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글씨로 사람들 행복하게 하고 싶어” 서예가 타타오 한치선

최창근
2024년 10월 23일 오후 5:05 업데이트: 2024년 10월 23일 오후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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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악필(惡筆)이다’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 중에는 악필도 적지 않아서 생겨난 말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을 남긴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는 명문장가였으나 글씨체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의 원고를 교정·교열한 사람은 아내 소피아 톨스토이였다. 톨스토이의 원고를 판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어서이다. 악성(樂聖)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피아노 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원래 ‘테레제를 위하여(Fur Therese)’였다. 출판사에서 ‘테레제’를 ‘엘리제’로 잘못 해독했다 전해진다. 베토벤의 곡들은 출판을 위한 교열 과정에서 악상 기호 해석에 논란이 일거나 의도치 않은 오류가 생기기도 했다. 이 밖에 국내외 이름난 작가 중에도 있는데, 악필로 인하여 출판사 관계자가 늘 애를 먹곤 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천재는 악필일까? 두뇌 전문가들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필체와 지능은 상관관계가 적다는 것이 공통 의견이다. “천재가 악필이 될 개연성은 있다.”고는 한다. 우뇌가 더 발달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창의력이 높은 반면 산만하고 규칙이나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이들은 맞춤법이나 기호를 제대로 쓰지 않거나 글씨를 가지런히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은 영감을 잊기 전에 빨리 기록하는 것이 습관화돼 글쓰기에 소홀해진 것일 뿐이라고도 한다.

악성 베토벤의 자필 악보. 악필로 인하여 곡 해석 왜곡을 낳기도 했다. | 페이스북 페이지 ‘클래식에 미치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용모, 언변, 글씨, 판단력을 의미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전통적인 인재 판별법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그중 글씨는 한 사람의 성품, 인격, 습관을 드러내는 집합체로서 중시했다. 이는 동서양 문화 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양에서는 기록이나 표현을 강조한 반면 한국에서는 ‘글씨 잘 쓰기’를 강조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글씨를 교양과 덕목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필요불가결한 용품으로 자리매김한 오늘날 사람들의 글씨는 점점 나빠지는 추세이다. 일상생활에서 손글씨를 쓸 일이 절대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평균 필적(筆跡)은 악화일로이다.

사람들은 ‘예쁜 글씨체’를 갖기를 원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속에서 강의, 도서 출간,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바른 글씨’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가 있다. 타타오 한치선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인문학자이자 서예가로 ‘문자 인문학’에 천착하고 있다.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후 30여 년간 붓과 펜을 벗 삼아 문자와 더불어 살아오고 있다. 유튜브 서예 채널 ‘타타오 캘리아트’와 ‘타타오 서재’ 동영상 공유 플랫폼 깐징월드 인문학 채널 ‘타타오 뜨락’ 등을 운영하고 있다. EBS 평생학교 ‘한치선의 난생처음 붓글씨 쓰기’, 클래스101 ‘오늘부터 예쁘고 품격 있는 손글씨’ 등을 통해 온라인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신의 품격을 올려주는 손글씨’ ‘가장 쉬운 독학 타타오의 서예 첫걸음’ 등이 있으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동양 고전을 주제로 한 필사(筆寫) 책도 펴내고 있다.

한치선 씨는 글씨는 한 사람의 인격과 품격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지난날 악필이었던 그는 부단한 연습, 수행을 통해서 오늘날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한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스마트폰, PC가 대중화된 오늘날 현대인의 글씨체는 점점 나빠지는 추세입니다.

한치선 씨는 “지난날 자신도 악필이었다.”고 고백했다. “저는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글 쓰는 것은 좋아했지만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악필이었으니까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서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만 했습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죠. 요즈음엔 컴퓨터로 작성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용지에 자필로 작성해야 했어요.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오늘날 제 아내가 대신 써 주기도 하고 그랬죠.”

대학 졸업 후 모 화장품 제조기업에 입사하여 디자인 업무를 맡았다. 해당 분야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입사 후 업무일지를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악필이던 제게는 역시 곤욕스러운 일이었죠. 필적 때문에 퇴짜를 맞은 적은 없지만 상사나 동료의 표정을 보고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자격지심도 느끼고요.”

미술 하는 분들은 뇌가 발달해서 보통 솜씨도 섬세하던데요

“저도 예술 쪽 두뇌가 발달하긴 했겠죠. 너무 자유롭게 발달해서 그런 듯하고요.”라며 웃음 지은 한치선 씨는 지난날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 아내가 ‘서예학원을 다녀 보는 게 어떠냐?’고 했었습니다. 아내는 글씨체가 좋았는데 어린 시절 서예학원을 다녀서가 아닐까도 싶었죠. 마침 그날이 광복절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서 서예학원을 찾았습니다. 1988년 8월 15일, 그날 저의 손글씨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삶의 중요한 변곡점인 날이죠.”

