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연말 2020년 연초를 떠들썩하게 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남한 출신 재벌 2세 여성과 북한 조선인민군 장성을 아버지로 둔 북한군 장교와의 ‘국경’을 넘은 사랑을 다뤘다.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극중 불의의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하게 된 윤세리(손예진 분)와 뜻하지 않게 그를 돕게 된 리정혁(현빈 분) 사이에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은 커피이다. 리정혁은 ‘원두 커피만을 마신다.’는 고고한 재벌 2세 윤세리를 위해 북한에서 흔치 않은 원두커피를 구해 몸소 원두를 볶고 핸드드립 커피를 만들어 준다. 이후 윤세리는 리정혁을 향해 본격적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에서 ‘커피’를 매개로 인연도 맺고 사업을 하는 부부가 있다. 국내 콜드브루 커피 대표 제조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진솔을 경영하는 박혜성·진규배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진솔은 사회적 기업이다. 전체 고용인의 50% 이상이 사회적 배려 대상자이다.
박혜성 대표의 고향은 북한이다. 2010년 탈북하여 2011년 한국에 왔고 광주광역시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인에 민감하고 원두 커피는 써서 즐기지 않았다.’던 그는 커피사업을 하던 남편 진규배 씨를 만나 콜드브루 커피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남남(南男)과 북녀(北女)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커피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처음 광주광역시의 작은 커피숍으로 시작한 사업은 날로 성장해 콜드브루 커피 1일 생산량 국내 최대 기업으로 거듭났다. 동남아시아 진출도 앞두고 있다.
‘진솔(眞率)’이라는 사명에 걸맞게 진실하고 솔직하게 커피를 만든다는 박혜성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 오기까지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혜성 대표의 초등학교 시절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대기근의 한복판이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1985년생인 제 또래들은 불행한 세대라고 할 수 있죠. 굉장히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한 학급에 45명 전후였는데, 6년이 지나니 학생 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굶주려서 학교에 제대로 나오지 못했죠. 학교 수업 마치면 책 대신 호미 들고 농사 지원도 나가고요. 실제 친구가 아사(餓死)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선생님 중에는 풀만 먹다 풀독이 올라 몸이 퉁퉁 붓는 분도 있었어요. 제가 살던 곳은 농촌 시골 지역이라 그나마 형편이 나았죠.”
탈북 전에는 전화국에서 일한 것으로 압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전화국에서 일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생전 어머니는 ‘혜성이 네가 북한이 아닌 좀 더 자유스런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말씀 하셨죠. 어머니를 잃고 나서 소원을 이뤄 드리기로 했습니다. 2010년 탈북하여 중국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 부부의 도움을 받아 제3국을 거쳐 2011년 한국에 왔습니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극중 리정혁(현빈 분)이 윤세리(손예진 분)를 위해 커피 원두를 가마솥에 볶아서 핸드 드립 커피를 만들어 주잖아요. 드라마 보셨나요?
“탈북민 중에서 그 드라마 안 본 사람이 있을까 싶네요.”라며 웃음 지은 박혜성 대표는 드라마는 허구를 다루지만 작중 설정은 개연성이 있다며 이야기했다. “드라마 속 인물 설정을 봐야 하는데 리정혁(현빈 분)은 아버지가 군부 실세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차수(次帥) 계급]이잖아요. 자신도 스위스에서 유학한 경험도 있고요. 자본주의 문화에 친숙하고 원두 커피를 접한 개연성이 충분한 설정입니다. 북한에서 커피 원두를 수입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요. 실제 북한 당정군 고위 간부나 그 자제들은 충분히 누리고 살고 있어요. 평양 등 대도시에는 커피숍도 존재하고요. 가격이 워낙 비싸 일반인은 가기 힘든 곳이지만요.”
