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푸틴 러시아 방송인…왜 시진핑 ‘배신자’로 비난했나

강우찬
2024년 06월 11일 오후 6:43 업데이트: 2024년 06월 11일 오후 8:44

푸틴-시진핑, 5월 정상회담서 ‘브로맨스’ 이상 기류
“시진핑, 말로만 지원 약속…실제론 푸틴 곤경에 빠뜨려”
“中 도움 아쉬운 푸틴 ‘속앓이’…지지자가 대신 분풀이”

러시아의 유명 군사전문가 겸 방송 진행자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배신했다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난했다고 영국 언론이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중화권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해당 진행자가 푸틴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우발적인 발언이 아니라 푸틴의 지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에 거주하는 평론가 천포쿵은 지난 8일 에포크타임스 중국어판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유명 인사가 갑자기 중국 공산당(중공)에 등을 돌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2일 영국 데일리메일은 “시진핑이 푸틴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국영 방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며 러시아의 방송 진행자 세르게이 마르단(Sergey Mardan)의 전날 발언을 자세히 전했다.

이에 따르면, 마르단은 전날 친(親)푸틴 성향의 러시아 토크쇼 겸 유튜브 채널 ‘솔로브예프 라이브(SolovyevLive) TV’에 출연해 “지난달 시진핑의 모스크바 국빈 방문이 크렘린(러시아 지도부)을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3월 20일 시진핑은 2박 3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국빈 방문했으며, 이날 시진핑과 푸틴은 서로를 “친애하는 친구”로 불렀고, 특히 이튿날에는 공동성명을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정치적, 외교적 해결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환영한다”며 서방에 맞선 중러 동맹을 과시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푸틴과 만난 후 약 한 달 만인 4월 26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 약 1시간에 걸친 통화에서 시진핑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협상 창구 역할’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러시아의 지원군 노릇을 하던 중국(공산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중재자’로 역할을 전환했다는 게 국제사회의 분석이다.

푸틴의 열광적인 지지자로 알려진 방송 진행자 마르단은 바로 이 점을 짚었다.

그는 “러시아는 (중러 회담 이후) 시진핑이 자신들의 동맹일 뿐만 아니라 (시진핑이) 젤렌스키를 서방의 ‘꼭두각시’로 보고 있다는 기쁨과 확신을 얻었다”면서 “그런 다음 ‘뻥’, 이것(시진핑-젤렌스키 통화)”이라고 말했다.

푸틴을 만나 러시아를 지지하겠다고 한 시진핑이 한 달 만에 젤렌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을 돕겠다고 제안함으로써 실제로는 푸틴을 배신했다는 게 마르단의 주장이다.

그는 “이 전화통화를 우리(푸틴 지지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라며 “왜 그(시진핑)는 우리의 적에게 전화를 걸었나”, “시진핑 동지, 모스크바에는 왜 왔던 건가”라고 성토했다.

친 푸틴 방송의 시진핑 비난…“푸틴의 의중”

천포쿵은 이번 발언의 배경에 러시아-중국 공산당(중공) 간 거래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한 후 서방의 경제 제재로 혹독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러시아에 생필품을 제공하며 경제가 파탄 나는 것을 막아준다. 그 대신 중국은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인 원유·천연가스를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며 이득을 챙기고 있다.

천포쿵은 “러시아는 경제난을 완화하기 위해 중공이 에너지(원유·천연가스)를 높은 가격에 구매해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중공은 러시아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강탈에 가까운 낮은 가격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러시아가 ‘유턴’을 고려하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협상하고 서방과 화해하면서 중공을 방패막이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중국계 작가 겸 정치 평론가 성쉐(盛雪)는 에포크타임스에 “마르단의 발언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사실 러시아의 유일한 진짜 적은 중공”이라고 말했다.

