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정보기관은 합법 탈법 경계 넘나드는 일 하는곳” 장석광 전 국정원 대공수사처장 ①

최창근
2024년 09월 8일 오후 4:22 업데이트: 2024년 09월 8일 오후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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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날 간첩과 지기가 된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관
  • 국가 정보기관은 국익을 위해 부정한 일도 하는곳
  • 공안기관 부정적 시선으로만 봐선 안돼
  • 고 최덕근 영사를 한국의 엘리 코헨으로 만들어야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해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모사드(Mossad)’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이스라엘 정보기관 정보특수작전국의 지난 모토이다. ‘구약 성경’에서 유래했다.

‘구약 성경’ 모세 5경 중 하나인 ‘민수기(民數記)’ 13장, 14장은 인류 최초의 스파이 활동 중 한 장면을 묘사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열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한다는 내용이다. 40년간 시나이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다. 그 땅은 이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 땅은 다른 종족의 영토였기 때문에 뺏어야 했다. 모세가 파견한 12명의 스파이는 40일 동안 가나안 지역 곳곳을 누비며 정탐활동을 벌였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기’에도 여리고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내용이 기록돼 있다.

스파이는 창녀, 세리(稅吏) 등과 더불어 ‘성경’에도 등장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들’ 중 하나이다. 이는 인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라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된 오늘날 세계 각국은 ‘국익(國益)’을 위하여 치열한 스파이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스파이 혹은 정보기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은 것은 세계 공통의 일이다. 정보기관 특유의 음습(陰濕)한 이미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표 정보기관 국가정보원 원훈(院訓)도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指向)한다.’이다. 1961년 국가정보원의 전신 중앙정보부 시절 부훈(部訓)이기도 하다.

스파이 세계는 ‘알고 싶지만 알지 못하는’ 영역 중 하나이다. 와중에 저술,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스파이 세계, 정보기관의 역할을 대중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다. 정보기업 JK 포렌식 인텔리전스를 운영하며 국가정보학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장석광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장석광 박사는 국가정보원 베테랑 대공수사관 출신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인 1988년 입부하여 28년간 국가 안보 수호 최일선에서 일했다. 미국 연방수사국아카데미(FBI National Academy)에서 연수했고 국가정보대학원 교수로 활동했다. 대공부서에 몸담아 대공수사처장을 지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퇴직 후 범죄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원, 동국대 법무대학원 교수로 연구·강의 활동을 했다.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최덕근 영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대표, 대한민국 구국혼 선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스파이 내전: 서커스 광대 두더지’ ‘국가정보원, 존재의 이유(공저)’가 있다.

장석광 박사와 국가정보원으로 대표되는 한국 정보기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입부한 특별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장석광 박사는 정보·수사 요원은 기본적으로 ‘입부(入部)’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며 ‘입사(入社)’라고 한다고 했다. 한국 정보·방첩 기관은 소속 기관을 ‘회사’라고 통칭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도 회사라는 뜻의 ‘컴퍼니(company)’ 혹은 ‘펌(firm)’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다. 그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국가안전기획부 해외담당 청사에 있던 정보학교에서 1년 신입요원 교육을 받고 1988년 12월, 남산 국내담당 청사로 배치받았다고 했다. 이후 1995년,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 통합청사로 가기 전까지 7년 정도 근무했다고 했다. 젊은 시절 그가 일했던 곳은 오늘날 서울특별시청 남산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제5국(대공수사국) 청사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의 대학 전공 중 가장 많은 것은 법학이었습니다. 저도 모 국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요. 요즘은 전공이 다양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다수 법학 전공자가 그러했듯이 저도 사법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지만 몇 차례 낙방했고요. 저는 기혼자였는데, 교사였던 아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조만간 아내가 저를 포함한 세 사람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죠.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눈을 돌려 국가안전기획부 공채에 응시하게 됐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른바 ‘언론고시’라고 하여 언론사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주요 신문·방송사 기자가 되거나, 국가안전기획부 공채에 합격하면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다름 없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저도 공채에 응시했고, 합격했습니다. 당시 입사 경쟁률은 100대 1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날 서울유스호스텔로 용도가 바뀐 구 국가안전기획부 본부 청사. | 서울시.

