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전국구 매체 중 뉴욕타임스만 특정 후보 지지…나머지는 중립
지지 선언 찬성 측 “매체의 사회적 책임” VS 반대 측 “독립성 약화”
미국 대선 막바지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워싱턴포스트(WP)’, ‘LA 타임스’, ‘USA 투데이’ 등 미국 주요 매체들의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LA타임스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왔지만 올해는 관행을 깼다. 편집위원회는 관행에 따라 특정 후보 지지 사설을 작성했지만, 사주가 개입해 차단한 후 중립을 발표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겸 최고경영자(CEO) 윌리엄 루이스는 이번 대선부터 특정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사설을 싣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신문이 중립을 선언한 것은 36년 만에 처음이다. 워싱턴포스트는 1976년부터 한 차례(1988년)를 제외하고 대선 때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왔으나 이번에는 중립을 택했다.
워싱턴포스트 사주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는 이번 결정이 매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정 신문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은 선거의 향방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며 “지지 선언은 해당 매체가 편향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인상만 줄 뿐”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우세 지역인 캘리포니아 최대 지역 신문 LA 타임스는 지난 9월 지지 후보 명단을 공개했으나, 이 명단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이름이 빠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후 LA 타임스 편집위원회 내부에서 해리스 지지가 명확했지만, 신문이 특정 후보를 편드는 것을 원치 않는 사주의 개입으로 지지 선언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진보 성향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 편집위원은 지난달 19일 쓴 칼럼에서 “해리스가 졌지만 잘 싸웠다는 글을 쓰고 싶진 않다. 그녀가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고 쓰고 싶다”고 해리스 지지 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사주 개입’ 논란이 확산되자, LA타임스 사주 패트릭 순시옹 박사는 자신은 공정 보도 검토를 요청했을 뿐, 지지 선언 포기는 편집위원회 자체 결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지난달 24일 순시옹 박사는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 계정에 “편집 위원회는 이번 선거 기간 양측 후보가 발표한 정책과 계획을 분석해, 향후 4년간 미국에 미칠 영향을 파악해달라고 요청을 받았다”며 이후 신문은 당파성을 배제한 정보만 제공하고 선택은 독자에게 맡기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설명했다.
의료사업으로 큰돈을 번 순시옹 박사는 지난 2018년 LA 타임스를 인수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지난 2016년 대선 당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후원했지만, 올해 대선에는 소유 신문사를 통해 중립을 선택했다.
미국의 3대 전국 신문 중 하나인 US 투데이 역시 중립을 선언했다. 이 신문은 지난 2020년 대선 때, 창간 후 38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조 바이든을 지지했으나 이번에 다시 중립으로 복귀했다.
US 투데이를 발행하는 미디어 그룹 ‘개닛’은 28일 정치 전문 매체 ‘더힐’에 보낸 성명에서 올해 대선에서는 자사 소속 모든 매체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US 투데이를 비롯해 200여 개 지역지를 소유한 미국 최대 신문 체인이다.
성명에서는 “(매체는) 독자들이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사 소속 지역지에서 지역의 주요 문제와 관련해 지방선거에 출마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연방 선거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미국 언론계에서는 정치 환경 양극화에 부담을 느낀 매체들이 특정 후보 지지를 피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발행 부수에서 미국 10위권에 드는 미네소타 스타 트리뷴은 지난 8월 올해 선거에서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며 그 이유가 ‘정치 환경 양극화’라고 밝힌 바 있다.
USA 투데이의 중립 선언으로 미국 3대 전국구 매체 중 올해 대선에서 특정 후보 지지를 선언한 곳은 뉴욕타임스만 남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9월 말 ‘미국의 애국적 선택’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해 해리스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다만 신문은 이민 문제, 공립학교, 주택 가격, 총기 폭력 등 미국의 핵심 이슈에 있어 “(해리스가) 모든 유권자에게 완벽한 후보는 아닐 수 있다”면서도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혹평하며, 결국은 해리스가 대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뉴욕타임스가 2020년 대선 때 ‘미국이여, 조 바이든을 뽑아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트럼프에 대한 비판보다는 바이든의 장점 나열에 집중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의 3대 전국구 신문 중 나머지 한 곳인 월스트리트저널은 보수 성향으로 평가되지만 지난 1928년 허버트 후버(제31대 대통령, 1929~1933년 재임)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이후 지금까지 100년 가까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고 있다.
