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96세 현역 과학자 “과학 인재 키우는 풍토·정책 마련해야”

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전 서울대 총장·전 교육부 장관)

이윤정
2024년 06월 22일 오후 5:54 업데이트: 2024년 06월 23일 오전 7:29

“욕심 내지 않는 게 건강 비결”
국제백신연구소, 값싼 백신 개발로 개도국 보건 증진에 앞장
과학기술유공자 1호 명패 헌정,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수상
“우리는 위기를 기회 삼은 슬기로운 민족…희망 버려선 안 돼”

서울대 교수-서울대 총장-교육부 장관-국제백신연구소(IVI) 상임고문. 설랑(雪浪) 조완규 박사가 맡았던 직책 중 일부다. 한국 생물학의 대부로 불리는 조 박사는 한국 과학계 원로이자 우리나라 과학 기술 발전 도약기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928년생, 올해 만 나이로 96세인 그는 매일 아침 서울대 관악 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1946년 서울대에 입학, 4년간의 외국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 약 80년간 서울대 땅을 밟으며 평생 한국 과학계 발전에 헌신해 왔다.

조 상임고문은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대 서울대 총장(1987~1991)을 지냈고, 노태우 정부 시절 32대 교육부 장관으로 봉직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한국 생물과학협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명예총장 등을 맡고 있다.

조 상임고문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과학기술발전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6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30명의 석사와 18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총 11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40년 전, 그의 호를 따 ‘설랑 동문회’를 조직한 그의 제자들은 현재 국내외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연구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17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고, 지난해 그의 집무실에 명패가 헌정됐다. 작년 10월 서울대 개교기념식에선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국제백신연구소 외관 전경. 조 상임고문은 “설립 협정에 서명한 40여 개국의 국기”라고 설명하며 “여긴 한국 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지금도 하루 평균 1만 보를 걷는 등 96세 나이가 무색하게 노익장을 과시하며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 상임고문을 지난 20일 국제백신연구소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한 세기에 이르는 삶의 발자취를 듣고 이야기를 나눴다.

-대법원장을 지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지 않고 평생 과학자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당시 한국의 생물학은 여명기로 알려져 있는데 신생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신 동기는 무엇인가요?

“그 당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라 아버지는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의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저는 의사가 싫었어요. 서울대 문리과대학 예과부를 거친 후 신설 학과인 생물학과로 진학해 당시로선 첨단 분야인 세포학을 전공했습니다. 처음엔 화학과를 희망했는데 예과생 200명 가운데 90여 명이 지원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경쟁률이 낮고 화학 과목도 청강할 수 있는 생물학과를 택한 겁니다. 새로운 분야라 제가 개척할 수 있었고, 국제백신연구소 설립에도 기여했으니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서울대 연구 환경은 열악했다. 교수는 두 명, 실습용 장비라곤 학생용 현미경 3대와 정온기뿐이었다. 그가 3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동급 학생들 대부분이 군 입대, 월북 혹은 행방불명됐다. 결국 1952년 조 상임고문 혼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생물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은 후에도 연구용 기자재 불비 등 열악한 연구 여건으로 인해 종이와 연필로만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출생성비’ 관련 분야를 연구 주제로 택했습니다.” 이 연구는 그가 발생생물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이후 유학 등 본격적 연구를 통해 기초생물학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지난해 국제백신연구소(IVI) 그의 사무실 문에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명패가 부착됐다. 과학기술유공자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현저한 사람을 예우하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총 82명이 선정됐다. 과학기술유공자 명패 헌정 사업은 과학기술유공자 예우 강화를 위해 지난 ‘2021년 제정된 ‘과학기술유공자 예우에 관한 규정(대통령훈령 제440호)’에 따라 지난해부터 시행됐다. 유공자 가운데 조 상임고문이 처음으로 명패를 받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3년 10월 30일, UN산하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IVI)에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명패 헌정식’을 개최하고 조완규 과학기술유공자회 회장 집무실에 첫 명패를 헌정했다. |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제공

-작년에 ‘제3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으셨죠. 소회를 말씀해 주세요.

“물론 영광이죠. 하지만 아직도 서울대에 신세를 지고 혜택을 입고 있는 저에게 상을 준다니 민망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시상 증서에 적힌 문구가 그의 일생을 압축해 보여준다. 증서에는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생물학의 여명기에 교수로 부임해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 자연과학대학 초대학장, 부총장, 총장직 재직 중, 대학 안전과 발전에 기여,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으로 한림원의 기틀 다지기, 그리고 국내 유일한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와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직으로 연구소 일을 지원하고 있으며 교육부 장관 역임 등 서울대학교 동문으로서 대학의 명예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기술돼 있다.

