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아버지’를 더욱 빛낸 힘…하이든과 귀족 가문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4년 07월 8일 오후 12:06 업데이트: 2024년 07월 8일 오후 7:32
P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악성(樂聖)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그에게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 그에 대한 동료 예술가들의 평가는 엇갈렸지만, 어떤 견해도 음악의 거장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했다.

하이든은 100곡이 넘는 교향곡과 70곡가량의 현악 사중주곡을 남겨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빈 고전주의 음악을 개척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바로크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를 이은 핵심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하이든은 천부적 재능 외에도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기반을 갖고 있었다. 헝가리 최고 귀족 가문인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이든의 재능이 이처럼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짝이는 재능을 보이다

‘요제프 하이든의 초상’(1791), 토마드 하디 | 퍼블릭 도메인

오스트리아 로라우 지방에서 태어난 하이든은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차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겸손하며 꾸밈없는 성품을 자랑했다.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자 교사였던 게오르그 아우구스트 폰 그리싱어(1769~1845)는 하이든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그의 전기를 출판했다. 책에서 그는 하이든의 성품에 대해 ‘신중하며 조용하고 중후함을 지녔다’라고 표현했다.

하이든은 변성기 이전까지 합창단원·바이올리니스트로 교육받았다. 이후 그는 프리랜서 음악 연주자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동시에 그는 작곡을 배우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에스테르하지 가문

폴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초상화 | 퍼블릭 도메인

1761년, 29세의 하이든은 헝가리 명문가의 일원이 됐다. 음악 애호가였던 폴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음악에 매료됐다.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본 후작은 자신이 운영하는 관현악단의 새로운 부악장으로 하이든을 고용했다. 후작은 고용 계약서에 하이든에 대한 기대를 한껏 담아냈다.

계약서에는 ‘하이든은 후작이 명령하는 음악을 작곡할 의무가 있으며, 이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과 ‘하이든은 매일 정오 전후로 집무실에 출석해 후작이 관현악단 연주를 들을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라’는 조항이 포함됐다.

하이든은 이전의 생활과는 다르게 엄격한 규율과 빠듯한 일정을 수행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수입이 불안정해 힘들었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났기에 궁정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에스테르하지 궁전의 전경 | 퍼블릭 도메인

그가 궁정에 입성한 지 1년 후, 폴 안톤 후작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니콜라우스가 새로운 후작이 되면서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 지역에 에스테르하지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작은 베르사유’라는 별칭을 지닌 이 궁전은 헝가리의 보석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곳은 도심과는 거리가 멀고, 늪지 위에 지어져 환경이 좋지 않았다. 여름에는 모기가 창궐하고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이런 기후 때문에 하이든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주 질병에 시달렸다.

궁전의 입지는 좋지 않았지만, 니콜라우스 후작은 궁전 건축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4년 동안 그는 정원과 사냥터, 폭포, 온실, 동물원 등을 건설했다. 궁전에는 100개 이상의 객실과 도서관, 미술관이 설립됐다.

에스테르하지 궁전 내부 음악 살롱의 전경 | 퍼블릭 도메인

니콜라우스는 형 폴 안톤만큼 음악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하이든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자 궁정 내부에 예배당과 400석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 극장을 지었다. 궁전이 완공되던 해인 1766년, 관현악단의 악장이 사망하고 하이든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이든은 예배당을 위한 신성한 미사곡, 극장을 위한 24개의 오페라, 음악실을 위한 교향곡과 실내악 등 각 장소에 맞는 수많은 음악을 작곡했다.

작곡에 대한 고뇌

하이든은 그리싱어와 주고받은 편지에 에스테르하지 궁전에서 생활이 자신의 작곡에 미친 영향에 관해 설명했다.

“내 고용주는 내 모든 작품에 만족하며 승인했다. 또한 관현악단의 악장으로서 음악적 실험을 진행하며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지 관찰해 개선하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며 나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이가 없기에 독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궁전에는 전문 연주자로 구성된 관현악단이 있었기에 그는 언제든 책상을 떠나 다양한 악기로 음악적 실험을 바로 수행할 수 있었다. 궁전은 당시 음악의 중심지인 빈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궁전에서 종종 방문객을 맞이해 음악적 교류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립된 생활은 하이든뿐만 아니라 교향악단원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당시 후작은 고용인들 휴가를 보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이든은 향수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단원들을 위해 교향곡 45번 ‘작별’을 발표했다. 그는 이 곡에 후작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아 자신과 단원들의 마음을 전했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연주하던 악기들이 하나씩 연주를 멈춘다. 하이든은 이 곡의 초연 당시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악보를 들고 무대를 떠나라고 지시했다. 음악의 끝에는 바이올린 두 대만이 남고 곡이 마무리된다. 이에 후작은 단원과 하이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휴가를 명했다고 전해진다.

참된 사랑을 전한 말년

1790년, 니콜라우스 후작이 사망한 뒤 그의 후계자 니콜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사치로 인한 막대한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예술에 쏟던 비용을 절감했다. 이에 하이든은 궁전을 떠나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 주는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모차르트는 그에게 “큰 세상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고, 언어 또한 큰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걱정을 전했다. 그러나 하이든은 “내 언어(음악)는 전 세계가 이해한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런던으로 떠난 하이든은 말년에 ‘천지창조’를 비롯한 많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많은 음악 애호가는 그의 음악에 열광했고 영국에 남아 계속 음악 활동을 펼치길 바랐다. 하지만 하이든은 1795년, 다시 헝가리로 돌아가 니콜라우스 2세의 악장 자리를 다시 맡았다. 노환으로 고생하던 그는 1803년에 결국 작곡을 중단했고, 6년 후 생을 마감했다. 말년에 그는 그동안 비축해 둔 재산을 빈민가와 학생, 고아 등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며 사랑을 전했다.

그리싱어는 “그의 화음과 음악은 먼 곳의 국가에서 독일의 예술적 명예를 높이는 데 더 많이 기여했다”는 말로 국가가 입은 손실이 얼마나 큰지를 요약했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