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한 교향곡의 거장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현악 실내악곡 등 다양한 곡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오페라를 완성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 당시 오페라는 고품격 예술 장르이자 큰 사업이었기에 그는 상업적·예술적 성공을 동시에 이루길 꿈꿨다.
1805년에 초연된 오페라 ‘피델리오’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오페라 작품이다. 단 하나뿐인 오페라지만, 이 작품은 최고의 걸작이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피델리오
1804년,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하던 베토벤은 교향곡 3번 ‘영웅’을 완성하며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오페라 극장 감독들은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다.
피델리오는 그의 뛰어난 음악성과 극적인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오페라는 음모와 사랑, 정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 결국 사랑이 승리하고 정의가 실현된다는 주제를 담은 이 작품은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대본을 쓴 요제프 존라이트너는 프랑스의 작가 장-니콜라스 부일리의 오페라 ‘레오노레(Léonore, 부부애)’를 각색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음악적 독창성
오페라의 내용은 독창적이지 않지만, 베토벤은 이 사랑 이야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정적 깊이와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결혼생활을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감정에 대한 이해도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 전달에 극적인 효과를 부여하기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이 오페라에 쓰인 관현악 편곡은 그의 교향곡 작품과 유사하다. 감정을 섬세하게 극대화해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또한 그 이전의 작곡가들은 주로 관현악단의 연주를 성악곡의 반주로만 사용했지만, 그는 이야기 전개의 필수 요소로 활용했다. 그는 다양한 캐릭터 이해와 주제 전달을 위해 라이트 모티프[인물이나 사물의 특정한 감정을 상징하는 동기(動機), 곡 중에서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극의 진행을 암시한다]를 도입했다. 이는 훗날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피델리오에서는 주인공 플로레스탄의 고통을 서글픈 바이올린 선율로 표현하고 그의 아내 레오노레의 결연한 의지는 프렌치 호른으로 묘사했다.
오페라 ‘피델리오’의 공연
베토벤은 피델리오 공연 지휘봉을 단 세 번만 잡을 수 있었다. 초연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한 직후인 1805년 11월 진행됐다. 빈의 시민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당시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프랑스 군인들이 관객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관객에 실망한 베토벤은 공연 이후 모든 일정을 철회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세계에 있어 고집이 세고 난폭한 사람이었다. 그의 몇몇 동료들은 피델리오의 상영시간이 너무 길다며 악보 수정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세게 반발하며 의견을 모두 묵살했다. 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모리츠 리히노프스키 공작(1771~1814)의 설득으로 결국 오페라를 3막에서 2막으로 줄였다. 또한 그는 1806년 두 번째 공연을 앞두고 곡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듭 수정을 이어가다 결국 리허설을 단 한 번만 진행한 채 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공연은 비교적 나은 성적을 거뒀고, 관계자들은 흥행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돌연 오페라 철회를 선언했다. 연출가에 대한 불신과 오페라 저작권을 탈취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오페라의 부흥과 비극
이후 1814년 오페라는 부활해 세 번째 공연이 열렸다. 이번 공연에서 베토벤은 서곡을 작곡해 공연에 추가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1822년, 피델리오는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다. 당시 베토벤은 청각 장애가 이미 심각한 상태였고, 음악을 들을 수 없어 지휘를 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는 직접 공연을 지휘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동료 음악가들은 그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지휘를 맡기로 결정했다. 리허설 도중 그는 현 상태로서는 도무지 관현악단과 단원들을 조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슬픔에 젖어 지휘봉을 내려놓고 무대를 떠났다.
단 하나의 걸작
베토벤은 남은 생애 동안 또 다른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곡을 붙이기에 만족할 만한 대본을 찾지 못했고 결국 그의 오페라는 단 하나만 탄생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 ‘오페라의 표준’으로 언급되며 계속 무대에 오르면서 베토벤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삶에는 청각 장애라는 비극이 있었지만, 그의 예술은 여전히 남아있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