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학살 35주년…中 대사관 앞에 선 한국인 시위자들

강우찬, 정향매 기자
2024년 06월 05일 오후 1:13 업데이트: 2024년 06월 05일 오후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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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수도 베이징을 비롯해 중국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같은 달 한국의 6월 항쟁에 고무된 중국의 학생과 시민들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여 민주화된 중국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지도자들의 화답을 기다렸다.

공산당 지도부는 6월 4일 새벽,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실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학생들이 잠든 텐트 위로 탱크가 지나간 자리는 피로 얼룩졌고 자유로운 새 세상을 꿈꾸던 중국의 미래 세대는 그렇게 스러져 갔다.

중국 공산당은 당국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35년째 ‘6·4 톈안먼 사태’를 역사에서 지우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건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희생자 가족들을 포함해 잠시나마 중국이 찬란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매년 6월 세계 각지에서 추모 행사를 열며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잇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한국에도 톈안먼 사태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사람이 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지난 4일 서울 명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대사관 앞 거리를 찾았다. 이곳은 대사관 측의 항의와 요청 등으로 집회가 금지되고 있으나 1인 시위만은 자유롭다.

화사한 초여름 날씨인 이날 명동 중국대사관 앞 거리는 여느 평일 오후처럼 한적한 가운데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중국대사관의 붉은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경찰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경찰 5~6명이 인근 거리를 순찰하며 사람들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각자의 방식으로 공산당 통치하에 억눌린 중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을 성원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홍콩서마저 금지된 민주화 운동, 한국서 힘을 보태겠다”

국제앰네스티, 국제민주연대,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아시아 공동 행동’ 등 인권 단체는 이날 오전, 오후 4회에 걸쳐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촛불과 자체 제작 포스터를 손에 든 인권활동가들은 중국 정부에 ‘국가보안법 폐지’ ‘홍콩 민주화 운동 중 수감된 양심수 석방’을 호소했다.

4일 서울 중구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국내 인권활동가가 중국 공산당의 홍콩 인권탄압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벌였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시위에 참여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매년 톈안먼 사태 기념일 홍콩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추모하고 중국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행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과 2020년 중국 국가안전법 제정 이후, 홍콩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 인권마저 계속 위축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나마 중국의 민주화를 응원하는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에서 오늘의 활동을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은 또 올해 3월 홍콩 입법회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인터넷에 중국 정부 비판 글을 게시했다 체포된 홍콩 시민 6명을 석방하라고 촉구하고자 한다”며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인권활동가와 시민이 다수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그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고 연대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들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국판 ‘6월 항쟁’을 기념하며 홍콩·대만의 자유를 응원”

30대 직장인 박유서 씨와 김가다 씨는 이날 오후 퇴근 후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했다.

박씨는 태극기와 ‘1987.6.10; 1989.6.4’라는 글을 쓴 종이를 손에 들고 목에는 톈안먼 사태 사진, 라이칭더 대만 총통 사진을 담은 A4 용지 네 장을 이어 붙인 후 목에 달아맸고, 김씨는 톈안먼 사태 사진을 담은 A4 용지 두 장을 손에 들었다.

4일 서울 중구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30대 직장인 김가다 씨(좌)와 박유서 씨가 6.4 톈안먼 학생운동 탄압에 항의하고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박씨는 1987년 발생한 한국의 ‘6·10 항쟁’과 1989년 일어난 중국의 ‘6·4 톈안먼 사태’를 기억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주제로 시위를 계획했다.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중국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당국이 지우고 싶어 하는 톈안먼 사태, 파룬궁 탄압 등 인권 이슈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은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외치면서 홍콩 사람들을 탄압하고 이제는 대만까지 넘보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삼켜버리면 다음은 한국을 먹으려고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대만, 즉 중화민국은 과거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왔다. 고맙게 생각한다. 1992년 대한민국이 대만과 단교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그동안 홍콩, 대만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외침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자유·민주를 위해 희생한 세계 영웅들의 부조 제작”

같은 날 대사관 맞은편 사거리에서 기자는 검은 모자를 눌러쓴 방주혁 작가도 만났다. 그는 A1 크기의 투명 유리판 조각에 인물 부조(浮雕)를 만들고 있었다.