민주화 이전 공안기관에 대한 인식이 좋진 않았을 듯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인데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고 하잖아요. 어떤 직업이든 절대적으로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가치관 혹은 경험치에 따라 특정 직업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고요.”

장석광 박사는 “1980년대라는 특정 시대에 한정해서 고찰한다면 시대상이 반영된 특정 직업에 대한 보편 인식은 논할 수 있을 듯하다.”고 전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입사했던 1980년대 후반은 1987년 6·10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 복원’을 골자로 한 제6공화국 헌법 제정이 이뤄진 시기입니다. 민주화 열풍에 힘입어 시민·사회·노동단체 힘이 급속하게 성장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국가안전기획부를 비롯한 공안기관 인식은 나빠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직장 선·후배, 동료 중에서 결혼을 하려고 맞선을 보러 갔다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기도 했죠. 제가 직접 보고 듣고 한 일입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 옆, 지번으로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에는 검정색 벽돌조의 건물이 있다. 지난날 내무부 치안본부(현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공식 명칭은 경찰청 보안3과 청사이지만 ‘남영동’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은 민주인권기념관이다. 서울 남산 일원에는 오늘날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는 구 국가안전기획부 본관을 비롯하여 관련 시설이 산재해 있다.

1970~80년대 남산남영동과 더불어 일반인에게는 공포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남산의 부장들등의 영화도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한 듯하고요.

“제 경험을 이야기하기 전에 국가안전부 국내 청사, 일명 ‘남산’과 치안본부 대공분실 이른바 ‘남영동’이 일반인에게 왜 공포의 대명사로 인식되게 됐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5000만 명이 넘는 한국 국민 중 남산이나 남영동에서 조사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대공수사 경찰관이나 국가정보원 수사관을 직접 대면한 경험을 보유한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장석광 박사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 유포한 검증되지 않은 일방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여 남산이나 남영동이 공포의 대명사가 된 측면도 있다고 했다. “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나 주장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일까요? 학생운동가, 시민·사회단체 등 이른바 민주화 인사들이 자신의 활약이나 그 의미를 과장하려 들다 보니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공안기관을 악마화하고 공포스럽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었다. “제가 조사했던 한 시민운동가는 조사를 받던 중 ‘국가안전기획부가 이런 곳인 줄 몰랐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수사관들도 젠틀하다. 정말 고맙다. 밖에 나가면 술 한잔 꼭 사겠다’라고 했습니다. 훗날 그는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구치소에 면회 간 동료들에게 이랬다고 합니다. ‘남산에서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붓더라…. 훗날 그는 공안기관의 악랄한 고문을 이겨낸 영웅이 됐고요.”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미디어가 악마화하기도 한 대공수사관과 달랐다고도 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 준다면요.

“제가 경험한 대공수사관은 좋은 학교 출신인데,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책상물림’이죠.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진로를 돌려 국가안전기획부에 입사한 늦깎이 수사관, 대기업에 근무하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사직하고 입사한 정의파,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샌님, 목회자를 꿈꾸던 전도사 출신 등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남산’ 근무시절은 ‘월화수목금금금’의 연속이었다는 장석광 박사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분위기를 들려 주었다.

당시 업무는 어떠했나요?

