에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원합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관심도 적고 이에 소홀한 편이죠. 한국의 북한 인권 활동가들이 외국 정부나 단체 보조금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니까요.”
근본 원인은 무엇이라 보나요?
“보편 가치인 인권 문제에 ‘정치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인권은 상대적 개념이 아닙니다. 절대적 개념이죠. 한국 사회는 정치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타산이나 당리당략에 따라 입맛에 맞게 북한 인권을 해석하고 접근하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 인권을 대하는 관점에 일관성도 결여되고요. 북한인권법도 지난한 과정 끝에 11년 만에 여야 합의,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법이 제정됐으면 취지에 걸맞게 운용해야 하는데 현 야권에서는 ‘북한 정권을 자극할 수 있다.’면서 북한인권재단 야당 몫 이사 추천을 8년째 보이콧하고 있죠. 하다 못해 김태훈 변호사가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제기했죠. 서울고등법원 판결 취지에 따르면 현 야권이 거부해서 이사 정족수 12명을 채우지 못해도 북한인권재단 출범은 가능합니다. 아쉽지만 정부 몫, 여당 몫 이사 7명 만으로도 재단을 출범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북한 인권 상황은 어떠하다 보나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개선 촉구’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효과는 없지만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영현 변호사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북한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고 했다. “‘유엔 인권이사회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를 비롯해서 국제사회가 인권! 인권! 목소리 높이니 북한 사회도 이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인권 개념조차 없었던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죠. 북한 소식통에 의하면 내부적으로 북한 관리들도 ‘이거 너무 인권 침해하는 것 아닌가?’ 식의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도 국제사회 눈치를 전혀 보지는 않을 수 없으니까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북한 인권 활동가 처지는 나아졌나요? 지난 정부에서는 각종 제재를 받았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에 초점을 맞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북한 주민에 대한 관심도 커진 듯합니다. 지난 정부와 차별화되는 점이죠. 대북 정책, 통일 정책에도 기조가 반영되고 있는데 탈북민을 비롯하여 북한 인권 활동이 자유로워진 측면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정부에서는 유·무형 제재가 많았었습니다. 인권 활동가들이 피소당하기도 하고요.”
이영현 변호사는 중국과 몽골을 거쳐 2002년 한국으로 왔다. 현지 개신교 선교사들의 도움하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자유의 땅에 올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중국 내 탈북민 강제 송환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도 조금 늦었으면 같은 운명이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중국 내 탈북민 강제 송환은 여전합니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고요.
“중국은 이른바 ‘G2’라고 주장하잖아요. 선진국은 아니지만 종합 국력 면에서 미국에 맞설 만한 강대국이라는 의미입니다. 헤게모니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은 지위에 걸맞은 책임도 요구받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대 상임이사국이기도 하잖아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어젠다 중 하나는 인권입니다. 중국도 강대국으로서 국제사회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인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요. 안타깝게도 국제사회가 ‘탈북민 강제 송환을 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중국의 태도는 소극적입니다.”
한국인이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헌법에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며,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이기 때문이죠. 한국 국민도 북한 주민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없거나 덜한 것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북한 주민도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바라보고 대우해줬으면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바라보고 연대도 해야 하고요. 요즈음 한국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약해진 듯합니다. ‘선진통일론’을 주창한 고(故)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적한 문제기도 하고요.”
탈북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도 따뜻하지는 않아요.
“정치적·이념적으로 북한 주민을 바라보고 해석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봅니다. 일부 단체에서는 북한 주민에게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체제와 주민은 분리해서 접근해야 함에도 말이죠. 반대 진영도 문제입니다. ‘북한체제를 굳이 자극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죠. 북한 주민이나 탈북민에 대해서도 ‘우리랑 다른 사람이다.’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하고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약 3만 4000명 정도입니다. 지방 한 개 군(郡) 인구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달리 말하여 동네 곳곳에 편의점이 있듯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곳곳에 탈북민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탈북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편견을 갖고 바라보고 때로는 오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제대로 이해하면 탈북민도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같은 한민족 DNA를 공유하고 있고요. 대한민국이 고난과 역경 끝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민주화-선진화도 이뤘잖아요. 민족 DNA에 잠재력이 내재돼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 주민, 탈북민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력 발현이 더딜 뿐인 것이죠. 마음을 열고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하면 편견은 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영현 변호사는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하고 법과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변호사가 되기 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 도움을 받았다.”며 사의(謝意)를 표했다. “피터은(한국명 은춘표) 선교사 부부는 제게 있어 친부모와 다를 바 없는 분들입니다. 늦깎이 고등학생을 사랑으로 보듬어준 고등학교 선생님들, 그중 이지수 선생님, 법과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 시절 은사인 김정주·정종훈·전용관·김민서 교수님, 제 영적 스승 정성진 목사님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준 KPX문화재단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