북한에서도 커피를 처음 접했나요?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은 2010년 탈북한 후 중국에서였습니다. 인스턴트 믹스 커피를 마셨죠. 제가 사실 카페인에 취약해요. 커피 한잔 마시면 밤에 잠을 설치고 하거든요. 한국에 와서 대학 다닐 때도 커피는 즐겨 마시지 않았습니다. 원두 커피는 물론이고요. 가끔 인스턴트 믹스 커피를 타서 차게 식혀 마시곤 했죠.”
처음 마신 원두 커피는 어땠나요?
박혜성 대표는 원두 커피 첫맛은 씁쓸했다며 이야기했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등 원두 커피를 마셨는데 굉장히 쓰고 텁텁했습니다. 에스프레소는 원액에 가까우니 더했고요. 목넘김도 나빴고요. 제가 원래 카페인 때문에 커피를 즐기지 않잖아요.” 그러다 접한 콜드 브루 커피는 신세계였다고 했다. “처음 콜드 브루 커피를 마셨을 때 ‘아! 커피 맛이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커피 맛도 이렇게 다양하구나도 싶었고요. 점점 커피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사업도 하게 됐습니다.”
2011년 입국하여 하나원 교육 과정을 이수한 북녀(北女) 박혜성 대표가 처음 터 잡은 곳은 광주광역시이다. 수도권이 아닌 남도(南道)의 빛고을(光州)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광역시에 정착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탈북민이 대량 발생했어요.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한 기수가 250명 전후였죠. 하나원 교육 과정 이수 후 정착지를 찾아야 했는데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지역은 주택 배정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영구임대 아파트 17채밖에 배정이 안 됐죠. 다들 수도권을 선호했기에 추첨을 통해서 결정해야 했습니다. 평소 저는 ‘공짜 운이 없는 편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추첨을 하면 수도권에 배정받을 자신이 없었죠. 배정받지 못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첫 생활을 우울하게 시작하게 될 것이었고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기에 수도권 주택 배정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광역시에서는 살자.’는 생각은 했기에 고민 끝에 광주광역시를 택했습니다. 남도 지역은 음식이 훌륭하잖아요. 음식 고생은 안 하겠다 싶었죠.(웃음)”
광주광역시에서 터 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박혜성 대표는 “처음에는 막막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나원에서 200명도 넘는 동기생과 어울려서 생활하다 광주에 오니 이방이도(異邦異都)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어요. 적막감, 고독감이 몸을 감쌌고요. 한 달여 살다 보니 아사(餓死)가 아닌 고독사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쁜 길로 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엄습했습니다. 광주하나센터 1주일 교육 과정이 끝난 후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4개씩 했죠. 하루 24시간 중에서 잠자는 시간만 빼고 공부하고 일하는 일정으로 채웠습니다. 스스로 바쁘고 몸은 피곤하게 만들었죠.”
어떤 일을 주로 했나요?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한 곳에서 장시간 일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일했죠. 그중 한 식당 사장님이 ‘일하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든다. 시급 올려 줄 테니 좀 더 일하라.’고 제안하기도 했고요.”
대학에서 경영학,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셨더군요.
“모 전문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됐고요.” 박혜성 대표는 그 시절 경험이 현재 사업을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송광종합사회복지관이 있습니다. 조계종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죠. 관장도 스님이고요. 취약 계층 밀집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관장 스님 말씀이 울림이 있었어요. ‘내가 탈북민을 많이 만났는데 당신 마인드가 정말 좋다. 이런 마인드로 살아가면 대한민국에서 정착 못 하는 탈북민이 없을 거다. 그런 마인드를 본인만 가지고 있지 말고 나와 같이 일하면서 지역 사회 탈북민에게 전파하자.’고 하셨죠. 관장 스님의 마지막 한 마디가 저를 움직였습니다. ‘혼자 정착 잘 해서 잘살면 뭐하나? 다른 탈북민은 고생하고 있는데….’ 처음 본인이 전공하던 경영학과 사회복지사 일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던 박혜성 대표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탈북민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그 무렵 광주광역시에만 탈북민이 650명 정도 정착해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에만 200명 정도 살았고요.” 사회복지사로 일한 경험은 전공도 바꾸게 했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니 좀 더 이론적으로 공부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원래 4년제 대학 경영학과에 편입하려다 사회복지학과로 바꾸었죠. 일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막상 공부하니 현장과 이론이 접목되어 재밌었고요.”