-교육행정 경험도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화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던 1966년, 학생과장 임명 통고를 받았어요. 당시 문학부 학생이 주도하는 반정부, 민주화 시위로 연일 학내가 소란스럽던 때였고 학생과장은 보통 3개월을 못 채우고 직에서 물러났죠. 저도 그럴 것으로 예상했는데 임기 2년을 다 채웠습니다.”

조 상임고문은 학생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수배돼 형사에게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거나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룻밤 재워서 보내는 등 학생을 철저히 보호했다. 그로 인해 살벌한 학내 분위기도 많이 풀렸다.

대학 내 연구 환경 개선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됐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이 됐고 몇 가지 개혁을 추진했죠.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 교수가 신임 교수를 추천하던 관례를 없애고 교수 공개모집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아울러 교수 개개인이 관리하던 연구비를 ‘중앙관리제’로 바꿨습니다.”

이 같은 개혁은 전국 대학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조 상임고문은 이후 서울대 부총장, 총장 등을 역임하며 대학의 자율성 확보 및 학내 안정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국제백신연구소 2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집무 중인 조완규 상임고문 | 한기민/에포크타임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1987년 8월 서울대 총장으로 임명되고 보니 이미 학생 1300여 명이 제명된 상태였습니다. 학칙에 명시된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죠. 반정부, 민주화 쟁취 등을 내걸고 시위하다 경찰에 붙잡혀 그 명단이 대학에 전달되면 총장 서명만으로 바로 제명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선거권, 피선거권이 있는 학생을 정치적 견해로 제명 처분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1300명을 전부 복학시켰고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총장이 아닌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등의 내용으로 학칙을 개정하기로 하고 교육부에 개정안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교육부는 3개월이 지나도 서울대의 개정 학칙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이를 승인할 경우 대학은 학생 시위로 더 혼란해지고 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퍼져 나라 전체가 혼돈상태로 빠져들 것으로 판단해서다.

대학생은 선거, 피선거권이 있는 만큼 당연히 정부를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비판 능력을 길러주는 게 대학의 사명이라는 조 상임고문은 설명을 이어갔다. “학칙을 승인하지 않으면 제가 총장직을 사퇴할 거라고 문교부(현 교육부)에 통고했습니다. 결국 서명원 문교부 장관이 ‘새로운 학칙의 승인을 다음 장관에게 맡길 수 없다’며 서울대가 요청한 자율 학칙을 승인하고 장관직을 물러났습니다. 학칙 승인 후 대학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단과대학 교수회의의 학생징계권 행사에 학생들이 굴복한 것이죠.”

-1년 반 정도 봉직하신 교육부 장관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장관 취임식 때 교육부 공무원들에게 ‘대학의 자율성’ 지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각 신문에 ‘장관 이름으로 각 대학 총장에게 학생 지도를 철저히 하라는 훈시를 보냈다’는 기사가 났어요. 담당 국장은 ‘학기 초 관례’라고 변명했지만 저는 그를 바로 지방대학 사무국장으로 내려보냈습니다. 노태우 정부 말기, 공무원이 나태해질 것을 우려한 인사조처였는데 이를 ‘좌천’으로 판단했는지 그 공무원은 충격으로 암에 걸려 1년 후 타계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암튼 정부 말기 교육부 기강을 잡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대학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잘못된 관행, 제도를 개선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는 조 상임고문은 이어서 말했다. ”인천대학교 개혁을 추진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인천 시민 대표가 진정서를 냈는데 인천대학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육부 감사를 보냈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왔습니다. 결국 설립자인 백 모 장군과 협의 끝에 인천대를 인천시립대로 개편했고 현재는 국립대로 승격했습니다.”

국제백신연구소 입구 주차 차단기 옆 입간판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국제백신연구소(IVI)가 한국에 유치되기까지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신다면요?

“서울대 총장 임기가 끝날 무렵(1991년)에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 설립 계획이 나왔고, 저는 우리나라에 연구소가 유치되기를 바랐습니다. 백신은 생명과학연구의 산물이며 세계 생명과학자를 유치해 이들과 공동 연구할 경우 우리나라 생명과학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죠.”

국제백신연구소(IVI)는 대한민국에 본부를 둔 최초의 UN 산하 국제기구다. 1990년 UN에서 모인 각국 정상 70여 명은 매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400만 명의 개발도상국 어린이 문제를 논의했고 UNDP(유엔개발계획)는 여러 나라에 연구소 설립을 권유했다. 유치 조건으로는 ▲5천 평 부지 ▲5천 평 크기의 연구소 건물 ▲연구용 기자재 구입비 60만 달러 제공 ▲매년 운영비 200억 원 중 70억 원(30%) 지원 등을 내걸었다.