트럼프는 중립 환영했지만, 해리스 지지 언론 여전히 다수
주요 신문들의 중립 선언에 대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응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대규모 유세에서 “워싱턴포스트와 LA타임스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민주당 당원들은 지금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방금 USA 투데이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는 그들이 그녀(해리스)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언론계 전반을 보면 여전히 민주당 성향이 우세하다. 올해 대선에서 민주당 해리스 후보를 지지한 언론은 뉴욕타임스 외에도 보스턴 글로버, 뉴요커 매거진, 시애틀 타임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덴버 포스트, 샌 안톤니오 익스프레스 뉴스, 오레고니안 등이다.
공화당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 매체는 뉴욕포스트, 워싱턴타임스, 라스베이거스 리뷰저널 등이며 모두 보수 매체다.
뉴욕포스트는 트럼프 지지 사설에서 “트럼프는 자신을 겨냥한 사법 체계의 전례 없고 몰염치한 무기화, 두 차례의 암살 시도, 언론의 히스테리성 공격에도 2016년과 같은 힘과 에너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주요 지역지 가운데 중립은 선택한 신문으로는 미네소타 스타 트리뷴 외에도 탬파베이 트리뷴이 있다. 플로리다 서부 지역 신문인 이 신문은 퓰리처상을 가장 많이 받은 언론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중립을 선언한 신문들이 선택을 독자에게 맡김으로써 공신력을 높이겠다고 설명했다면, 특정 후보 지지를 선언한 신문들은 독자와 사회에 대한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다.
해리스 지지를 선언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편집자 리처드 존스는 매체 ‘포인터’에 보낸 답변서에서 “우리 편집위원회는 (후보) 추천이 신문의 공익성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굳게 믿고 있다”며 “특히 올해 펜실베이니아에서 치러지는 접전의 선거에서 이러한 추천은 유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언론계에서는 워싱턴포스트와 LA 타임스의 중립 선언이 언론인들의 양심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제프 베이조스, 패트릭 순시옹 등 사업가 사주들의 비즈니스적 결정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적 입장 표명, 언론의 독립성 약화” 지적도
이번 대선이 미국 언론계의 정치적 입장 표명과 독립성에 관해 되돌아볼 기회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신문사 편집장과 칼럼니스트를 거쳐 현재 뉴욕 북부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제리 무어는 ‘더힐’ 기고문에서 워싱턴 포스트와 LA 타임스의 중립 선언에 대해 ‘진작 이뤄졌어야 할 일’이라고 환영했다.
무어는 매체의 특정 후보 지지가 어느 시점에서는 필요한 일이었다면서도 이제는 유효 기간이 끝났다며 “정치적 지지는 신문의 독립성을 흐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편집위원들의 특정 후보 지지가 이후 해당 신문사의 보도 공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자신이 편집장으로 일했던 뉴욕 일간지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이에 따르면, 한 지방검사장 선거에서 이 신문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됐는데, 그 이후 4년 동안 검사장의 잘못에 관한 칼럼을 실으려 할 때마다 내부에서 ‘이 사람 우리가 지지하는 인물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는 것이다.
무어는 또한 경선에서 특정 예비후보를 지지하고 다른 예비후보를 반대했다가 반대했던 인물이 최종 후보가 된 사례도 언급했다. 신문사가 해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입장을 바꾸자 독자들의 항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신문은 이러한 (특정 후보 지지) 관행을 폐지하고, 그 대신 유권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그렇게 해야 매체의 신뢰성이 올라가고 독자는 자신이 제공받는 뉴스를 더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