탈북민 사회복지사로서 접한 탈북민의 현실은 어떠했나요?
“탈북민의 지역사회 정착 담당 업무를 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그러하지만 탈북민이 한국 정착 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취업입니다. ‘북한 출신’ 꼬리표가 붙어 다니니 한국인 고용주들이 고용을 꺼리는 면이 있죠. 정부 정책도 현실과 괴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탈북민을 고용하는 사업자에게 매월 50만 원의 인건비를 보조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고용주가 ‘탈북민=지원금’으로만 본다는 것이죠. 정부는 최장 2년간 보조금을 지원하는데 그 기간이 지나면 해고해 버리는 것이죠. 2년 주기로 탈북민 고용과 해고가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탈북민 입장에서는 2년간 열심히 일하며 나름 전문성도 키웠는데 해고되면 허탈하고요.”
창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회복지사로 일하기 전 저는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하다고 자부했습니다. 3년여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사회복지사의 정신이 건강해야 복지 수혜자에게 제대로 서비스할 수 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죠. 제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정적 영향은 그대로 복지 수혜자에게 전달되는 위험성도 있고요. 그래서 이젠 좀 쉬어야겠다 생각했죠. 공부도 더 하려 했고요.” 박혜성 대표는 그 무렵 한국 사회 분위기도 창업에 한몫했다고 했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2016~2017년 무렵 한국에서 ‘커피 열풍’이 불었습니다. ‘전국에 치킨집보다 커피숍이 더 많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 정도였죠.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 붐도 일어나고요. 정부도 ‘교육 바우처’ 사업의 일환으로 탈북민을 포함한 사회 취약계층에게 국가 자격증 취득 과정으로 바리스타 자격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제 주변 탈북민들도 바리스타 자격을 취득했는데 문제는 취업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용주들이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고용을 꺼려서였죠.” 박혜성 대표는 사회적 기업 지원 제도도 변수였다고 했다.
좀 더 설명해 준다면요.
“남한 정착 후 정부의 사회적 기업 지원제도를 인지하게 됐습니다. 창업할 무렵에는 제도 자체가 활성화됐고요. 사회적 기업 창업 붐이 일었습니다. 탈북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들과 같이 창업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 사업을 하던 남편도 있었고요. ‘일단 작은 커피숍부터 열어보자.’고 결심했죠. 창업 준비를 하면서 일도 익힐 겸 광주 시내 모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사장께서도 힘이 되어 주셨죠. ‘제가 탈북민인데 창업을 준비 중이다.’라고 하자 ‘당신 일하는 것 쭉 지켜봤는데 마인드가 좋다. 반드시 성공할 거다.’고 격려하시며 초보자인 저에게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가게 자리 잡는 법, 단골 손님 만드는 노하우 등등 해서요. 제가 가진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셨죠. ‘성공하면 원금만 갚으라.’며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 주시고요.”
결심과 준비 과정, 주변의 격려 끝에 2018년 4월, 박혜성 대표는 ‘더치스토리 카페’ 상호로 광주광역시에 첫 매장을 열었다.
첫 매장을 열었을 때는 어떠했나요? 기성 상권의 이른바 ‘텃세’도 있었을 듯 합니다.
“오늘날도 함께 일하고 있는 남성 탈북민 한 명, 여성 탈북민 한 명 그리고 저, 셋이서 첫 매장을 열었습니다. 제가 제빵사 자격도 추가로 취득해서 빵을 만들기로 하고요. 예산 제약 때문에 1급지 상권에는 못 들어가고 2급지 상권에서 시작했죠. 영업 시작 전 주변 상인들게 일일이 인사드리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저희 커피, 빵 좀 드셔 보세요.’라며 문을 두드렸죠. 그분들도 ‘젊은 탈북민 여성이 아기까지 키우며 열심히 일한다.’며 격려해 주셨고요. 식당 하시는 분들은 손님들에게 ‘커피 마실 거면 저 곳에 가라.’며 저희 가게를 소개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단골손님들도 많이 이어 주시고요. 참 고마운 일이죠.”