성쉐는 “야심가인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진핑의 지원이 필요했다”며 “하지만 지금쯤 푸틴도 시진핑이 (전쟁을) 부추기고 겉으로만 지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곤경에 빠뜨려 러시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러시아는 시진핑이 거짓 약속을 하는 한편, 우크라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자신이 세계 공산주의 강대국의 맏형이 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FT “러시아, 중국의 군사적 침공 가능성에 대비”

러시아와 중공 간 ‘갈등’에 관한 지적은 평론가들의 분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올해 2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유출된 러시아 군사 문건을 인용해 “러시아가 세계 주요 강대국과의 분쟁 초기 단계에서 전술 핵무기 사용 연습을 해왔다”며 해당 문건에 “중국의 침공에 대비한 훈련 시나리오가 포함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중국이 침공해 올 경우 분쟁 초반 핵무기를 이용해 대응한다는 시나리오를 2001년 푸틴이 중국과 ‘핵 선제공격 금지 협정’을 포함해 동맹을 체결할 때부터 세워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FT 기사를 언급한 성쉐는 “푸틴은 시진핑의 거짓 약속을 믿었다가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짜증이 났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핵무기는 오늘날 인류가 넘어서는 안 될 마지노선이므로 핵무기 사용은 언제 어디서나 전 세계가 용납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푸틴, 5월 방중…미지근해진 시진핑 태도에 외신도 ‘주목’

지난달 16~17일, 푸틴은 이틀간 중국을 방문했다. 서방 언론들은 이 기간 푸틴이 시진핑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지만, 시진핑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평가했다.

영국 BBC는 17일 “러시아와 중국 국영매체들은 양국 정상의 우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지만, 사실 이것은 더는 동등한 동반자 관계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중국 방문에 앞서 푸틴은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전례 없는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계속 강화되고 있다면서 중국을 “좋은 이웃이자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고 묘사했다.

푸틴은 15일 중공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을 “현명한 정치인”이라고 칭찬하고 양국 간 무역 규모가 지난 5년 동안 두 배로 증가했다면서 앞으로 산업, 우주, 평화적 핵에너지 사용 등 다른 혁신 분야에서도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푸틴의 노골적 애정 표현에도 시진핑은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국 CNN은 “막후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푸틴은 공개적으로 인정된 성과를 거의 얻지 못한 채 베이징을 떠났다”며 구체적으로 약속된 것들은 없었다고 했다.

16일 발표된 중러 공동 성명에서도 “양국 간 우호에는 한계가 없으며, 협력의 금지된 영역은 없다”는 문구가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

푸틴이 기대하던 ‘중-러 천연가스관 협상’ 교착…러에 타격

양국 간 균열 조짐은 양국 정상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푸틴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당초 러시아는 중국에 가스관을 연결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려 했지만 중공이 무리하게 낮은 가격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고 FT는 이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 2일 보도했다.

중공은 이 가스관으로 수송되는 천연가스를 러시아 현지 수준에 가까운 가격으로 공급해 달라면서 또한 연간 수송 용량인 500억㎥의 가스 중 일부만 구매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 전쟁 이전까지 10년간 연평균 2300억㎥의 천연가스를 수출했지만, 우크라 전쟁 발발 후 가장 큰 고객인 유럽 시장을 잃으면서 지난해 수출량이 예전 10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푸틴은 이번 가스관 협상을 통해 중국 시장으로 활로를 뚫으려 했으나, 5월 방중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어려움을 맞게 됐다.

FT는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이 시진핑과의 회담을 통해 3가지를 요청했는데 러시아 내 중국 은행 지점 확대, 이달 우크라이나 정부가 주최하는 평화회의에 중국 불참과 함께 가스관 협상 타결이 그중 하나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가스관 협상 타결이 불발됐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상은행(ICBC)을 비롯한 여러 은행이 위안화 결제를 포함한 러시아로부터의 무역 결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알리바바도 루블화 결제를 거부하고 더 이상 러시아로 배송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감시 시스템 제조업체인 하이크비전은 예고 없이 갑자기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이는 모두 푸틴이 중국을 방문하고 20여 일 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국인 사업가는 에포크타임스에 “지난 2~3년간 러시아에서 에너지와 원자재를 구매해 왔다”며 “하지만 약 한 달 전, 갑자기 중국 은행 결제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구매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아 거래 국가를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천포쿵은 “러시아와 중국은 실제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있으며, 기회만 있으면 양측은 서로를 버리고 서방으로 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이 기사는 쉬이양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