방 작가는 “현대인에게 감동을 준 세계 영웅들의 부조를 손수 만들어 유족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해왔다”며 중국 민주화 운동가 고(故) 류샤오보 작가의 조각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구촌의 자유·민주를 위해 희생한 그들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4일 서울 명동 중국 대사관 앞에서 방주혁 작가가 류샤오보 부조 옆에 서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톈안먼 사태의 주역 중 한 명인 류샤오보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류샤오보는 톈안먼 사태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민주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중국 당국에 의해 반복적으로 구금됐고 2010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에도 중국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2017년 6월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같은 해 7월 유명을 달리했다.

이날 방 작가는 러시아 야당 지도자였던 알렉세이 나발니의 부조도 제작했다. 나발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올해 2월 시베리아 감옥에서 의문사했다.

방 작가는 “현대인들은 국가와 정치를 떠나 지구촌의 자유·민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은 ‘6·4 톈안먼 사태’ 35주년 기념일인데 안타깝게도 이를 기억하는 한국인이 많지 않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류샤오보, 나발리 등) 이런 인물들의 사건은 언론이 집중 보도하면 한동안 대중의 이목을 끌지만 쉽게 잊힌다. 조각 작품을 통해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들의 이야기는 국경을 초월해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공산당의 만행은 여전…하지만 중국인들은 깨어나고 있다”

이날 대사관 앞에는 톈안먼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 공산당과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자리한 1인 시위자도 있었다. 중국에서 25년째 탄압을 받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2005~2006년 무렵부터 중국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인 시위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접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괴로움을 받고 있는 동료 수련자들을 위해 릴레이 침묵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불가(佛家·불교가 아니라 부처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문파) 수련법답게 한 손을 세운 특유의 동작을 취한 수련자는 눈을 감은 채 뒤편에 세워둔, 중국 공산당의 강제 장기적출을 폭로하는 내용의 전시물로 알리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4일 서울 중구 명동 중국대사관 맞은 편 인도에서 한국인 파룬궁 수련자가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탄압에 항의하며 침묵 시위하고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공교로운 점은 파룬궁 탄압을 지시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톈안먼 학살과도 관련 깊다는 사실이다.

1989년 당시 상하이 당서기였던 장쩌민은 톈안먼 시위로 부담을 느끼고 있던 덩샤오핑 등 당 지도부를 대신해 유혈 진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그 밖에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국가주석 및 당 총서기직을 꿰찼다.

대규모 군중에 대한 유혈 진압을 찬성해 권력 가도에 들어선 장쩌민은 정확히 10년 뒤인 1999년 6월 10일 파룬궁 탄압 전담 비밀경찰 조직인 ‘610 판공실’을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이래저래 6월은 톈안먼 학살에 이은 파룬궁 탄압까지 중국의 비극적 역사로 얼룩진 셈이다. 톈안먼 시위가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면, 파룬궁은 공산당 혁명 후 무너진 도덕과 전통 가치관(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을 회복하는 움직임이었다.

특히 파룬궁의 요구는 정치적 변혁이 아니라 건강과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수련 환경을 보장해달라는 개인적 차원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당 지도부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장쩌민은 개인적 야망과 파룬궁에 대한 질시로 인해 독단으로 탄압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1989년 국가체제 변화의 기회를 놓친 중국은 1999년 또 한 번 건전한 사회를 구축할 기회를 놓쳤고 그 여파는 한국과 대만, 일본 등 주변국은 물론 전 세계에 공산주의 이념을 퍼뜨리고 경제·외교·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불량 정권의 행패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본지 에포크타임스는 이러한 중국과 중국인들에 또 한 번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줌으로써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하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 바로 공산당 탈퇴 운동 후원이다.

본지는 지난 2004년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실체를 파헤친 평론 ‘9평 공산당’을 발표했고 이후 이 평론을 읽은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공산당과 산하 청년 및 유소년 조직 탈퇴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비영리기구 ‘글로벌 중국 공산당 탈당센터’ 집계에 따르면 올해 6월 4일까지 그 숫자가 4억 3133만 명에 달한다.

파룬궁 수련자들의 전시물에서도 이러한 본지의 역할과 중국인들의 공산당 탈퇴 현황이 소개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