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민진당 정부, 중정기념당 의장대 철수…장제스 지우기 본격화

“낡은 시대·권위주의 상징” VS “혼란기에 반공·항일 이끈 리더”
1996년 총통 직선제 복원 후 사상 첫 3연속 집권에 성공한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본격 나섰다. 중국국민당(국민당) 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장제스(蔣介石) 지우기’가 대표적이다.
로이터 통신, 대만 매체들은 “타이베이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장제스기념관) 홀(hall)에서 육·해·공군 의장대를 철수한다.”고 보도했다.
7월 12일 대만 행정원 문화부는 성명서를 통해 “중정기념당 홀 내 의식을 담당했던 의장대를 15일부터 철수하고 대신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옮겨 배치한다.”고 밝혔다. 문화부는 “개인숭배 철폐, 권위주의 숭배 종식을 현 단계에서 중정기념당의 ‘과도기적 정의’로 간주한다.”고 배경 설명했다. 1945년 대만 광복 이후 2000년 민진당이 집권할 때까지 이어진 ‘국민당 권위주의 체제’를 재정의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라는 설명이다. 추후 중정기념당 폐쇄도 시사했다.

장제스 전 총통의 중화민국 국민정부(國民政府)는 제2차 국공내전 패배 후 1949년 대만으로 천도했다. ‘국부천대(國府遷臺·국민정부 대만 파천)’이다.
그는 1975년 사망 시까지 종신 총통으로 ‘계엄령’하 대만을 통치했다. 1975~78년 재임한 옌자간(嚴家淦) 총통에 이어 장남 장징궈(蔣經國)가 1978~88년 총통에 재임하여 부자(父子) 권력 세습을 했다. 이후 본성인(本省人·대만 본토 출신) 첫 총통 리덩후이(李登輝) 재임기(1988~2000년) 대만지구 계엄령 해제,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 폐지, 총통 직선제 회복 등 민주화로 이행했다.
중정(中正)은 장제스의 본명이다. 1975년 장제스 사후 대만 정부는 추모 시설 건립을 계획했고 육군본부·헌병사령부가 소재하던 타이베이시 중정(中正)구 중산남(中山南)로 현 위치에 1976년 착공했다. 4년 공기(工期) 끝에 1980년 완공되어 그해 4월부터 대중에게 개방했다.

101빌딩, 국립고궁박물원과 더불어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서 본당(hall) 건물 높이는 70m에 달한다. 기념당 광장에서 본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89개, 장제스가 향년 89세로 타계한 것을 상징한다.
본당에는 장제스 좌상이 있는데 육·해·공군 의장대가 교대로 보초를 서고 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 정각에 8회에 걸쳐 교대식을 벌인다. 중정기념당 의장병과 교대식은 타이베이의 관광 명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국민당 장기 집권 종식 후 민진당 정부 들어 중정기념당은 지난날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으로 지목되며 우여곡절을 겪었다.
첫 민진당 출신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은 장제스를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규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07년 중정기념당을 ‘국립대만민주기념관(國立臺灣民主紀念館)’으로 개명하고, 지하 전시 시설을 폐쇄했다. 기념당 내 장제스 동상 옆에는 콜라주나 데칼코마니를 전시했다.
기념당 광장 입구의 패방(牌坊) 글귀도 장제스의 본명 중정(中正)의 유래인 ‘포부가 크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지극히 바르다’는 뜻을 담은 ‘대중지정(大中至正)’에서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교체했다. 한 해 전인 2006년에는 1979년 개장 이후 대만의 관문 역할을 해 오고 있는 중정(中正)국제공항이 소재지 지명을 따서 타오위안(桃園)국제공항으로 변경됐다.

2008년 3월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국민당 정부 출범 후 ‘국립대만민주기념관’을 원명인 ‘중정기념당’으로 환원하고 지하 전시실도 재개관했다. 다만 국제공항 명칭은 환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6년 출범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민진당 정부는 다시 ‘장제스 지우기’를 지속했다. 2018년 출범한 과도기사법위원회는 “장제스 전 총통은 반대파를 학살하고 인권 탄압을 자행한 독재자이다.”라는 요지의 결론을 내렸다. 그 연장선상에서 대만 전역의 장제스 동상 934개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 철거 작업은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했으나 현 라이칭더 정부 들어 속도를 내고 있다. 공식 취임 전 라이칭더 총통은 “남아있는 760여 점의 장제스 동상을 철거하고 매년 5월 19일을 ‘백색 공포 규탄의 날’로 지정하기로 했다. ‘백색공포(白色恐怖)’는 장제스 집권기 국민당 정부가 반대파에 자행한 테러를 의미한다.
이처럼 장제스 통치기는 진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 집권 민진당을 위시한 범록(泛綠·pan-green) 진영에서는 장제스를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로 평가한다. 그중 대만 현대사 최대 트라우마로 남은 1947년 2·28 사건에서 약 2만 명의 대만 본토 주민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
긍정적 평가도 있다. 우선 청나라가 많은 국가들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취소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맞선 장제스 덕분에 중국(중화민국)은 미국 영국과 동맹을 맺고 4대 연합국의 하나로 인정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불평등 조약들을 없앨 수 있었다.
2003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너선 펜비는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해 쓴 ‘장제스 평전’에서 장제스의 여러 가지 단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없었다면 중국은 20세기 전반기 군벌들의 군웅할거 속에 혼란을 맞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장제스가 이끌었던 중국의 강경한 항일전쟁이 없었더라면 연합군이 승리한 2차대전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으로 봤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고도화된 군대였던 80만 대군의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한 후진국 중국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연합군의 승리도 없었다는 것이다. 항일 전쟁은 대만 민중이 지금까지도 장제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제1야당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泛藍·pan-blue) 진영도 유사한 입장이다. 장제스의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만 군부는 장제스가 1924년 대만군의 뿌리인 황포군관학교(현 대만 육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학교가 1950년 대만에서 재개교(在臺復校)할 때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차이잉원 정부에서 국방부장(장관)을 맡았던 추궈정(邱國正) 대만 국방부장은 “장제스를 기리는 건 군사적 전통이며 군 기지 내에 있는 장제스 동상은 사유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혀 일방적인 장제스 동상 철거 반대했다.

민진당 정부의 ‘장제스 지우기’는 논란을 일으켜왔다. 타이베이 국립정치대(國立政治大) 교내 장제스 동상이 대표적이다.
지난날 국립정치대에는 2개의 장제스 동상이 존재했다. 중앙도서관인 ‘중정(中正)도서관’의 좌상과 학교 후문의 기마상이었다. 2000년 민진당 정부 출범 후 동상의 수난은 지속됐다. 수차례 페인트 세례를 받았고 기마상은 말다리가 훼손되기도 했다. 논란 끝에 중앙도서관의 좌상은 2018년 철거됐다.
국립정치대는 1927년 중국에서 개교한 중국국민당 중앙당무학교(中央黨務學校)가 모체이다. 국민당 당·정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일종의 사관학교였다. 장제스 총통이 교장을 겸했다.
이에 “정치적 평가를 떠나 학교 역사상 중요 인물을 기리는 동상 존치 문제를 두고서 정치권이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