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 유세 기간, 재선에 성공하면 “딱 하루만 독재자”가 되고 싶다며 취임 첫날 강력한 행정명령을 내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2023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만찬 행사에서 “뉴욕타임스는 내가 독재자가 되고자 한다고 보도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며 “난 단 하루만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 국경 장벽 건설과 석유 시추 재개를 이유로 들었다.
그 이후에도 트럼프는 취임 첫날부터 매우 바쁘게 일하겠다는 약속을 거듭 반복했다. 그는 “국회의사당 20번 계단에 아주 작은 책상을 놓을 수도 있다”며 “그곳에서 취임 선서를 한 직후 (행정명령) 문서에 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가 집권 2기 첫날 몇 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인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미국의 대통령 임기 첫날은 여느 하루보다 짧다. 미국 수정헌법 제20조에 따라, 대통령의 행정권은 4년마다 열리는 대선 다음 해 1월 20일 정오에 신임 대통령에게 이전되기 때문이다.
행정명령은 미국 대통령이 의회를 거치지 않고 연방 법률과 거의 같은 효력의 정책들을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의회나 법원, 후임 대통령이 뒤집지 않은 한 효력이 유지된다. 트럼프, 바이든뿐만 아니라 역대 미국 대통령 대부분이 행정명령을 사용했다.
지난 2021년 1월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임기 첫날 17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 등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조치를 제외하면 국경 장벽 건설 중단, 기후변화 대응, 세계보건기구(WHO) 재가입 등 트럼프 시절 조치를 뒤집기 위한 명령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트럼프는 2017년 첫 취임 당시 단 한 개의 행정명령에만 서명했다. 오바마케어로 알려진 건강보험법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명령이었다.
최우선 과제…국경 안보 강화, 불법 이민자 추방
트럼프는 이번 대선 유세 초반, 재선에 성공하면 국경 안보와 이민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룰 것이라며 “첫날, 내가 할 첫 번째 일은 국경을 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하루 전인 지난 4일, 피츠버그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는 “(임기) 첫날 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추방 프로그램을 시작할 것”이라며 침략당한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구하고 사악한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둘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집권 1기였던 2017년 1월 25일 행정명령에서 국경 폐쇄와 국경 장벽 건설, 국경순찰대원 5천 명 추가 고용 등을 지시했으며, 이번 대선 당선 후인 지난 10일에는 톰 호먼 전 이민세관단속국 국장 직무대행을 국경 총괄자인 ‘국경 차르’로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에너지 비용 절감…물가 상승 억제에도 효과 기대
미국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것 역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과제다. 트럼프 당선인은 휘발유와 식료품 등 필수품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도 에너지 비용을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핵심은 화석연료 생산 장려 정책이다. 그는 지난달 9일 펜실베이니아 유세에서 “취임 첫날 펜실베이니아 에너지 노동자에게 할 말은 이것이다”라며 “프래킹(셰일가스 채굴을 위한 수압파쇄기법)”, “드릴링(시추)”을 외쳤다.
그가 화석연료 생산 장려를 행정명령을 통해 실행할 것인지 의회의 관련법 제정을 통해 추진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같은 달 31일 뉴멕시코주에서 “모든 연방기관에 상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모든 번거로운 규제를 즉시 철폐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화석연료 채굴을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물가를 잡기 위한 에너지 관련 정책 명령을 어떤 형태로든 첫날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부 내에 생활물가 담당 직책을 신설하도록 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팁 면세를 비롯한 세금 인하 및 감면, 신용카드 이자율 10% 임시 상한선 부과 등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경제 정책을 약속했다.
트랜스젠더 교육 및 사회주의·젠더 이념 주입 차단
학교 교육 역시 트럼프가 취임 첫날 강한 정책 기조를 밀어붙일 분야다.
그는 “첫날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비판적 인종 이론, 트랜스젠더 광기, 기타 부적절한 인종적, 성적 또는 정치적 내용을 강요하는 모든 학교에 대한 연방 자금을 삭감하는 새로운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요 폐지 타깃은 바이든 행정부의 ‘성별 확인 치료(Gender Affirming Care)’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도 강력하게 추진했던 이 정책은 아동의 성전환을 돕는 내용이다.
성별 확인 치료는 아동에게 성은 타고난 성별과 관계없이 고를 수 있으며 심지어 유동적(변화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동성애 가정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하며, 아동이 원할 경우 호르몬 주사는 물론 수술을 통한 불가역적 성전환까지 지원한다.