“요즈음 남녀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담은 영상을 틀기도 하는데, 제 자녀들의 어린 시절 사진에는 저는 빠져 있습니다. 대부분 엄마, 그러니까 제 아내하고 찍은 사진만 있어요. 매일 오전 6세 30분 전후로 출근해서 저녁 9시 전후로 퇴근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수사가 없을 때 일상이고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면 1주일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예사였죠. 그 시절은 토요일을 ‘반공일(半公日)’이라 불렀는데, 일반 공무원이 12시면 퇴근해도 저희는 오후 5시에야 퇴근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일요일 비상대기 근무도 있었고요. 되돌아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했었어야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당시 남산의 문화는 그랬습니다.” 장석광 박사는 ‘제5병동’이라 불리던 대공수사국의 남산 청사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날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국가안전기획부 국내 청사 본관이었습니다. 별관들도 남산 곳곳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대공수사국(안보수사국)은 내부 편제상 제5국이었습니다. 서울시청 남산별관으로 사용 중인 제5별관을 사용했는데, 군대에 비유하면 독립연대 개념이었습니다. 제5국장이 청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고 업무를 총괄했죠. 저의 초년병 수사관 시절 국장 카리스마가 대단했습니다. 일 중독자였고요. 어느 날, 평소에는 일러도 밤 9시, 10시는 되어야 퇴근하던 국장이 7시도 안 된 시간에 퇴근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 기념 만찬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5별관 전체가 떠들썩해졌죠.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직원들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습니다.  ‘총알 나가고 탄피 빠지듯’ 국장 휘하 단장, 과장, 계장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일반 직원들도 퇴근하고요. 다음 날 아침 출근하니 개미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듯, 태풍 전야의 고요가 제5별관 전체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전날 저녁 식사에 갔던 국장이 식사만 하고 8시도 안 돼 청사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국장은 전체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점검하고요. 각 부서별 사무실에는 보안담당관 한 명 씩만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날 이후 젊은 직원들은 제5별관을 ‘제5병동’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 최후의 보루이다.’ ‘대한민국은 내가 지킨다.’는 애국심과 열정이 충만한 시절이었습니다.”

장석광 박사가 쓴 ‘스파이 내전’에는 젊은 수사관 시절 상관으로 모셨던 모 단장 일화도 나온다. “A단장은 이런 사람이다. 6시면 출근해서 10시 반경 퇴근했다. 일요일에는 10시 전후로 나와서 저녁 7시 전후로 나갔다. 토요일도 없고, 휴일도 없었다. 명절에도 어김없이 출근했다. 오랜만에 형 집에 왔던 동생들도 ‘회사 가 봐야 한다.’는 형의 등쌀에 제사나 차례 지내기 바쁘게 쫓기다시피 형 집을 나와야 했다. 내가 기획반에 근무했던 1년 365일 동안 A단장은 363일 반을 출근했다. 하루 휴가를 냈고, 한 번 반차를 냈다. 휴가 사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반차는 토요일 반일 휴가였다. 지방서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고 왔다.”

장석광 박사가 젊은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으로서 ‘국내파트’에서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 ‘해외파트’에서 활약하다 순직한 요원도 있다.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상을 떠난 고(故) 최덕근 영사이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출신으로 학군사관후보생(ROTC)으로 복무 후 국가안전기획부에 입부했던 그는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 요원으로 활동했다. 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영사 신분으로 파견된 공작관이던 그는 1996년 10월 1일 밤, 블라디보스토크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피살됐다. 부검 결과 그의 시신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독침에 사용하는 독극물 성분이 검출됐다. 그는 국가정보원 순직자 중 유일하게 신분이 공개된 인물이다. 장석광 박사는 ‘최덕근 영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대표를 맡아 선양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고 최덕근 영사 사건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국가정보원 순직자 중 유일하게 신분이 공개된 인물입니다. 

장석광 박사는 “고 최덕근 영사를 한국의 엘리 코헨(Eliyahu Cohen)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소속 해외 공작요원으로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한 채 ‘적국’ 시리아에 잠입하여 첩보활동을 벌였다. 그의 첩보공작으로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시리아 국방부 차관까지 올라갔지만 스파이 활동이 발각돼 공개 처형됐다. 그의 삶을 다룬 드라마 시리즈 ‘더 스파이(The Spy)’가 글로벌 OTT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엘리 코헨은 사후 중령으로 추서됐고, 국립묘지에 추모 석판이 설치됐다. 모사드의 직간접 후원으로 다양한 언어권에서 엘리 코헨의 전기·소설·영화·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 | 연합뉴스.

