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中 관영매체 기자가 방송 제작 개입” 의혹에 조사 착수

2024년 07월 03일 오전 11:59

“정치 토크쇼 게스트 찾아가 ‘토론 방향성’ 조언도” 대만 매체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 소속 중국인 기자가 대만 현지 방송의 정치 토크쇼 내용을 조작하려 했다는 의혹에 대해 대만 정부가 조사에 착수했다.

대만의 중국 본토 담당 기구인 대륙위원회의 량원제 대변인은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신화통신 중국인 기자 A씨의 대만 내 활동에 관한 조사가 문화부, 대만 국가통신위원회 등 다수 기관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량 대변인은 A씨가 지난 2월 대만에 도착해 5월에 떠났다면서, 당국은 A씨의 발언이나 활동을 제약하지 않았으며 대만 출국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만 입국이 허용된 중국인에게는 대만의 주권을 해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있다”고 덧붙였다.

A기자가 대만 파견 석 달 만에 본토로 돌아간 것에 대만 정부의 영향이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사건은 지난 25일 대만 유력 일간지 ‘자유시보’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하면서 처음 수면 위에 떠올랐다.

신문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 산하 대만 전담 기구인 ‘대만사무판공실’은 중국인 기자들을 시사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대만 현지 방송국 여러 곳에 제안했다. 본토와 관련된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대만 방송국 한 곳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신화통신의 대만 특파원인 자오보(趙博) 기자가 해당 방송국의 신규 시사 프로그램(정치 토크쇼)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자오 기자가 처음 제작 현장에 나타났을 때, 방송 제작진은 그를 협력사 직원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자오 기자가 특정한 견해를 제시하고, 방송이 각본대로 진행되는지 미리 준비된 제목과 화면 특수효과가 사용되는지 등을 확인하고 심지어 토크쇼 게스트들에게 접근해 자신이 원하는 토론 내용을 ‘귀띔’해주는 등 프로그램 방향성까지 좌우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현장 분위기가 싸해졌다.

결국 제작진이 회사 임원들에게 찾아가 항의했고 임원들이 사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오 기자가 단순한 협력사 직원이 아니라 신화통신의 대만 특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중국 관영 매체 특파원이 대만의 방송 제작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현지 방송계에 퍼졌고 자오 기자는 황급히 대만을 떠났다는 게 자유시보가 밝힌 사건의 전말이다. 다만, 자오 기자가 량 대변인이 지목한 A씨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의 글로벌 영향력 작전

대만 국가통신위원회는 중국 측 제안을 받아들인 대만 방송국이 ‘위성방송법’ 27조를 위반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다. 이 조항은 관련법이나 금지조항을 위반한 방송 프로그램, 광고의 제작 및 송출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같은 법 48조에 따라 최대 200만 대만달러(약 8500만원) 벌금을 부과하고 해당 업체에 프로그램 또는 광고 송출 중단을 명령할 수 있다.

대만 집권 민진당은 이번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국회 외교 및 국방위원회에 소속된 민진당 왕딩위(王定宇) 의원은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만 정부에 신화통신의 대만 특파원 파견을 불허하고 이번 사건을 안보 사안으로 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왕 의원은 “중국 신화통신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선전부 직속 기관이자 중국 공산당 산하 기관”이라며 “대만의 지방 방송국이 이 기관과 협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위법행위”라고 말했다.

국제 인권 단체와 안보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서방 사회의 개방성을 악용해 선전, 허위 정보, 검열 등의 수법으로 현지 방송·언론 콘텐츠를 조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비정부기구인 ‘프리덤하우스’는 중국의 글로벌 미디어 영향력에 대한 2022년 보고서를 통해 조사 대상 30개국 중 16개국이 중국의 미디어 영향력이 “높음” 또는 “매우 높음”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대만은 매우 높음에 속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대만 언론인에게 해외여행을 제공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콘텐츠를 다루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가하고 있다. 또한 각국 현지 언론과 은밀한 협력관계를 체결하고 있다.

프리덤하우스는 “중국 정부가 제작한 콘텐츠의 유통은 규제 대상이지만 광범위한 유료 광고나 공동 제작 또는 콘텐츠 공유 등을 통해 현지 미디어에 정기적으로 게재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콘텐츠는 중국 국가기관의 제작물, 제작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 명확히 표시되지 않는다”며 “독립적으로 제작된 뉴스, 방송 프로그램, 영상물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중국 관영매체 관계자가 단순히 언론 및 취재활동만 벌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의혹이 대만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이 운영하는 신화망은 지난 2015년 한국어 채널 개설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매체를 운영해왔다. 서울에서 중국 비밀경찰서를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 왕하이쥔(王海軍·왕해군) 전 중화국제문화교류협회장은 신화망 한국 채널의 총경리(사장)를 맡아 국내 언론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현재 서울외신기자클럽에는 신화통신 특파원 6명이 가입, 활동 중이다.

또 다른 중국 관영매체인 인민일보의 인터넷판은 인민망 역시 한국어판을 개설했다. 시진핑의 행보를 세세히 보도한 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인민망 한국어판 운영사인 피플닷컴 코리아는 저우위보(周玉波)가 대표로 재직 중이며 그녀는 강원도 대규모 차이나타운 건설과 관련한 ‘여간첩’ 의혹이 국내에서 불거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