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 둔화에도 성장률 목표달성을 자신하던 중국 공산당이 최근 미묘한 입장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국이 경기 부양책을 내놨지만, 시장의 부정적 전망이 이어지고 경제성장률 달성을 실제로 실행해야 하는 지방정부들이 난처함을 표하면서 중앙 지도부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당 중앙)은 회의를 열고 경제 현안을 논의했다. 이를 두고 중화권 매체들과 경제 전문 블로거들은 일제히 ‘이례적(不寻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통상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경제 현안을 다루는 이른바 ‘경제회의’는 매년 4월, 7월, 12월(간혹 11월)에 개최된다. 따라서 예정에 없던 ‘9월 경제회의’를 열었다는 것은 경제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중국 공산당의 양대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과 공산당 정권수립 기념일(10월 1일)을 맞이해, 침체된 내수 시장을 달랠 ‘사탕’을 내놓기 위한 자리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공산당 중앙정치국, 9월 경제회의…관측통 일제히 “이례적 신호”
실제로 이날 회의를 주최한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중국 경제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음을 시인했다.
시진핑은 “우리나라(중국) 경제의 펀더멘털에는 결코 변화가 없지만”이라고 전제한 후 “현재 경제 운영에는 일부 새로운 상황과 문제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움을 직시”하고 “책임감과 긴박감을 높여야 한다”면서 “중앙정치국은 특히 5% 안팎이라는 올해 경제 성장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 지출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회의에서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경기대응적 조정을 강화하고, 기층 차원의 ‘3보장’, 즉 ‘기본민생 보장, 임금 보장, 경영 보장’을 잘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공산당은 크게 중앙-지방-기층의 3개층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기층은 가장 하위 조직이다. 시진핑의 지시는 연휴를 앞두고 밑바닥 민심을 다지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연휴 앞두고 또 돈 풀지만 물가 안 올라…짙어진 디플레 분위기
회의 이틀 전인 24일 중국 인민은행은 190조원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발표했다. 지급준비율을 0.5%포인트 낮춰 금융시장에 1조 위안(약 189조원)을 풀겠다는 게 정책의 골자였다.
단기 금리와 기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낮추고, 주택 구매를 위한 최고 계약금 비율을 낮춰 더 적은 돈으로 구매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다.
190조를 풀겠다고 발표하고 하루 만인 25일에도 연거푸 돈 풀기 정책을 내놨다. 인민은행은 1년 만기 중기유동성지원창구(MLF) 금리를 현행 2.3%에서 2.0%로 낮췄다. 역대 최저 수치다.
MLF 대출은 시중 금융기관에 자금을 공급하는 유동성 조절 도구다. 인민은행은 이번 조치로 3천억 위안(약 56조 8천억원)의 유동성이 공급된다고 밝혔다. 전날 지준율 인하 조치와 합치면 모두 260조 원 규모다.
인민은행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이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지준율 인하로 돈 풀기를 거듭해 왔다. 지난 2022년 4월과 12월, 작년 3월과 9월 총 네 차례에 걸쳐 0.25%포인트씩 총 1%포인트를 내렸다.
올해 2월에도 설 연휴 직전 지준율을 0.5%포인트 낮추며 돈을 풀었다. 이번 정권 수립기념일 연휴를 앞두고 또 한 번 0.5%포인트 ‘빅컷’을 단행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풀어도 중국의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중국의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6% 상승으로 지난 2월 이후 7개월 연속 0%대 상승을 기록했다. 디플레이션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전날(25일) 고용 촉진을 위한 24개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취업 우선 전략 시행을 통한 고품질 완전 고용 촉진에 관한 의견’으로 이름 붙여졌다.
고용(취업)을 최우선으로 삼고, 질 높은(고품질) 일자리 창출을 통해 완전 고용을 이루겠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고용 효과가 높은 기업에 자금과 혜택을 우선 지원하고, 일자리 질이 낮은 대학 학과에는 경고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국무원은 이 방안을 발표하며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과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높은 청년 실업률, 부동산 시장 침체, 소비 위축 등이 중국 경제의 만성적인 어려움으로 자리 잡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서 줄줄이 대책을 내놓는 형세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현지에서 정책 실행을 맡은 지방정부의 자신감은 나날이 하락하는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24일 이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경제를 이끄는 연안 지역 지방 관리들이 올해 GDP 목표치 5% 달성이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이로 인해 공산당 지도부가 경제 문제를 논의하려 예정에 없던 비공개 회의를 여러 차례 열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통신은 이날 중국 3대 금융당국 수장 합동 기자회견이 “개최 48시간 전에 급히 마련된 것”이라며 지준율 인하 조치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deflationary spiral)에 접어든 경제에 대한 대량의 아드레날린 주사 처방”이라고 평가했다.
블룸버그의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은 경제 전망 회복에 급급하며, ‘근본을 다지고 원기를 북돋우는(固本培元)’ 과거 정책은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고, 핵심 경제 싱크탱크도 교체됐을 수 있다고 베이징 내 소식통은 전했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중국 경제 문제에 대해 현실을 미화하거나 외면하다가 올해 경제 성장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잇따르자 입장을 바꾼 것 같다고 논평했다.
논평에서는 또한 현재 진행 중인 부동산 위기와 높은 청년 실업률로 인해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불만도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지급을 거부해 왔던 베이징 당국은 최근 최고위층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이례적으로 저소득층에 1500억 위안의 구제금을 한꺼번에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외부에서는 이 돈이 대중에게 얼마나 전달될지 의문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