엘리 코헨을 언급한 장석광 박사는 모사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사드는 이른바 ‘표적 암살’로 유명한 조직입니다. 1972년 10월 16일, 로마에서 살해된 팔레스타인인 와엘 즈웨이터(Wael Zwaiter) 사체에서 11발의 총알이 발견됐죠. 한 달 전인 9월 5일 독일 뮌헨에서 살해된 이스라엘 선수 1명당 1발씩이었던 셈입니다. 그중 1발은 정확하게 머리에 박혀 있었고요. 그때부터 모사드는 ‘복수’ ‘대담함’ ‘잔인함’의 동의어가 됐습니다.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적(敵)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죽이는 조직으로 이미지화됐고요. 아랍인들은 모사드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후 지구촌에서 누군가 의문의 죽임을 당할 때마다 모사드가 언급됐습니다. 모사드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사드의 새로운 신화가 창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사드 스파이 중  엘리 코헨은 전설입니다. 사업가로 위장해 시리아 군부에 침투했으나 1965년 1월 체포되어 그해 5월 18일 다마스커스 광장에서 처형됐죠.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모세 다얀(Moshe Dayan) 장군은 ‘엘리 코헨의 정보가 없었더라면 골란 고원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며 엘리 코헨을 추앙했습니다.  엘리 코헨을 전설로 만든 것은 모사드였지만, 모사드를 세계 최고 정보기관으로 만든 것은 엘리 코헨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덕근 영사가 세상을 떠날 때 배경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함 무장 공비들이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는 준(準)전시상태가 보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연일 대남 방송을 통해 ‘백배, 천배 보복’을 협박하고 있었죠. 와중에 10월 1일 20시 45분쯤 최덕근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영사가 자신의 아파트 3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부검 결과 시신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독침에 사용하는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 독극물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두개골은 함몰됐고 오른쪽 옆구리에 두 차례 독침 자국이 발견됐다. 당시 최덕근 영사는 ‘슈퍼노트’라 불리던 미화 100달러 위조지폐 유통 경로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30세 전후 용의자 3명이 현장에서 목격된 정황상 북한의 암살로 추정됩니다. 최덕근 영사는 사후 이사관(2급)으로 추서됐고 보국훈장 천수장이 수여됐습니다.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에 수사 독려 공문만 몇 차례 보냈을 뿐이었죠. 2011년 10월 1일 공소시효가 만료됐습니다. 정부의 이의 제기로 2012년 10월 수사 재개가 결정됐지만, 범인 검거는 여전히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장석광 박사는 이스라엘과 천양지차인 순직 첩보원 대우를 지적했다.  “최덕근 영사는 국가정보원 순직자 중 유일하게 신원이 공개된 인물입니다. 아쉽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인인 엘리 코헨은 알아도 자국인 최덕근은 모르고 있습니다. ‘엘리 코헨은 들어봤지만 최덕근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말하는 형편이죠.” 고 최덕근 영사는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관 모역’에 안장돼 있다. 이에 대해 장석광 박사는 “소방관 사이에 자리한 최덕근 영사 묘비를 볼 때마다 북한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위험한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2022년 ‘모사드에 엘리 코헨이 있다면, 국정원엔 최덕근 있다’는 제하의 일간지 칼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을 모사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규현 신임 국가정보원장도 국가정보원을 이스라엘 모사드처럼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모사드에 엘리 코헨이 있다면 국정원엔 최덕근이 있다. 10월 1일이면 최덕근 순국 26주년이다. 최덕근이 국가정보원의 엘리 코헨이 된다면 국가정보원은 저절로 한국의 모사드가 될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가정보원장의 진정성을 느껴보고 싶다.”

서울 서초구 국가정보원 경내 보국탑에서 열린 고 최덕근 영사 26주기 추모식. | 최덕근 영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수사관으로서 장석광 박사가 인연을 맺은 이 중에는 민경우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가 있다.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1995년부터 10년 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거물 주사파였다. 당시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주로 맡은 ‘연락책’이었다. 1997년 한국 정부는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지정했고, 민경우 대표도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그를 첫 검거하여 재판에 넘긴 장본인이 장석광 박사이다. 수사관과 간첩 용의자로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른 후 지기(知己)가 됐다. 지난해 12월에는 민 경우 대표가 출간한 ‘스파이 외전’ 북콘서트에 출연했고, 유튜브 방송에서도 함께하고 있다. 장석광 대표는 올해 1월 출간한 ‘스파이 내전’은 ‘스파이 외전’과 운율을 맞춰 지은 제목이라고 덧붙였다.

대공수사관과 거물 간첩 용의자가 친구가 된 셈입니다. 드문 일인 듯하군요.

