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28년째 北주민 돕는 벽안의 인권운동가 팀 피터스

정향매
2024년 08월 23일 오후 2:28 업데이트: 2024년 08월 23일 오후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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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 지원용 ‘씨앗 소분’ 봉사 활동 기자 체험기
전쟁 물자 아닌 재배용…조선족 통해 중국 거쳐 반입

서울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삼각지역. 노포(老鋪)들이 가득한 뒷골목에 ‘DL갤러리’라 쓰인 고색창연한 간판을 단 허름한 점포가 있다. ‘갤러리’라 하기에는 초라하고 일반 점포라 하기에는 특이한 곳이다. 운영하는 이는 벽안(碧眼)의 이방인 팀 피터스(Tim Peters) 씨다.

이곳에서는 매주 화요일 저녁 특별한 모임이 열린다. 참가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문은 열려 있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 8월 13일 모임 주제는 씨앗 포장이었다. 피터스 씨가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포장할 것은 메밀 씨앗입니다. 티스푼으로 퍼서 적정량의 씨앗을 미니 지퍼백에 넣은 후 지퍼백을 잘 닫아 주시면 돼요. 밀봉되도록 지퍼를 꼼꼼하게 눌러주는 걸 잊지 마시고요. 씨앗을 북한에 보내면 언젠가 그곳 주민 밥상에는 건강에도 좋고 한 끼로 든든한 메밀밥이 차려질 겁니다.”

이날 모임에는 ‘신참내기’ 에포크타임스 기자 3인을 비롯해 서울 주재 외신 기자,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북한이 고향인 북한인권활동가, 북한이탈청년, 한국 직장인 등이 오밀조밀 모여 북한으로 보낼 메밀 씨앗 포장을 했다. 2시간 여 포장 작업을 하는 동안 각기 다른 성장 배경, 직업을 소개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 다른 국적, 배경, 직업을 가진 이들이 ‘북한 주민 배고픔 해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는 공동 목표하에 하나가 됐다. 포장된 씨앗는 개인, 민간단체를 통해 북한 주민 손에 전달된다.

이색적인 이 모임의 이름은 ‘카타콤(Catacomb)’이다. 고대 로마제국 지하 묘지가 연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박해받던 기독교 신자들의 비밀 회합 장소이기도 하다. 고전 영화 ‘쿠오바디스’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피터스 씨는 북한 정권하 박해·탄압 희생자와 함께하는 카타콤 모임을 연다.

올해 74세의 팀 피터스 씨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냈다. 고향은 미시간주다. 미시간주립대(Michigan State University)에 입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은 68혁명 여파가 대학가에 남아 있을 때였다. 베트남전쟁 반전 운동도 있었다. 그 시절 그는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 남미 각국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 1975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해 한국 여성 김선미 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피터스 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제4공화국 유신 정권하였다. 이른바 ‘개발독재’로 불리는 군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후퇴했었다. 피터스 씨는 자연스럽게 한국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이른바 반체제 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는 공안 당국의 이목을 끌게 됐고 추방으로 이어졌다. 이후 재입국과 추방을 반복했다. 그사이 한국은 1980년대를 넘어 1990년대에 진입했고 민주화도 이뤘다.

피터스 씨가 한반도 남쪽이 아닌 북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5년이다. 당시 가족과 일본 고베(神戸)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1월,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하여 고베 일대가 초토화됐다. 그도 동료들과 더불어 복구 활동에 힘을 쏟았다. 와중에 북한 기아 소식을 접했다. 훗날 ‘고난의 행군’으로 기록된 북한 대기근 대량 아사의 전조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버니 크리셔 ‘뉴스위크’ 도쿄 지국장의 북한 식량난 관련 특강을 들었다. 이후 그는 매달 1톤의 식량을 북한을 보내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 톤(Ton a Month) 클럽’을 만들었다. 1996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식량을 보냈다. 중국산 옥수수 1톤이 미화 200달러인 시절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북한으로 식량을 보냈다. 오늘날 씨앗 보내기 운동의 시발점이다.

한국인도 아닌 이방인이 한국인도 쉽지 않은 일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터스 씨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북한에 씨앗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식량을 보낸 것으로 압니다.
“북한 식량난 때문입니다”라며 팀 피터스 씨는 지난날을 회고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북한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근 조짐도 보인다’는 외신을 접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는 북한 주민을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1996년 무렵부터 식량, 물품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북·중 접경지대에 직접 가서 누룽지를 만들어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누룽지는 식품 냉장 설비가 부족한 환경에 적합하죠. 식사 대용으로도 훌륭하고요.” 처음 누룽지를 북한에 보내다 씨앗으로 바꾼 것은 아픈 경험 때문이다. 대량의 누룽지를 운반하다 북한 관계자들에게 압수당한 적이 있다. “식량난 속에서 북한 당국은 10~20톤 규모의 적지 않은 물자가 외부에서 반입된다는 소식을 접하면 압수하려 들었습니다. 최고 엘리트 계층이나 군대에 분배하려는 것이죠. 식량이나 물자를 소분해서 여러 차례 보내면 감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산탄총을 쏘면 탄환 하나에서 여러 파편이 쏟아져 나오는 이치입니다.”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은 피터스 씨는 약 8년 전부터는 옥수수·완두콩·토마토·양배추 씨앗을 소분해 북한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각종 씨앗은 다수 북한 가정에 쉽게 나눠줄 수 있도록 아주 작게 개별 포장하여 전달합니다. 설령 운반 과정에서 압수당해도 운반책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씨앗 전달은 전쟁이나 스파이 활동과 전혀 무관한 일이니까요.” 지난해 3월, 스위스 제네바 소재 비정부기구 ACAPS(The Assessment Capacities Project)가 발간한 보고서는 “2019~2021년 북한 인구의 약 42%가 영양실조를 겪었으며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약 1천100만 명이 식량 불안정 상태에 처했었다”고 지적했다.

