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모습 감춘 中 최고 경제 브레인, 단톡방 ‘시진핑 비판’이 원인이었다

강우찬
2024년 09월 26일 오후 5:19 업데이트: 2024년 09월 26일 오후 5:19
TextSize
Print
  • 5개월 간 공식석상에서 보이지 않던 중국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부소장의 근황이 최근 전해졌다. 당국에 구금됐으며 직위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 그 이유로는 비공개 단톡방에서 시진핑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라는 게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 내용이다. 해고된 부소장은 시진핑의 생사 문제까지 거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한편, 사회과학원은 경제연구소 부소장을 비롯해 9명의 교체 소식을 전하며, 새로운 학술위원 선발 기준으로 “정치성”, “절대적인 충성심”을 발표했다.

공개석상에서 5개월간 자취를 감췄던 중국 최고 싱크탱크 부소장이 시진핑 비판으로 구금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외부에서는 시진핑 정권의 권력이 최고점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체제 내 지식인들의 정권 비판을 입막음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부적으로 취약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최고 학술기관이자 중국 공산당 직속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 주헝펑(朱恒鵬·55) 경제연구소 부소장이 구금 후 해임됐다고 보도했다.

중화권에서는 지난달 말부터 주헝펑 부소장을 비롯해 경제연구소 소장, 연구소 공산당 위원회 서기가 한꺼번에 교체됐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공산당 위원회 서기는 당위서기 혹은 당서기로 불리며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치 비서장 격이다.

중국의 일정 규모 이상의 기관, 기업, 단체에는 모두 이러한 이념 감독관이 임명돼 개인과 조직의 정치 성향을 감시하고 지도한다. 당서기까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지난 23일부터 주헝펑 소장이 ‘당 중앙에 대한 망언’으로 엄중한 처분을 받았다며 홍콩 언론 등을 인용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언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WSJ 보도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이 전해졌다. 주헝펑 부소장은 중국판 카톡 단톡방에 해당하는 ‘위챗 그룹’ 비공개 채팅방에서 시진핑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국내 언론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WSJ에 따르면 주헝펑 부소장은 ‘시진핑의 생사 문제(mortality)’까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듭된 경제 헛발질…경제학자들 인내심 바닥났나

23일 중국 사회과학원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경제연구소 소장과 부소장, 당서기 등 9명이 새로 임명됐다고 공지했다.

중국 경제 정책의 산실인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가 최고위급 학자들을 대거 교체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 일이다. 이를 두고 중화권 언론에서는 ‘지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회과학원 원장 겸 당서기 가오샹(高翔)은 당위원회가 이번 인사에서 “정치적 기준을 학술위원 선임의 주요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며 “새로 선출된 학술위원은 절대적인 충성심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해임된 주헝펑은 이번 ‘사고’ 발생 후 칭화대 산하 싱크탱크에서도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중국 문제 전문가들은 최고 경제 브레인에 대한 이번 처분은 중국 공산당이 경제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위기 해결보다 정보 통제와 언론 탄압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평론가 리닝은 “고위 경제학자가 비공개 채팅방에서 경제 정책을 비난한 것을 두고 정권이 손을 댈 정도라면, 이미 내부적으로 이런 소문이 나도는 것을 그냥 두지 못할 정도로 비판 여론에 민감하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인권변호사 라이젠핑은 “우리가 오랫동안 중국의 위기를 이야기해왔지만, 중국은 큰 나라다. 무너지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그러나 최근의 정치 위기, 경제 위기, 사회 위기, 외교 위기 그리고 통제력 위기는 지금까지와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라이젠핑은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가 문제 없다면, 인터넷에서 ‘경제가 나쁘다’는 댓글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정권이 지닌 불안감이 크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조차 ‘국가 비난’이라고 잡아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경제매체 거룽후이(格隆滙) 창립자 겸 경제학자 거룽(格隆·필명), 중터우 증권 애널리스트 쉬샤오위(徐曉宇), 유명 평론가 쉐이페이(水皮), 경제학자 마광위안(馬光遠) 등 중국 경제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던 이들이 모두 발언 금지 조치를 당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주헝펑 부소장 | 웨이보

지난해 12월 중국 방첩기관인 국가안전부는 중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범죄행위’라며 처벌 방침을 발표했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중국판 카톡 위챗 공식 계정을 통해 “경제 분야는 국가 간 경쟁의 중요 전쟁터”라며 “이 전쟁터에서 중국 경제를 쇠퇴시키려는 ‘말의 흉계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이러한 범죄 행위를 단호히 단속하고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라이젠핑은 “중국에서 시장과 경제에 관한 정보 수집, 데이터 분석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결과를 쉽게 발표할 수 없다”며 “객관적 지표를 발표하더라도 부정적 경제 상황이 담겨 있으면 사회를 혼란시키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듯 자기검열을 하고, 양심을 어기고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중국 공산당 독재 통치의 본질”이라고 덧붙였다.

구금된 주헝펑 부소장, 평소 중국 경제에 소신발언

주헝펑은 1991년 베이징과학기술대학 졸업 후 중국 인민대학 대학원에서 계량경제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사회과학원에서 보건경제학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2014년 경제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됐고 중국 제약업체 사외이사로도 재직했다.

그는 보건·경제정책 연구자로서 중국 공산당의 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세금 부담은 과중하지만 사회보장 구조에 미흡해 내수시장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 사이에 의료 및 사회보장 서비스의 엄청난 격차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발표했으며, 시진핑의 이름은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공정한 분배와 소비 촉진을 위해 조세 개혁, 사회보장 체계 개혁이 시급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평론가 싱톈싱은 “경제 문제를 말할 때 시진핑이나 그의 측근을 빼놓고 언급할 수 없다. 그들이 책임자이고 경제 정책을 주도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문가들은 정치가 아닌 경제를 논할 뿐이지만, 권력자들은 자신을 비판한다고 분노하며 그들을 숙청한다. 그렇게 되면 진실을 말한 사람도, 말할 사람도 점점 사라진다”고 말했다.

한편, 사회과학원은 주헝펑 부소장에 대한 징계 소식을 공지하면서 과학원 주요 간부 겸 당원들에게 10가지 엄격한 금지 사항이 담긴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사회과학원 발표에 따르면, 이번 숙청은 시진핑의 충성파로 여겨지는 가오샹 원장 겸 정치비서장(당서기)이 직접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