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그 문화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폴 프레지아(Paul Prezzia)
2024년 06월 11일 오후 12:14 업데이트: 2024년 06월 11일 오후 1:54

과거 455년 6월, 오늘날 반달족(Vandals)이라고도 불리는 게르만족이 당시 대도시였던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게 된다.

이는 역사 속에서 로마 유산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학과 언어, 법률, 공화주의 정신은 멸망 후에도 살아남았다. 로마의 유산은 최소한의 인명 손실과 함께 물리적으로 폐허가 된 로마 제국의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위대한 유산

당시 로마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대부분을 호령했다. 로마 시민은 대부분 군인으로 훈련받으며 정확한 제식과 예법을 익혔다. 그들은 공동선을 우선시하는 것이 개인 재산 보호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신념은 언어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영어로 ‘공화국(republic)’은 라틴어 ‘res(실체)’와 ‘publica(공공)’가 합쳐진 것에서 유래했다. 그렇기에 로마를 수호하는 것은 개인의 가족과 재산, 권리를 수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로마 제국의 종말

‘가이세리크의 로마 약탈’(1836), 칼 브륄로프 | 퍼블릭 도메인

고대 로마가 건국된 지 1208년 후인 서기 455년, 로마의 군대는 더 이상 공화국을 보호함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시민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 당시 군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이자 비시민권자였다.

또한 로마는 더는 선출된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지 않았고 독재적인 황제가 자리를 맡았다. 당시 황제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397~455)로, 그는 전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왕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임 황제의 미망인 리시니아 에우독시아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막시무스의 아들 팔라디우스는 리시니아의 딸 유도키아와 결혼했다.

5세기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의 금화 | 퍼블릭 도메인

팔라디우스와 유도키아의 결혼은 게르만족의 로마 침략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게르만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동맹을 맺어 자신이 아들과 유도키아를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막시무스의 반역으로 약속이 취소되자 협정이 깨진 것에 분노한 가이세리크는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호마의 항구 오스티아를 향해 출발했다.

게르만족의 침략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막시무스는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했다. 징집된 로마 군사들은 왕을 지키고자 희생할 이유가 없었기에 저마다 흩어졌다. 병사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무스는 탈출을 시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로마 정부는 붕괴했고 도시 전역은 무방비로 공격당했다.

그럼에도 로마는 완전한 멸망을 면했다. 이와 함께 그들이 수 세기에 걸쳐 지켜온 예술과 법칙, 종교 등 고유의 문화도 부흥했다. 로마 제국에 의해 수 세기 동안 박해받았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문화・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전했다. 한편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무릎 꿇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기독교는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언어, 전통 규범을 사용해 고유의 가치를 지켜갔다.

‘신의 도시’, 마이트르 프랑수아. 로마를 약탈하는 게르만족과 교황 | 퍼블릭 도메인

황제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로마를 대표해 제45대 교황인 레오 1세(재위 440~461년)가 가이세리크와의 협상을 맡았다. ‘대(大)교황’이라는 호칭을 받은 첫 번째 교황인 레오 1세는 공격으로 고통받는 로마인들을 지키고자 유혈 사태를 막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기독교 신자로서 가이세리크는 교황의 제안을 수락해 로마가 항복하면 학살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로마인들이 방어를 멈추자, 침략자들은 로마의 보물을 전례 없는 규모로 약탈했다. 그러나 인명 피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게르만족(반달족)의 이 약탈은 영어 단어 ‘반달리즘(vandalism·약탈)’의 기원이 됐다.

로마를 약탈한 게르만 족의 그림(1575), 겐트대학교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이 사건에는 물질보다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유혈 사태를 피하고자 했던 기독교적 가치가 작용했다. 비록 로마를 침략한 가이세리크와 게르만족이었지만, 그들은 로마인들이 중요하게 여긴 가치를 경시하지 않았다.

로마의 사명

고대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기원전 19)는 로마의 사명을 ‘정복당한 자를 아끼고, 교만한 자를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로마의 관점은 고대인에게는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로마인들은 로마 기원 때부터 일반적으로 적을 파괴하고 수탈하기보다는 적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러한 그들의 정신적 전통을 이해한 가이세리크는 비록 로마를 약탈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또 다른 시작

‘성 베네딕토와 성 스콜라스티카와 풍경 속의 두 동반자’(1681), 장 밥티스트 드 상페뉴 | 퍼블릭 도메인

게르만족의 침략은 황제를 중심으로 통치되던 로마 제국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침략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많은 제도와 이상은 살아남았다. 무너져가는 정부와 사회 속에서도 그들이 중요히 여긴 ‘공공의 것’이라는 가치는 남아있었다.

베네딕도회의 등장은 공공의 것을 중요히 여긴 로마인들의 전통을 이어갔다. 서양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수도회 중 하나인 베네딕도회는 로마의 철학과 문학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29년 베네딕토가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에서 창건한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는 당시 로마 정부가 개인의 복지와 국가의 복지를 분리한 것과 달랐다. 베네딕도회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가입하고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로 운영됐다. 전체의 선(善)과 이익을 우선으로 했지만, 각 개인의 이익은 공동선을 통해 보장됐다.

또한 고유한 로마 법 제도의 정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어졌다. 황제가 사라진 후에도 이어진 제도는 마을과 영지에서 전통으로 보존됐고, 수도원에서는 문서로 보존됐다.

절망에서 피어난 희망

로마제국의 몰락은 비극이지만 희망을 논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멸망과 자멸이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진 않는다. 간혹 재앙은 악을 몰아내고 참된 선과 아름다움이 이전보다 더 밝게 빛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폴 프레지아는 2012년 노트르담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조지 아카데미에서 비즈니스 관리자, 운동 코치, 라틴어 교사로 재직 중이며 아내 및 자녀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