단출하게 시작한 커피 매장은 번창했다. 커피를 사면 수제 도넛을 끼워 주는 1+1 전략도 주효했다. “당시 커피 한 잔을 3200원에 팔았는데 제가 만든 도넛을 번들로 줬어요. 손님들 반응이 좋았고요. 씁쓸한 커피를 마시다 보면 자연 달달한 도넛이 당기잖아요.” 이 대목에서 박혜성 대표의 남편인 회사 공동대표 진규배 씨가 말했다. “한국에서 도넛은 프랜차이즈 C사, 또 다른 프랜차이즈 D사가 대표적이잖아요. 각기 식감은 다르고요. 제 아내가 만든 도넛은 C사 스타일이었는데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C사것 보다 맛있다.’고들 했죠. 저희 가게 맞은편에 D사 매장도 있었는데 거기 직원도 저희 것을 맛보고는 맛있다고 했고요. 저희 가게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결국 D사 매장은 문을 닫았어요. (웃음)”
커피와 도넛이 ‘환상의 커플’이 된 커피숍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번창했다. “커피숍을 시작한 자리가 원래 일평균 매출 13만 원 정도였던 곳이에요. 6개월여 만에 일평균 매출 85만 원 정도까지 올라갔죠. 아르바이트했던 커피숍 사장님의 투자금도 6개월 만에 전액 상환하고요.” 더치스토리 카페의 성가(聲價)도 상한가를 쳤다. 2호점, 3호점. 4호점 개점으로 이어졌다.
단기간에 사업에 성공한 편이네요.
“말 그대로 ‘바이럴 마케팅’으로 성공한 편이에요. 입소문, 입소문을 타고 성장한 것이죠. 투자 제안도 줄 잇고 저도 조금 욕심도 나고 해서 매장 수를 늘려 나갔습니다. 전성기 때는 하루에 도넛 2000개를 팔기도 했습니다. 하루 평균 10kg 넘게 도넛 반죽을 해야만 했죠.저 혼자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제빵사를 고용하고요. 사업 규모가 커지다 보니 고용인 수도 늘어나고 인건비 부담도 커져 갔습니다. 콜드 브루 커피 공장도 운영하기 시작하고요. 그중 인건비가 특히 부담이었어요. 그 무렵 최저임금이 급격히 상승했잖아요.”
번창하던 사업은 결정적인 걸림돌을 맞았다. 2019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이다. 피해는 자영업자에게 집중됐고 박혜성 대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로나19 사태 때 어려움이 컸을 듯 합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정말 혼났었죠. 당시 광주 시내에 4개 매장을 전부 직영점으로 운영했었습니다. 매장 하나 당 70~80평 규모로 작지 않은 수준이었고요. 1호점은 하루 평균 매출이 160만 원도 되고 했는데 3만 2000원까지 떨어지기도 했었죠. 시쳇말로 숨만 쉬어도 매월 고정 비용이 7000만 원 정도 나갔습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직원 월급 주며 한 달 한 달 버텨냈습니다. 받을 수 있는 대출은 다 받은 듯해요. 견디다 못해 매출이 가장 좋은 1호점을 매각하고요.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코로나19 펜더믹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박혜성 대표의 사업은 다시금 정상 궤도에 올랐다. 그는 그 공을 어려운 시절을 같이 버텨 준 남편, 직원들 몫으로 돌렸다. 박혜성 대표는 사업 시작 시부터 현재까지 정규직 고용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정규직 고용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하게 되면 인력 관리가 상대적으로 힘든 면이 있어요. 무엇보다 저희 회사는 사회적 기업 인준까지 받고 일자리 지원 사업도 진행하고 있으니 더더욱 정규직 고용을 해야죠.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운 시절에도 인건비 보조를 받아서 버텨낸 점도 있고요. 사업을 시작할 때 최단 3년, 최장 5년 내에 기업을 성장시켜 정부 보조금 지원 사업체에서 탈피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돌발 변수를 만나서 지연된 측면은 있긴 하지만 기업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직원 월급 날 다가올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하던데 어떤가요? 한 인터뷰에서는 ‘직원 월급 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셨더군요.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손님처럼 매월 다가오는 직원 월급 날되면 힘든 게 사실이죠. 매월 임금으로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에요. 막상 월급을 직원들 임금 계좌로 이체하고 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요. 고용주로서 직원을 고용할 때는 ‘일을 해 주는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이잖아요. 매월 그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이 뿌듯한 거죠.”
