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주재 중국 총영사, 中 간첩 파문 하루 만에 ‘사임’ 발표

강우찬
2024년 09월 7일 오후 4:23 업데이트: 2024년 09월 7일 오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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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주 주지사의 전 중국계 비서실장이 중국 공산당 간첩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가운데, 뉴욕 주재 중국 총영사가 하루 만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뉴욕 현지에서는 중국 총영사가 추방당한 것인지, 임기 만료로 퇴임한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반체제 인사들은 사실상 추방됐지만 체면 손상을 고려해 퇴임을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욕주 주지사 캐시 호컬은 지난 4일(현지시각) 기자회견을 열고 뉴욕 주재 중국 총영사 황핑(黄屏)의 추방을 미 국무부에 요구했다고 밝혔다.

미국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간첩 혐의로 체포된 전 뉴욕주 주지사 비서실장 린다 쑨은 중국 영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호컬 주지사는 “뉴욕 공관에 있는 중국 총영사를 추방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고, (국무부로부터) 총영사가 더 이상 뉴욕 공관에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호컬 주지사는 린다 쑨과 황핑 총영사와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진 않았으나, 주지사의 단호하고 신속한 대처는 황핑이 린다 쑨을 통해 뉴욕주 정계 고위층에 침투한 명확한 증거가 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방증으로 풀이된다.

총영사가 추방된 것인지 명확히 밝혀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호컬 주지사는 “(총영사가) 더는 자리에 없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뉴욕포스트 등 언론은 이를 ‘요청에 따라 추방이 이뤄졌다는 인상을 줬다’고 전했다.

반면, 미 국무부는 황핑 중국 총영사가 추방된 것이 아니라 임기가 끝나 퇴임했다고 해명했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총영사가 순환근무를 마치고 예정된 일정에 따라 8월 말 직위를 떠났다”며 “추방조치는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 등은 황핑 총영사가 중국 공산당 간첩 사건과의 연루설이 터지기 직전, 떠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몇몇 주요 매체는 린다 쑨을 중국 요원 대신 ‘중국 공산당 요원(CCP agent)’으로 명시하고 있다.

중국 영사관 “허위·과장보도…황핑, 영사 업무 정상 수행”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에도 황핑은 뉴욕에 머물며 ‘중국 총영사’ 신분으로 공식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중국 영사관은 4일 성명을 내고 “황핑 총영사는 평소처럼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언론이 허위 정보를 과대 보도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황핑 총영사는 5일 뉴욕 미드타운 맨해튼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2024년 청운상’ 자선만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황핑은 축하 연사로 나서 “임기가 만료됐고 정년도 다 됐다”며 “곧 퇴임한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퇴임 일자와 귀국 일정은 밝히지 않았다.

청운상은 1926년 설립된 미중 학술·문화교류기관이자 친중단체인 화메이협회(華美協進社·China Institute)에서 미중 교류에 큰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역대 수상자로는 1979년 미·중 수교를 이끈 미국 내 대표적 친중 인사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있다.

2023년 1월, 린다 쑨(우측)이 뉴욕 주재 중국 총영사 황핑에게 주지사 허락도 없이 주지사 서명이 들어간 환영 증서를 발급해 전달하고 있다. | 뉴욕 동부지검 제공

반체제 인사들 “황핑 퇴임식도 안해…친중단체에 충격됐을 것”

국무부 발표와 중국 영사관 측 성명이 엇갈리는 것을 두고 중국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서는 “실제로는 호컬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추방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민주화 단체인 ‘중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상임이사인 천촹촹 미국 변호사는 “호컬 주지사가 추방을 요청하고 하루 만에 퇴임 선언이 나왔다.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천촹촹 이사는 “미 국무부가 중국 총영사의 퇴임 일자를 혼동했을 리는 없다”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 황핑의 퇴임식이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무부 발표대로 8월 말 퇴임했다면, 왜 퇴임식을 열지 않았겠나”라고 지적했다.

중국 언론인 출신 반체제 인사 하이펑 역시 린다 쑨 사건과의 관련성이 폭로되면서 황핑의 퇴임이 정해졌다고 봤다. 그는 이번 사건이 미중 관계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 국무부가 ‘임기 만료’라고 발표했을 것으로 풀이했다.

또한 ‘체면 손상’을 우려한 중국 영사관 측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핑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허위 발표를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이펑은 “뉴욕 총영사 황핑의 갑작스러운 퇴임으로 미국 내 친공 화교단체들이 충격에 빠졌을 것”이라며 “이들은 중국 외교관들의 뒷배를 믿고 미국 곳곳에서 오성홍기를 휘둘러왔으나, 미중 관계가 이 정도로 경색됐음을 깨달았을 것”고 주장했다.

전 백악관 안보 전문가 “린다 쑨, 중국의 전형적인 간첩 공작”

간첩 혐의로 체포된 린다 쑨은 5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햇으며 중국계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인 후, 뉴욕주 주정부의 아시아계 미국인 관련 부서 등에서 14년간 근무하며 정관계 인사 및 현지 중국계 커뮤니티 유력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

린다 쑨은 전임 앤드류 쿠오모 주지사 시절에는 비서실장(선임보좌관)까지 승진했고, 후임 호컬 주지사 밑에서는 약 15개월 일했다. 2023년까지 노동부 부국장으로 재임했으나 비리 행위가 들통나 그해 3월 해고됐다. 해고 이후에도 노동부 부국장을 사칭해 지역사회 활동을 벌인 의혹을 받고 있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데니스 와일더 미 조지타운대 월시 외교대학원 교수는 5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것(린다 쑨 사건)은 중국 국가안전부의 전형적인 공작”이라고 평가했다.

와일더 교수는 “그들은 중국과 다양한 관계가 맺고 있는 미국 귀화 시민권자를 찾는다”며 “중국어를 사용하고 중국에 가족이 있으며, 중국에서 사업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린다 쑨은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 위반(간첩 혐의), 비자 사기, 외국인 밀입국 방조 및 돈세탁 혐의로 기소됐다. 또한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 크리스 후 역시 돈세탁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검찰은 린다 쑨이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 관리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남편을 통해 거액의 경제적 이익과 기타 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건은 지난달 중국 정보기관에 정보를 넘긴 혐의로 체포된 탕위안쥔, 민주화 운동가로 위장한 왕수쥔에 이은 세 번째 중국 공산당 간첩 사건이다. 특히 앞선 두 인물이 민간인 신분이었다면, 린다 쑨은 정부 고위직으로 일했다는 점에서 파급력에 차이가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학자 우쭤라이는 “연이은 중국 공산당 간첩 체포는 미국 정부가 대선에 개입하지 말라고 중국에 보내는 경고”라며 “이번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의 주지사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경종을 미국 사회에 울렸다”고 분석했다.

한편, 린다 쑨은 지난 3일 15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으며 남편 크리스 후도 같은 날 보석금 50만 달러를 내로 석방됐다. 이들의 다음 법정 출두는 9월 2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