트럼프는 이를 “잔인한 정책이자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모든 연방기관에 모든 연령대에서 성전환, 젠더 이념을 선전하는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하도록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지난해 초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의회에) 연방 납세자 세금이 이러한 시술을 홍보하거나 지원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영구히 차단하고, 50개 주 전체에서 아동의 성적 절단(되돌릴 수 없는 수술요법)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요청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성년이 된 사람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존중하지만, 미성년자에게 되돌릴 수 없는 성전환을 제공하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미성년자에게 성전환을 시술한 의사에 대해 피해자 가족이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의료 전문가들은 미성년자에게 사춘기 차단제 등 성전환 약물을 투여하면 뇌와 장기의 생육을 저해하고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법무부에 지시해 대형 제약 회사나 병원 체인들이 장기적 부작용을 은폐하고 성전환을 시술해 부당한 이익을 챙겼는지 조사하도록 명령할 계획이다.
앞서 올해 3월 말에는 영국에서는 유일한 아동 트랜스젠더 병원인 ‘타비스톡·포트만 트러스트 성정체성 클리닉’이 폐쇄됐다. 이 병원이 아동에게 투여해 온 사춘기 차단제 등을 외부 기관이 연구한 결과 문제가 지적됐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또한 “전통적 가족상,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교육을 촉진하고 남성과 여성을 다르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들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축하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의무화 규정 폐지
2030년까지 판매되는 모든 신차의 절반 이상을 전기차로 전환하도록 한 바이든 행정부 규정도 트럼프가 폐지하려는 대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2021년 8월 대기오염 저감, 공중보건 증진, 기후 위기 해결 등을 내세우며 전기차 의무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자동차 산업에 의존해 온 공업지대 유권자들은 이 규정을 반기지 않았고,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마저 올해 9월 “바이든 대통령의 전기차 의무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캠프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전기차는 연방정부가 의무화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지난 9월 타운홀 미팅(유권자와 만남)에서 “순수 전기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가솔린 자동차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소비자의 권리”라고 말했다.
‘고인 물’ 관료 집단 해체 및 언론의 자유 보호
트럼프는 이번 대선 출마를 선언한 2022년부터 표현의 자유 보장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하면 몇 시간 내에 연방정부나 기관이 어떤 조직 혹은 개인과 공모해 미국 시민의 합법적 발언을 검열·제한·분류·방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내 검열에 관여한 모든 연방 관료”를 파악해 해고하겠다고도 했다.
트럼프가 언급한 ‘개인’ 혹은 ‘조직’은 미디어나 소셜미디어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해 6월 컴퓨터 과학자 렉스 프리드먼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바이든 행정부 관리로부터 코로나19에 관한 특정 정보를 검열·삭제하도록 요구받았다고 고백했다.
저커버그는 이어 “그런 정보들은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며 “나는 언론의 자유를 매우 지지한다”는 말로 백악관의 압력에 굴복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과 행정부 내부 관료들, 기득권층의 저항에 부딪혀 자신의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23년 3월 유권자의 심판 없이 고위 공직에 머물며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정부를 운영해 온 관료 집단 이른바 ‘딥스테이트’ 해체를 선언했다.
그는 워싱턴DC의 관료 체제를 고여서 썩은 집단으로 비판하고 국가를 되찾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10가지 계획을 발표했다. 그 핵심은 ‘불량 관료’ 해고를 쉽게 하는 2020년 행정명령의 재실행이다.
이 행정명령은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공무원들을 ‘F 등급(스케줄 F·Schedule F)’으로 분류해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예를 들어 대상이 되는 직책은 정부 기관의 광범위한 중간 관리자층으로 선임 분석관, 정책 고문, 실무 담당자 등이다.
해당 행정명령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중간 관리자들을 선출하거나 대통령이 임의로 해고, 임용하도록 할 경우 정책의 일관성 및 연속성이 깨지고 축적된 지식과 노하우가 약화하며 정부 기능이 정치에 휘둘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이 행정명령은 트럼프 임기 말 내려졌고 트럼프가 재선 실패로 물러나면서 발효되기 전에 폐지됐다. 연방정부 공공 정책을 조사하는 비영리 단체의 설립자인 제프리 터커는 2022년 칼럼에서 이 행정명령을 “혁명적인 변화, 워싱턴과 모든 정치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2023년 계획 발표 영상에서 “국가 안보 기관과 정보기관의 모든 부패한 관리들을 제거하겠다”며 “얼굴 없는 관료들이 보수파, 기독교인, 좌파의 정적들을 다시는 표적으로 삼아 박해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임기 첫날 행정명령으로 트럼프가 10가지 계획을 모두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불분명하다. 이 계획에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해 정보기관의 감청, 검열, 부패를 밝혀내도록 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최근 트럼프는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IT 기업가 일론 머스크의 정부 효율성 위원회 설립 제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구축해 납세자의 세금을 절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원회를 제안한 머스크가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될 전망이다.
* 이 기사는 제니스 아일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