팀 피터스 씨가 북한에 보낸 씨앗 샘플 사진.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북한에 보내는 씨앗 품종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요?
“북한에서 재배하기에 적합한 씨앗을 선택합니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평균 기온이 낮기 때문에 벼를 재배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옥수수가 상대적으로 잘 자라죠. 북한 동북부 지역이 특히 그러합니다. 다만 한반도 전체 생육 환경을 고려할 때 남한에서 생장하는 다수 식물은 북한에서도 재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팀은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하여 저렴하지만 영양분은 풍부한 채소 씨앗을 고릅니다. 시금치, 양배추, 무 등 한국인의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채들이 해당합니다. 근래에는 대두 씨앗도 포함했습니다.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북한 주민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씨앗은 한국 종묘 시장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는 어떻게 씨앗을 반입하나요?
“조선족(중국 동포)을 주로 활용합니다. 북·중 접경 지역에는 한국계 중국인 약 190만 명이 거주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에 친척이 있기에 북한 출입도 비교적 용이합니다. 반면 중국에 친척을 둔 북한 주민이 중국을 드나들기도 합니다.” 팀 피터스 씨는 또 다른 루트는 ‘교회’라고 했다. “때때로 북·중 접경 지역의 가정교회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시 씨앗을 국경을 넘나드는 조선족, 북한 주민 등 인편으로 북한에 반입하고요.” 그는 ‘제도화된’ 방법으로 반입하는 루트도 있으나 ‘영업 기밀’이라며 말을 아꼈다.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씨앗을 전해 받은 북한 주민 반응이 궁금합니다.
“북한 주민의 피드백을 자주 전해 듣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한 피터슨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물기는 하지만 때때로 씨앗을 전해 받은 북한 주민들이 기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로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서죠.” 그는 올해 5월, 씨앗을 전해 받은 북한 주민의 편지 한 통을 받고서 놀랐다고 했다. “북한 주민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보안 문제 때문에 원본은 보지 못하고 영어 번역본을 전해 받았습니다. ‘전달받은 씨앗을 텃밭에 심어 야채, 과일을 수확할 수 있어서 아주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저희는 과일 씨앗을 보낸 적은 없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토마토 씨앗을 보낸 적은 있더군요. 토마토를 북한에서는 야채가 아닌 과일로 분류하는 듯하네요.” 피터스 씨는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하며 미소 지었다.

북한 주민이 팀 피터스 씨에게 보낸 방울 토마토 사진.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세요?
“북한 주민의 감사 메시지를 전해 받을 때마다 과녁을 적중한 기분이 듭니다. 검열이 삼엄한 북한에 지원 물자가 전달됐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니까요. 북한을 직접 방문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북한 주민을 향한 관심을 표시하고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기독교인 관점에서 볼 때 북한에 보내진 물자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 그 이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이,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는 생존에 필수적인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북한 주민은 씨앗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주님이 그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터스 씨는 때때로 자신이 받은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며 말했다. “‘성경’에는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나 똑같이 선함을 베푼다. 주님의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춘다.’ 주님의 뜻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감사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는 사람도 도와주려 합니다. 언젠가 그들이 회심하여 우리가 왜 도움을 줬는지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요.”

북한 주민을 위해 한국인도 쉽지 않은 일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 인간으로서 북한 주민에게 연민(憐憫)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보다 중국 여행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중국에서 북한 주민을 직접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의 왜소한 외양에 깜짝 놀랐고요. 당시 북한 주민 한 세대 전체가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기에 정상 성인의 키만큼 자라지 못했습니다. 이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받은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고 왜소한 북한 주민의 참상에 충격받았다는 피터스 씨는 또 다른 안타까움에 대해서 말을 이어갔다. “북한 주민은 언론·집회·신앙의 자유도 박탈당했습니다. 저는 이를 보면서 ‘상황을 절대 외면해선 안 된다.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현재 활동을 지속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피터스 씨는 현실상의 고충도 토로했다. 본인의 건강 문제다. “올해 74세인 저는 사실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내일도 병원에 가서 CT(컴퓨터 단층 촬영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합니다.” 노령과 건강 문제에도 북한 주민 돕기 사업을 지속하고 싶다는 피터슨 씨는 대를 잇는 문제도 중요하다고 했다. “언젠가 청년들에게 일을 물려 주고 싶어요.  단지 우리 모임에 가입시키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음 세대의 마음속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작은 불씨를 지피고자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안타깝게도 서울에서 불과 60km 정도 떨어진 휴전선 이북 주민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 청년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북한 주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매주 화요일 카타콤 모임을 여는 근본 목적입니다.”

기독교 인권 활동가 팀 피터스 씨의 공식 직함은 헬핑핸즈코리아(Helping Hands Korea·HHK) 대표다. HHK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돕고, 북한이탈주민 어린이를 돕는 활동을 주로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 만남에서 듣기로 했다.  (계속)

* 최창근 기자가 기사 작성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