“연구소가 할 일은 개발도상국 어린이를 위한 값싼 전염병 예방용 백신 개발입니다. 유치위원장으로 선임된 저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제백신연구소 한국 유치 이유를 설명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UN 총회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한국이 세계 어린이 질병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여러 나라와의 경합을 거쳐 한국이 IVI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IVI 본부는 1995년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을 열었고, 2003년 서울대 연구공원 내에 현대식 첨단연구소가 완공됐다. 개발도상국 국민, 특히 어린이들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사명으로 현재 국내외 70여 명의 연구 요원(외국인 50명)이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등 전염병 예방용 백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정부가 연구소 운영비 70억 원을 부담하지만, 나머지 70% 인 130억 원은 후원금으로 메꾸어야 해서 한국후원회를 조직했고 저를 이사장으로 선임했습니다. 우리나라 유일한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한국후원회 명예회장에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추대했습니다. 그 이후로 연구소의 명예회장은 역대 영부인이 맡고 있으며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의 영부인 김건희 여사를 5대 명예회장으로 위촉해 추대행사를 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빌 게이츠 재단이 1억 5천만 달러를 후원하는 등 매년 800만~9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 및 후원회도 활발히 연구 사업을 돕고 있다.

“3년 전, 국제백신연구소는 3-4만 원 하는 콜레라 백신을 단돈 2천 원짜리 값싼 경구용 백신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콜레라 백신 공급에 드는 비용은 제가 회원인 한국 국제로터리 클럽 3640지구 총재와 협의해 20만 달러를 부담했고 네팔 등 개발도상국 어린이에게 접종했습니다.”

IVI는 2022년 5월 1일 네팔 남동부의 루파니 농촌 지역에서 어린이 등 약 28000명의 주민에게 경구용 콜레라 백신 접종을 실시했다.(위), 네팔 어린이들이 접종카드를 들고 접종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아래) | IVI 제공

-오늘날 한국 바이오산업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향후 발전 방향을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은 이미 세계 수준급입니다. 굉장히 발전했죠. 바이오 분야는 매우 광범위해서 먹거리부터 건강, 환경 관리 등이 전부 포함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앞으로 생존에 필요한 문제는 바이오로 자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대한민국 과학 발전을 위해 제언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인해 유능한 연구 인력 확보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공계를 기피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적 풍토도 문제지만, 호기심과 창의력이 풍부한 초·중등 학생을 과학자로 키울 교육정책이 시급합니다. 특히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AI 등에 대한 과학기술력을 제고해 국가 간 경쟁에 대비해야 합니다.”

-교육자로서 우리 교육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진단하신다면요?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노학자는 “도덕심과 윤리의식의 결여”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교육풍토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초·중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를 겨냥한 주입식, 암기 위주의 교육일 뿐 도덕심 함양을 위한 인성교육이 결여돼 있습니다. 과학기술력의 기초가 되는 창의력 함양 교육, 나라의 안보를 겨냥한 교육 역시 크게 뒤처져 있습니다. 공직자의 부패 관습도 없애야 합니다. 뇌물이나 뒷돈, 급행료가 통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선진국 문턱에 설 수 있어요. 정계 지도자나 공직자가 윤리의식을 상실할 경우 바로 국가의 위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성실 봉사의 의무를 잃은 공직자를 엄히 다스리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에 대처할 능력이 없을 때가 진정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발전의 기회로 활용해 온 슬기로운 민족입니다. 위기를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민족으로서 결코 무궁한 발전의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제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름표를 한 개만 고르신다면요.

잠시 생각하던 조 상임고문은 과학자답게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을 가장 보람 있는 직책으로 꼽았다.

“1994년 9월, 이상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장이 위원장인 ‘과학기술아카데미’ 발기모임이 있었어요. 과학기술자 재교육 단체인 줄 알고 갔는데 과학기술계 중진, 원로의 모임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고려시대 학자를 한림학사 등으로 불렀으니 ‘과학기술한림원’으로 고치면 어떤가 제안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박수로 저의 제안을 받아들였죠. 그해 11월 과학기술한림원 창립총회에서 제가 초대 원장으로 추대됐습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Korean Academy of Science)’으로 출범한 이래 확고한 기틀 위에 각종 학술 행사를 주관하며 세계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완규 상임고문이 국제백신연구소 1층 로비에서 포즈를 취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100세를 바라보는 연세까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저는 욕심내는 일이 없습니다. 평생 마음을 비우고 살았고, 현재 위치에 만족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간 각종 공·사 단체 임원을 맡았지만, 제가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습니다. 비록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했어도, 일단 맡으면 열심히 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개혁에 앞장서 왔습니다.”

매일 7000보 이상 걷기, 소식(小食)도 건강 비결이라는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지족안분(知足安分·자기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안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의 좌우명입니다. 지금껏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욕심이 없으니 늘 마음이 편하고, 지금까지도 건강 걱정 없이 나이를 잊고 삽니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