서예학원 등록이 삶을 바꾼 셈이군요.

“그 시절 펜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붓글씨부터 시작했고요. 돌이켜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펜글씨의 원류가 붓글씨니까요. 당시 저는 3년쯤 열심히 해 보고 그래도 재미있으면 계속하고 아니면 그만두자는 생각이었어요. 3년이 되기 전에도 ‘너무 재미있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10년쯤 심취해 보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0년이 흐르기 전에는 제대로 익히지 못할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무렵 직장 생활도 회의가 들었습니다. 30년 이상 경력 임원이 비슷한 연차의 사장에게 사정없이 질책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미래의 내 모습도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무렵 서예와 펜글씨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는데 본격적으로 하려니 직장 생활과 병행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고요. 결국 아내에게 ‘나 직장 그만둘래.’라고 말했죠. 직장을 그만두고선 ‘이번 생에는 평생 이 길로 간다.’는 각오로 현재까지 붓글씨, 펜글씨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글씨는 인격의 도야(陶冶)라고 믿고 실천하는 한치선 씨는 종교, 명상, 수련에도 관심이 많았다. “일곱 살 때 처음 기독교를 접했습니다. 개신교의 한 종파였죠. ‘성경’을 비롯해서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었고요. 나름 깊이 읽다 보니 의문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의문을 해소하려다 보니 혼자 사유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갖게 되고요. 대학 시절에는 선(禪) 불교 한 종파를 만났습니다. 참선과 명상이 매력 있었죠,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하잖아요. 겉보기엔 별것 아니고 단순한 물음과 답변 속에 깨우침이 있었죠. 선문답을 접하면서 속이 트이는 쾌감도 맛보고요. 그 무렵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불가(佛家) 대법 수련을 하는 분이었죠. 스님을 따라 다니면서 본격적인 불가 수련에 입문했습니다. 불교 관련 지식도 깊어졌고요. 다만 그분도 명성을 얻고 추종하는 이가 늘어나다 보니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도 멀어지게 되고요.”

3년 전부터 한치선 씨는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멀고 긴 길을 돌아온 그는 수련과 파룬궁 진상 알리기에 열심이다. “선불교를 접하고 명상법, 수련법을 익히면서 파룬궁의 ‘전법륜’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를 선행학습한 셈이죠.”

같은 붓글씨를 두고서도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각각 칭하는 말이 다릅니다. 각국의 사유와 철학이 반영된 듯하고요.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고 하고요.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죠. 차(茶)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에서는 ‘다법(茶法)’, 한국에서는 ‘다례(茶禮·차례)’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다도(茶道)’라고 불립니다. 용어만 보았을 때는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이라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중국은 글씨 쓰는 법, 즉 필법(筆法)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일본은 서(書)를 통해 도(道)를 닦는다는 의미를 부각하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서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중국이 가장 먼저 용어를 고정하였습니다. 위진(魏晉)·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에서 모든 문예활동을 ‘법(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이 불었죠.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다양한 문예행위를 하나의 공통률인 법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書)에서는 ‘영자팔법(永字八法: ‘永’ 字 한 글자를 쓰는 과정을 통해 8가지 필법을 가르침)’과 같은 법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문예활동이나 스포츠를 도(道)로 이해하려는 생각이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유도(柔道), 검도(劍道), 다도(茶道), 화도(花道) 등입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냥 ‘서(書)’라고만 했다가 이후 ‘서예’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예, 서법, 서도는 용어는 달라도 사실상 추구하는 예술성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서체(書體) 중 가장 선호하는 서체는 무엇인가요?

“가장 친근한 서체는 예서(隷書)입니다. 지난해 11월, 에포크미디어코리아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선물한 붓글씨도 예서체에 기반한 것이에요. 예서체가 가장 익숙하지만 편식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전서(篆書)도 흥미롭고요. 한자(漢字)의 원형인 고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전서가 유래했죠. 신전문화(神傳文化) 전통이 살아있는 글씨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신탁(神託) 의식을 할 때 신으로부터 받은 점괘를 보여주는 글씨체이고요. 아쉽게도 현대인에게서 가장 멀어져 있는 서체입니다. 인장(印章)용 글씨체로 간간히 사용되기는 합니다.”

존경하는 서예가는 누구인가요?

