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부모 타도’ 주도한 中 홍위병 상징, 쑹빈빈 미국서 사망

- 문혁 초기, 텐안먼 성루 올라 마오쩌둥 팔에 직접 ‘홍위병’ 완장 채워준 일화 유명
- 교사 구타해 살해하는 홍위병 본 중국인들이 떠올리는 ‘폭력 투쟁’ 상징적 인물
- 마오쩌둥 사망하며 문혁 끝나자 미국으로 유학, 한때 귀국해 문혁 피해자에 사죄도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三體)’의 첫 장면은 중국 현대사 최대 비극 중 하나인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충격을 던졌다.
문화대혁명 광풍 속에서 천체물리학계 신동 예원제(로절린드 차오 분)는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대중 앞에서 폭행당하고 죽는 걸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자신도 연좌제를 적용받아 각종 강제 노역을 한 뒤 국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과학 기지로 들어가며 겪게 되는 일들이 주된 에피소드다.
해당 장면을 보면서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쑹빈빈(宋彬彬)이다. 대약진(大躍進)이라는 미명하에 추진한 사회주의 경제체제 도입, 집단농장화 속에서 결과적으로 대역진(大逆進), 대량 아사(餓死)를 초래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실각 위기 속에서 정치적 반격으로 추진한 문화대혁명의 상징적 인물이다. 이런 쑹빈빈이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쑹빈빈은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6년 8월 18일,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마오쩌둥은 쑹빈빈의 이름을 거론하며 “‘논어(論語)’의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인가?”라고 질문했다. 쑹빈빈이 “그렇다.”고 답하자 마오쩌둥은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要武嘛)?”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쑹빈빈은 ‘쑹야오우(要武)’로 이름을 바꿨다.

열흘 전인 8월 8일, 중국 공산당 제8기 11차 전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16조 제6항에는 “요용문투, 불용문투(要用文鬪, 不用武鬪)”라는 구절이 명시돼 있었다. 무력투쟁(武鬪)를 지양하고 문투(文鬪)를 하라는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무력이 필요하다.”, 즉 “요무(要武)” 한 마디로 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문투(文鬪) 원칙”을 조롱했다. 홍위병을 향해 무장투쟁에 나서라는 지시였다.
쑹빈빈은 당의 영수(領袖) 마오쩌둥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직후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며 감격했다. 이어 “위대한 뜻을 담은 이름을 얻었으며, 마오쩌둥 주석은 우리에게 방향을 밝혀줬다. 우리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 즉 혁명은 무죄이며 반란은 정당하다는 구호를 외치며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부모 등 존속 폭행은 물론 살인도 용인됐다. 책 대신 몽둥이를 든 어린 학생들은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신 잔혹한 학살의 경쟁을 시작했다. 최선봉에 선 인물이 다름 아닌 쑹빈빈이다. 그는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등 전국적인 무장투쟁을 선동하며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홍콩 일간지 명보(明報)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학생이던 쑹빈빈이 모교 볜중윈(卞仲耘) 교감 등 7~8명을 직접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말도 돌았다. 볜중윈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학생에게 구타당해 숨진 첫 교육자였다.
실제로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도입부에서 홍위병이 교사를 구타해 숨지게 하는 장면을 본 많은 중국인은 쑹빈빈을 떠올렸다고 한다. 드라마와 달리 쑹빈빈의 아버지는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인 쑹런충(宋任窮) 상장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쑹빈빈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등에서 활동했고, 공농병(工農兵) 학습을 통하여 1975년 창춘(長春)의 지질학원(地質學院)을 졸업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문화대혁명도 종식됐다. 1980년 쑹빈빈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83년 보스턴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1989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지구대기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환경국 분석관으로 일했다.
쑹빈빈은 2014년 모교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를 찾았다. 교정의 볜중윈 교감 흉상에 머리 숙여 사과한 후 “학교 질서를 앞장서 파괴하고 선생님들을 괴롭혔다.”며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이어 “문화대혁명은 한바탕의 대재앙이었다.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다.”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희생자 볜중윈 교감 유가족은 그의 사과를 거부했다. 볜중윈의 남편 왕징야오(王晶堯) 전 중국과학원 연구원은 “볜중윈 교감이 죽은 지 48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죽인 이들은 여전히 법을 어기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왕징야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은 아내 볜중윈이 살해된 지 불과 13일 후인 1966년 8월 18일, 쑹빈빈이 톈안먼 성루에서 마오쩌둥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때 홍위병의 상징이었던 쑹빈빈의 사망 소식은 중국 관영매체에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중국 공산당마저 재앙이라고 인정한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온몸을 던진 인물이 자유민주주의 미국에서 숨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