사업을 하다 보면 곤란도 겪고 코로나19와 같은 돌발 변수를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를 이겨낸 특별한 마인드가 있나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생각하는 마인드는 현실에 충실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쭉 지녀온 마인드입니다. 일을 할 때는 ‘무조건 내일처럼 하자.’입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건 제 사업을 하건 이 마인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주인보다 더 주인같이 일하기도 했다고 자부하고요.”
박혜성 대표의 이야기를 듣다 북한 인권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탈북민 출신 변호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성경의 모세에게 유대인 구출의 사명을 부여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북한인 구출의 사명을 부여했다고 믿는다.’고 말했었다.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박혜성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탈북 과정에서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광주 정착 과정에서는 사회복지관 관장 스님과 인연을 맺었고요. 저는 신(神)의 존재는 믿습니다. 특정 신만을 믿지는 않고요.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 불제자에게는 부처님이겠죠.”
탈북민 출신으로 한국에 정착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업까지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나 마음가짐이 있다면요.
박혜성 대표는 ‘제로 베이스 마인드(zero base mind)’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탈북민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인데 북한에서 삶은 잊어버렸으면 합니다. ‘북한에서 내 출신 성분은 어떻고 삶은 어떠했다.’고들 이야기하고는 하는데 잊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간부였든 군 장교였든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온 후로는 다 같은 탈북민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것이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에요.”
북한에서 지난 삶이 현실에 영향을 주지는 않나요?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해를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스물다섯 살에 탈북하여 한 해 후 한국에 와서 여지껏 살고 있죠. 삶의 절반 가까운 세월을, 요즘 평균 수명 감안해도 1/3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온 셈이죠. 북한에서 25년, 탈북 과정에서 1년은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죠. 다만 그 어려운 시간들이 오늘날 저를 만든 기초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내공을 탄탄하게 쌓은 셈이죠. 국경을 넘어 탈북하고, 중국에서 머나먼 제3국을 경유하여 한국 땅을 밟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었어요. 누구든 쉽게 경험하지 못할 고난을 겪은 것이고요. 돌이켜 보면 그 과정, 경험이 현재를 살아가면서 겪는 난관, 앞으로 마주해야 할 시련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한국 생활도 만만치 않습니다.”
앞으로 꿈은 무엇인가요?
“우연찮게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단 시작한 일이니 좀 더 키워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현재 저와 일하는 직원이 11명인데 사업이 커지면 고용도 더 늘릴 수 있고 직원 임금이나 복지 수준도 올릴 수 있겠죠. 제가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저를 믿고 따르는 직원들만큼은 책임져야 한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탈북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이 따뜻하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저는 한국에 온 후로 14년간 제 출신 배경을 단 한 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당당히 말하죠. 오히려 탈북민이라 하여 더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관심과 배려를 베풀어 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사업 성장에도 도움이 됐고요. 참 감사한 일이죠. 저는 한국 사회 구성원의 탈북민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생각합니다. 탈북민을 좀 더 이해하고 기회를 준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몫을 넘어 서너 사람 몫을 해낼 역량과 의지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경험한 탈북민은 하나같이 성실하고 일도 똑 부러지게 잘 하거든요. 탈북민의 특성을 이해하고, 먼저 다가가고 손길을 내밀어 준다면 한국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될뿐더러 사업주에게도 매력적인 인재가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