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다른 시각…“본질은 가난”

박순종 객원기자
2024년 06월 25일 오후 3:12 업데이트: 2024년 06월 27일 오후 6:44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일 간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 육군이 위안부를 충원했으며 강제연행이 이뤄졌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지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연히 이 판에 발을 들였는데, 이 일을 벌써 6년째 하고 있네요.”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金柄憲) 씨는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으로 향한다. 지난 2019년 처음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마이크를 잡은 김 씨는 1992년 이래 이어져 온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끝장내겠다는 각오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군이 조선인 10대 소녀를 20만 명이나 강제로 연행해서 전장(戰場)의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소설에 불과하죠.”

그의 동료들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맞불을 놓는 형식으로 ‘반(反)수요시위 집회’를 열자며 김 씨를 끌여들였을 때 김 씨는 ‘단발성 이벤트’로 단순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거리에서 마이크를 손에 쥐어 보고 ‘정의기억연대’의 주장을 들여다보고 또 검토하고 연구해 보면 볼수록 김 씨는 ‘수요시위’를 반드시 중단시켜야겠다는 전의(戰意)가 불타올랐다.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

김 씨는 원래 한문학자다. 김 씨의 저서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한자·한문 교재도 있다. 지금은 좌익 진영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맞선 투사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가 하던 일은 중·고등학교 검정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한문을 좀 알다 보니 고문서를 다룰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1차 사료(史料)와 교과서상 기술을 비교·분석하는 일을 하게 됐지요. 특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오류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배우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교과서 비평을 하게 됐죠. 성과도 많았습니다. 제가 문제를 제기해서 교과서 내용 여러 곳이 수정됐어요.”

김 씨가 처음 역사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대법원의 2018년 조선인 징용공 관련 판결과 관련해 이우연(李宇衍)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의 주도로 결성된 ‘반일동상반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개항기부터 식민지기에 걸쳐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많이 봐 왔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당시 일본제국 내에서 제도로써 정착된 공창(公娼)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개전에 따라 전선으로 옮겨간 데 불과한 것인데, 좌익 진영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걸 그 때 알게 됐어요. 참 황당했죠.”

그러면서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가난’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그 전신(前身)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시절인 19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소위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해 왔는데, 김 씨는 ‘위안부 증언집’ 모두를 분석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2007년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간 이용수(李容洙) 씨는 그 자리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내 등에 뾰족한 것을 대고 입을 막고서는 날 끌고 갔다’고 말했지만, 1993년 출판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군(軍) 위안부들>에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집에 알리지도 않고 선뜻 따라나섰다’고 돼 있어요. 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른 증언을 한 셈입니다.”

“이 씨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길원옥 씨의 경우 두 번 매춘에 나섰다고 해요. 처음 매춘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빚 때문이었고 두 번째 매춘 역시 친구들과 함께 돈 벌러 간 것이라고 길 씨는 진술했습니다. 길 씨의 어머니는 길 씨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고 해요. 이 밖에도 ‘증언집’을 보면 자신을 업소에 팔아넘긴 부모를 원망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 씨가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2.6 | 박순종 객원기자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불법…편파적 경찰도 문제”

2019년 12월4일 이래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대한 ‘맞불 집회’는 중단 없이 6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김 씨는 이 ‘맞불 집회’가 경찰의 갖은 방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관할 경찰서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애초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기수 변호사가 우리 모임을 대표해 경찰서에 집회 신고서를 냈는데, 당시 종로서 집회 신고 접수 담당이었던 강평준 경사는 ‘정의기억연대도 집회를 하지 못해 문화제로 행사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집회를 개최하고자 한 장소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집회 개최 금지 구역이라며 집회 신고를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보니 ‘정의기억연대’는 2017년 10월부터 집회신고서를 종로서에 제출했고 종로서는 이를 수리해 온 것 아니겠습니까? 경찰이 ‘수요시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죠.”

서울 종로경찰서의 ‘맞불 집회’에 대한 방해 공작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른바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그사이 자유·우파 시민단체 ‘자유연대’가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 선순위 집회 신고를 내면서 ‘정의기억연대’는 28년 만에 ‘수요시위’ 집회 장소를 내어주고 쫓겨났다. 하지만 ‘맞불 집회’ 측이 온전히 집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선순위 집회 신고 단체의 동의 없이는 집회 장소를 분할한다거나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경찰은 ‘상호 상반되는 성격의 단체 간 충돌’을 핑계로 ‘행정지도’를 하겠다며 우리 집회 장소를 갈라서 ‘평화의 소녀상’ 앞은 저들에게 내어주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우리가 집회를 하는 게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핵심 요건인데, 그걸 못 하게 방해하고 있는 거죠. 경찰에 항의를 하면 경찰 측은 ‘당신네 집회 참가자 수가 적지 않은가’라고 반문을 해요. 그렇다고 ‘우리 집회 참가자 수가 얼마가 되면 우리가 신고한 장소에서 온전히 집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도 경찰은 대답을 못 해요.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점령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와 관련해 김 씨는 ‘정의기억연대’의 편을 들고 있는 정치 세력이 경찰 조직에 입김을 넣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길고 지난한 싸움…결국 진실이 이길 것”

대학교 학부 수업 도중 학생과의 토론 과정에서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2020년 재판에 넘겨진 류석춘 전(前) 연세대학교 교수에 대해 류 전 교수 사건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1단독 정금영 판사는 해당 발언이 ‘학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기억연대’ 측은 해당 판결이 “반인권적 판결”이라며 반발했지만 김 씨는 판결에 큰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제연행’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고 박유하 전 세종대학교 교수의 대법원 판결 취지를 좇아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무죄를 선고하기는 했지만 사법부가 결정적으로 ‘진실’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류 전 교수 재판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일본군 위안부’가 실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음을 입증해야 하는 검찰 측이 소위 ‘강제연행’ 사실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류 전 교수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갔느냐 끌고 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당시 사회적 상황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어요. 결국 ‘구조적 강제’를 말한 것인데, 오늘날 대부분의 회사원들도 모두가 진정 원해서 회사에 나가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노예’라는 주장과 같은 논리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구조적 강제’를 처음 주장하고 나온 인물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인데, 요시미 교수의 해당 주장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궤변’이지요.”

반대자들의 중단 없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는 여전히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지난 5년간 ‘반(反)정의기억연대’ 투쟁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처음 거리로 나섰을 땐 사실 많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의 여론을 보면 우리 주장이 많이 알려진 데다가 우리 주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