“중국 동진(東晉)시대 문필가이자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를 좋아합니다. 서체도 훌륭하지만 인품도 훌륭하죠. 현대 작가 중에서는 제 스승의 스승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님을 존경하고요.” 그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같은 분열기·혼란기에 서예도 꽃피었다고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도 혼란기였습니다. 각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경쟁했죠.

“중세 봉건시대 유럽처럼 사회 질서가 확립되어 있을 때는 문화나 예술 발전이 더딘 경향이 있어요. 중국에 초점을 맞추자면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각종 사상이 백화제방(百花齊放)했습니다. 남북조시대도 마찬가지고요.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예술이 꽃핀 것입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삼국시대도 그러합니다. 위(魏) 조조(曹操)는 문인·예술가를 우대했죠. 조조 자신도 시인이기도 했고요. 삼국시대 글씨들도 훌륭합니다. 그 후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글씨도 기백이 넘치죠. 용맹스러운 기상이 글씨에 담겨 있습니다.”

한치선 씨의 예명 ‘타타오’ 낙관. 산스크리스터어에서 유래했으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걸림 없이 오고 가는 남자’라는 뜻을 담았다. | 한치선.

타타오라는 예명을 쓰는데 어떤 뜻이 담겼나요?

“한 4년여 전에 지은 예명입니다. 원래는 ‘타타’였는데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의 것’ ‘꼭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로는 ‘진여(眞如)’로 번역되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람처럼 걸림 없이 오고 가는 존재’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여기에 ‘오’를 붙인 것이죠.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Esperanto)에서도 ‘오(o)’는 남성형 어미입니다. 타타의 남성형이 타타오인 셈이죠. ‘바람처럼 자유롭게 걸림 없이 오고 가는 남자’라 할 수 있죠.” 한자 서예, 한글 서예에 천착하면서 고대 인도어이자 초기 ‘불경(佛經)’을 기록한 산스크리트어까지 기원을 찾아가게 됐다는 설명이다. “한국어의 어원을 따라가다 보니 고대 인도까지 가게 되더군요.”

한치선 씨는 ‘논어’ ‘맹자’ 등 동양 고전 필사책을 연이어 출간하고 있다. “책 출간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국 경서 이후에는 한국 민족 경전도 출간할까 싶어요. 주변에서는 ‘성경’ 필사책도 내달라고 하는데 내용이 방대하니 ‘신약 성경’ 일부 구절을 발췌해야겠죠. ‘사랑’을 주제로 다룬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고린도서)’도 좋다고 생각하고요.”

유튜브, 깐징월드 채널도 인기더군요. 한국교육방송공사(EBS) 방송에도 출연하고요.

“제가 주력하는 분야는 ‘문자 인문학’입니다. 유튜브, 깐징월드 채널 콘텐츠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요. 신전문화를 탐구하고 대중에게 소개하는 좋은 채널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룬궁 수련생으로서 홍보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저는 유튜브 방송 등에서 ‘대법(大法)’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는 편이에요. 간접적으로 드러내는데 눈이 밝은 분 중에는 용케 알고서 연락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정성이 있는 분은 저를 직접 만나러 오기도 하고요. 그러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하다 보면 수련생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글씨는 못 쓰는 편인데, 악필도 교정이 되나요?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글씨를 쓴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바른 글씨가 나올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글씨 쓰는 것을 남발하다시피 했는데 요즈음에는 쓰는 양 자체를 줄이고 있습니다. 엄숙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내용을 숙지하고 글씨를 써야 합니다. 저도 지난날 악필이었는데 노력과 수행을 통해서 교정했잖아요. 이제는 남도 가르치고요. 천천히 정성을 들이면 악필 교정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손글씨 쓰기의 효과는 무엇인가요?

“뇌 되새김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면서 그 소리를 듣게 되죠. 연필이나 만년필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붓은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죠. 그 모든 것이 뇌에서 조합이 되어 자극이 됩니다. 학습법 중에서 권장하는 것이 따라 쓰면서 암기하는 것이잖아요. 과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필사(筆寫)의 매력도 있습니다. 하루 중 특정 시간을 비워서 일정하게 정해진 분량을 손으로 베껴 적으면서 되새기는 것이잖아요. 정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죠.”

앞으로 꿈은 무엇인가요?

“제가 손글씨 세계에 발을 디딘 지 35년 정도 됐습니다. 서예를 하면서 다짐한 것은 ‘활인신필(活人神筆)’을 이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글씨가 걸린 곳은 화목하게 되고 풍요로워지며 우울했던 사람은 밝은 심성을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혼을 담아 글씨를 쓰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