“민경우 대표와 저는 간첩 용의자와 대공수사관이라는 대척점에서 만났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방향, 목표점, 역사 인식 등은 예전부터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 방송에서 민경우 대표가 저와 같은 방향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서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장석광 박사는 민경우 대표의 첫인상부터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민경우 대표를 조사할 때 ‘왜 서울대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국사학과에 다시 입학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학생 운동에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그 대답 자체가 인상 깊었습니다. 그 후로 민경우 대표가 조사받는 태도를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그 시절 이른바 주사파 학생들은 공안기관에 잡혀 와도 소영웅 심리,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다수였습니다. 민경우 대표는 달랐죠.

그는 민경우 대표의 ‘프로파일(profile)’도 독특했다고 술회했다. 동어(同語) 프랑스어는 ‘프로필’로서 범죄자의 특성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것을 의미한다.  “수사관마다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주사파 운동권에 대한 프로파일이 다를 수 있겠지만 민경우 대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운동권의 일반적 프로파일과는 달랐습니다. 그 시절 주사파 운동권 학생들은 지방 출신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요. 민경우 대표 부모님처럼 이북 출신 실향민 출신인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당시 민경우 대표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습니다. 재력 있는 실향민 집안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대에 입학했습니다. 쉽게 수긍되지 않는 프로파일이었습니다.”

장석광 박사는 민경우 대표 수사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민경우 대표는 ‘당신들은 당신 일 하는 것이고 나는 내 신념대로 산다.’는 태도였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면 받아들였습니다. 친북 성향이었으나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 충성 표시도 없었습니다.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정도 되면 운동권에서 행세깨나 할 수 있는 자리였음에도 민경우 대표는 솔직담백하고 겸손했습니다.”

지난날 운동권에서 오늘날 보수 우파로 전향한 민경우 대표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지난해 ‘스파이 외전’ 책을 펴냈다. 1970~80년대 한국 운동권, 주사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기술한 책에 대해서 장석광 박사는 다음과 같이 소회했다. “책을 읽고서 고마웠습니다. 제가 그동안 상대해 왔던 사람들에 대한 진실, 우리 사회 그 누구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던 그 진실을 저자가 저 대신 말을 해주었습니다. 26년 전 국가안전기획부 조사실에서 제가 저자에게서 느꼈던 저의 직관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 줘서 더 고마웠습니다.”

민경우 대표는 올해 장석광 박사의 ‘스파이 내전’ 출간에 즈음하여 “두 갈래 레일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면 우리가 함께 지향하는 바는 그보다 훨씬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고 사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공통의 신념을 공유하고 그에 대해 나는 장석광 선생께 빚을 지고 있다.”고 화답했다.

민경우 대표 관련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1997년 민경우 대표를 처음 체포해서 조사하고 검찰로 송치했습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수사한 피의자는 법원 공판 과정도 동향 파악을 했습니다. 피의자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수사받을 때 했던 진술과 재판정 진술이 상이할 경우 대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안전기획부 담당 수사관은 검찰의 공판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설명한 장석광 박사는 민경우 대표 공판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민경우 대표가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저도 재판정에 나가 방청석 가장 뒷자리에 앉아서 재판을 지켜보고 나오는데, 민경우 씨 지인 한 명과 마주치게 됐습니다. 순간 식은 땀이 흘렀죠. 둘러보니 저는 혼자인데 상대 측은 수십 명이었습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순간 그 지인이 반갑게 제 손을 잡으며 ‘선생님 고맙습니다. 바쁘실 텐데…’라고 말하더군요. 찰나의 순간에 저도 기지를 발휘해서 ‘걱정 많이 되시죠? 잘될 겁니다. 힘내세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하고서는 뒤도 안 돌아 보고 빠져나왔습니다. 다음 공판부터는 제 후배가 참관했고요. 당시 민경우 씨 지인은 저를 범민련이나 민주화 관련 단체 활동가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는 잠복 수사를 하면서 얼굴이 알려진 것이 원인이었을 듯하다고 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민경우 씨를 체포하기 위해 그가 은신해 있을 만한 장소에 수사관을 잠복시켰습니다. 민경우 씨 자택, 지인이 운영하던 음식점을 제가 맡았고요. 낮에는 음식점에서 손님으로 가장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고요. 밤이면 자택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경우 씨 지인에게는 제가 낯익고요.”

