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세상을 구하는 군대 ‘구세군’ 역사 간직한 구세군역사박물관

한기민
2024년 10월 28일 오후 3:00 업데이트: 2024년 10월 28일 오후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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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빨간색 자선냄비가 상징인 구세군이 한국 땅에서 복음을 전한 지는 110년을 넘었다. 서울시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은 1928년 완공된 구(舊) 구세군사관학교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개신교 신학교 건물로 꼽힌다. 1926년 미국 구세군이 한반도에서 구세군 사관(士官·목회자)을 양성하려고 모금한 돈으로 건립됐다. 교사(校舍)로 쓰이던 건물은 1955년부터 1981년까지는 구세군 대한본영으로 함께 사용돼 ‘구세군중앙회관’으로도 불렸다. 2019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돼 ‘정동 1928 아트센터’로 거듭났다.

정동 1928 아트센터 좌측 동(棟)에는 구세군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구세군이 1908년부터 한국에서 펼쳐온 사랑과 봉사, 섬김과 나눔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구세군(救世軍·The 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됐다. 세상의 구세를 위한 군대라는 의미를 지닌 구세군 정신은 ‘3S’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프(Soup)’이다.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가 따뜻한 수프로 배를 채워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프(Soap)’이다. 비누로 가난, 무지를 씻겨 삶을 거듭나게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는 ‘샐베이션(Salvation)’이다. ‘성화(聖化·Sanctification)’라고도 하는데 정신과 육신의 총체적 변화와 구원을 의미한다.

창립자 윌리엄 부스·캐서린 부스 부부는 선교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찾아가는 교회를 지향했다. 성공회가 대영제국 국교회이던 시절엔 각 교구(敎區) 중심으로 종교 사역이 이뤄졌다. 그 중심에는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 있었다. 구세군은 이를 탈피하여 극장, 묘지, 퍼브(Pub·영국 선술집) 등을 찾아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세속적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오늘날 영국 런던 구세군 국제본부도 원래 대형 당구장이었다.

구세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군대식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구세군은 중앙 집권식 조직을 갖추었다. 영국 런던에 국제본부(IHQ)를 두고 전 세계를 5개 부(Zone)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구세군한국군국’은 아시아·태평양부에 속한다. 국제본부에는 수장(首長)인 ‘대장(General)’이 있고, 1인의 ‘참모총장(Chief of the Staff)’이 있다. 각 부(部)엔 국가를 관장하는 ‘부장(Commissioner)’을 두고 있다. 각 지역 교회·성당에 해당하는 것이 ‘영문(營門·Corps)’이고 한국 전체를 관장하는 한국군국(韓國軍國) 산하에 대한본영과 각 지방본영이 있다.

구세군 목회자는 통칭해서 ‘사관(Officer)’이라고 한다.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목회신학과 졸업 후 부위(Lieutenant)로 임관(목사 안수)한다. 이후 만 5년 사역하면 정위(Captain)로 승진한다. 그러다 다시 만 10년이 지나면 참령(Major)으로 진급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구세군 사관의 97% 정도가 참령에서 은퇴하며 정년은 65세이다. 그 외에 특별한 직책을 맡을 경우 부정령(Lieutenant-Colonel), 정령(Colonel)으로 진급하기도 한다. 가톨릭교회에 비유하자면 세계 구세군 대장은 교황, 참모총장은 교황청 국무원장 추기경, 부장은 추기경, 정령은 대주교, 부정령은 주교나 몬시뇰(Monsignor·명예 고위성직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_한기민
글_최창근

서울시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정동1928. 1928년 건물이 건립된 해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날 구세군사관학교, 구세군중앙회관 등으로 사용됐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캐서린 부스 목사 부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됐다. 설립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본래 감리회 목회자였다. 그가 살던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大英帝國) 최전성기였다. 산업혁명 결과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고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그 시절 대도시 노동자, 도시 빈민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윌리엄 부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아내이자 동료 사역자였던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와 더불어 이스트 런던(East London) 빈민촌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구세군 선교 정신은 ‘3S’로 요약 가능하다. 첫 번째는 ‘수프(Soup)’이다.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가 따뜻한 수프로 배를 채워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프(Soap)’이다. 비누로 가난, 무지를 씻겨 삶을 거듭나게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는 ‘샐베이션(Salvation)’이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1908년부터 시작된 구세군한국군국의 사회복지, 긴급구호 활동과 함께 1928년에 시작된 자선냄비의 모금활동은 6.25 동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연말 거리를 지키며 국민들의 애환과 함께 한국 기부문화를 선도하는 모범이 되어왔다. 모금활동은 어떤 장소든, 어떤 사람이든 누구나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의 이웃과 함께하여 사랑과 희망으로 그들의 삶을 복원하겠다는 구세군의 지향점을 더욱 견고히 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초기 구세군 깃발과 계급장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구세군중앙회관 건물 설명 표지. 구세군 설립자 윌리엄 부스의 장남이자 당시 구세군 세계대장이던 브람웰 부스의 칠순 기념으로 건축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1919년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 유관순 열사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거사를 이끌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이후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여성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구세군 부교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주인공은 1886년 출생해 만 33세에 3.1운동에 참여한 임명애 부교로, 경기도 파주시 3.1운동을 이끌었던 염규호 구세군 정교의 부인이다. 구세군역사박물관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독립운동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 작업을 현재 진행 중이다. 정교와 부교는 상징적 군대조직을 채택하고 있는 구세군의 부사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다른 교단에서는 장로와 집사에 해당한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중 하나인 ‘실베스터 태극기’. 1910년 찰스 실베스터(Charles E. Sylvester), 한국식 이름 ‘설보덕(薛寶德)’ 사관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새문안(신문로) 근처에서 태극기를 구해 선교 기간 내내 품고 살았다. 실베스터 사관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민족과 동고동락하다 조선총독부의 추방령으로 1939년 한국 땅을 떠나게 됐다. 늘 한국을 그리워한 그는 1953년 소천(召天)하기 전 딸 조앤 실베스터(Joan Sylvester)에게 유품으로 태극기를 남겼다. 이후 아들 브람웰 실베스터(Bramwell Sylvester)가 선교사관이 돼 1954년 한국으로 파송됐다. 이어 제프리 페리와 결혼한 딸 조앤도 남편과 함께 1956년 선교사관이 돼 한국을 찾았다. 페리-조앤 사관 부부는 1960년 사역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이후 가보(家寶)로 태극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자녀 중에 구세군 사관이 배출되지 않아 한국을 찾을 일이 없어졌고 이후 한국에 기증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지난날 구세군 제복. 영국 빅토리아시대 군복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구 대한제국 군대 제복을 참조했다. 현지화하여 한복 제복도 착용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