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승리를 환상적 색채로 표현하다…19세기 풍경화 ‘코토팍시’

마리 오스투(Mari Ostu)
2024년 09월 23일 오후 8:32 업데이트: 2024년 09월 26일 오후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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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 ‘허드슨강(江) 화파’ 풍경화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1826~1900)는 고유의 풍경화 기법으로 대중을 매혹한 화가다. 특히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코토팍시’는 일출과 함께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당시 미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코토팍시’

‘코토팍시’(1862),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코토팍시(Cotopaxi)는 에콰도르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화산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중 하나로, 그 높이가 5897m에 이른다. 처치는 1862년, 에콰도르를 여행하던 중 눈부신 빛깔의 일출과 함께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가로 213cm, 세로 122cm의 거대한 이 작품은 보는 이를 절로 경건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숭고하고 낭만적인 구도의 대자연이 화폭 전체에 묘사돼 있다.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회색 연기에 둘러싸인 불타는 태양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태양은 연기에 따스한 색을 물들여 자칫 어두울 수 있는 화면을 밝은 기운으로 채운다.

‘코토팍시’(1862)의 세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그림 속 전경에는 험준한 절벽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절벽의 대부분은 아직 새벽녘 어스름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위가 붉게 물든다. 포효하듯 힘차게 흐르는 폭포는 하얀 거품의 일부가 햇살에 물들어 장밋빛으로 빛난다. 처치의 작품은 목가적인 분위기가 특징인데, 이 작품도 역시 왼쪽 전경에 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다. 나무는 잎과 가지가 상세하고도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원근법을 살린 묘사로 멀리 있는 풍경은 희미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코토팍시’(1862)의 세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미국인들의 애정

이 작품은 에콰도르의 화산 폭발을 묘사한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이 작품에 열광했다. 남북전쟁(1861~1865)의 혼란 속에 빠져 있던 대중들은 이 작품을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당시 미술,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은 전쟁과 사회 격변 속 정서적 혼란을 표현하는 데에 극한의 날씨나 자연재해를 차용했다. 1863년 뉴욕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코토팍시’는 대중과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다. 미국 언론은 화산을 전쟁통의 포탄에, 화산재 구름을 대포 연기에 비유하며 이 작품이 ‘안내의 지표가 아닌 경고의 지표’를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초 풍경화가들은 길들지 않은 자연을 인간이 파괴하는 것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들은 캔버스에 에덴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담고자 했지만, 전쟁과 산업화에 의해 그 바람이 무산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인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배우다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의 초상’(1855년경). 에드워드 해리슨 메이 | 퍼블릭 도메인

처치는 코네티컷주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덕에 그는 어릴 적부터 예술적 성취에 대한 갈망을 어렵잖게 충족할 수 있었다. 청년기의 그는 허드슨강 화파의 창시자 토머스 콜(1801~1848)의 유일한 제자가 됐다. 처치는 스승에게서 이상적인 구도 개발법 등 작업 기법을 습득했고, 이후 허드슨강 화파의 2세대 리더로 자리 잡았다.

‘나이아가라’(1857).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처치는 1853년 남미로 처음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안데스산맥의 화산을 처음 보자마자 매료됐다. 4년 후 동료 화가와 함께 남미로 다시 떠난 그는 코토팍시, 상가이, 침보라소 화산 그림을 유화와 연필 스케치로 다수 남겼다.

‘안데스의 심장’(1859).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이후 그는 ‘나이아가라’(1857), ‘안데스의 심장’(1859), ‘황야의 황혼’(1860)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는 대자연의 웅장한 풍경을 화폭에 옮겨 담으며 구도와 색채에 대한 감각을 내면화했다.

‘황야의 황혼’(1860).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그가 코토팍시를 그리기에 앞서 완성한 작품들은 이후 탄생할 작품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 나이아가라의 격렬한 폭포와 안데스산맥을 배경으로 희미하게 묘사된 침보라소산, 황야의 불타는 듯한 다홍색 구름 등은 코토팍시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작품은 처치의 예술 인생의 정수이자 결정체로 불리게 됐다.

예술의 정수

코토팍시는 단순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화가가 그린 남미 풍경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처치의 구성적 기교와 자연주의를 향한 그의 애정, 그리고 남북전쟁의 혼란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코토팍시’(1862)의 세부.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캔버스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처치의 스승이자 동료 예술가였던 토머스 콜은 그에 대해 “처치는 이 세상에서 드로잉을 하기에 가장 민감한 눈을 지닌 사람이다”라며 동료에 대한 인정과 애정을 표했다.

자연에 대한 종교적 경외심과 호기심, 완벽한 묘사에 대한 집념으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처치는 당시 서양 풍경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큰 감동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