 오늘날 공안 기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국가 정보기관은 잘 드는 칼과 같습니다. 사용하는 이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도, 반대로 죽이는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같은 칼이 의사에게 주어지는가 강도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문명 국가 중에서 국가 차원의 정보기관을 두지 않는 국가는 없습니다. 주지할 점은 해당 국가 정치 수준에 비례하는 국가정보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정보기관이 국가를 지키고, 국익을 위하고, 국민을 살리는 기관이 되려면 우리나라 정치가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되어야 합니다. 정치는 국민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고요. 이 관점에서 국가정보기관은 국민의 얼굴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장석광 박사는 국민에게 반드시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보기관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면 정보기관 출신, 민간인을 망라하고 정보기관의 업보(業報) 혹은 흑역사만 이야기합니다. 저는 관점을 달리합니다. 한국에서 정보기관이라고 하면 다수 국민의 뇌리에는 ‘독재정권’ ‘인권 침해’ ‘고문’ ‘조작’ 등 온통 부정적 단어가 떠오릅니다. 본디 정보기관은 합법적인 활동만을 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指向)한다.’는 국가정보원 원훈이 이를 대변합니다. 정보기관의 태생적 특성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를 지나 오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보기관은 한국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정보기관의 역할과 활동을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성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1960~70년대 이른바 공안 사건의 재심(再審)이 열리고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될 때마다 한국 국민은 지난날 중앙정보부의 악행만을 연상합니다. 저는 ‘중앙정보부 활동이 악행만으로 점철되었을까?’라고 감히 묻고 싶습니다. 중앙정보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에 들이댄 잣대를 당시 검찰, 경찰, 법원이나 다른 나라 정보 기관에 들이댄다면 이들은 어떤 평가를 받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로 인한 불신의 배후에는 남북 분단 상태에서 한국 정보기관 무력화를 도모하는 북한, 한국 내 그 추종세력의 선동도 한몫한다는 생각입니다.”

국가정보원 원훈석.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1961년 중앙정보부 부훈으로 초대 부장이던 김종필 전 총리가 만들었다. |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정보기관은 합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합니다. 합법성만 강조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장석광 박사는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흔히 정보기관의 ‘하는 일’ 혹은 ‘해야 하는 일’을 거론 할 때 국익 보호, 국가 안보 수호,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 자유 민주체제 수호, 국내외 정보 수집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목표들은 정보기관이 아니라도 군, 검찰, 경찰, 외교부, 국방부 등 기타 국가기관이 일정 정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정보 수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나 깊이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거의 모든 국가기관이 업무 수행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각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정보기관, 특히 국가정보기관이 다른 국가기관과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국가 정보기관의 존재 가치라고 생각하는데, 국가정보기관은 ▲더러운 일을(dirty work, dirty job) ▲기만적(deceptive) 방법으로 ▲은밀하게(clandestine) 수행하는 곳입니다. ▲국익을 위해서(for national interests)요. 깨끗한 일, 합법적인 일, 공개적인 일은 다른 국가기관이 하면 됩니다. 적어도 문명국가에서는 국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국가기관이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합니다. 국가 정보기관은 이런 일을 하는 곳입니다.”

장석광 박사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로 이어지는 옛 국가정보원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세간의 시선에는 서운함을 드러냈다. “퇴직 후 충무로역에 가거나 남산 둘레길을 걸을 때도 옛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청사에는 잘 가지 않습니다. 기분만 언짢아지기 때문이죠. 건물 역사를 설명하는 팻말에 ‘독재’ ‘인권 침해’ ‘고문’ ‘공포’ 등 온통 부정적 단어 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사람마다 기억이 이처럼 다를까 싶기도 하고요. 사람마다 기억이 다른 건 이해합니다. 다만 그 ‘기억’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왜곡됐다 느껴질 때는 분통이 터집니다.”

그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국가정보기관의 부정적 측면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정보기관 역사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그 시대 사람의 눈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옛날’을 주제로 한 대화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뀐 ‘오늘날’로 이어졌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국군기무사령부를 ‘해편(解編)’하여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바꾼 데 이어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보 수집권, 대공 수사권을 폐지하여 기능과 권한을 축소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국가정보원의 조사권마저 박탈하려고 한다. 국가정보학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장석광 박사는 저서,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전반적인 국가 안보 기능 약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 국민에게 전가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와 나눈 한국 국가 안보 현실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