館. ‘집 관’ 자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에게 보금자리가 소중하듯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집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미술관, 체육관, 기념관, 박물관… 우리 주변 곳곳에 구석구석 숨은 보석 같은 집(館)들을 소개하는 ‘관전 포인트’입니다.
“우리 박물관, 엄청 멋있지 않나요?”
안내를 맡은 박물관 직원이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랬다. 농사나 농업 하면 으레 떠오르는 클래식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기 수원에 위치한 국립농업박물관은 개관한 지 2년이 채 안 된 신식 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 농업 관련 박물관이 국립으로 세워진 것은 이 국립농업박물관이 최초다.
수도권 대도시의 양지바른 땅에 자리한 국립농업박물관은 다랑이논밭과 황토마당, 과수원 등 야외 시설부터 시작해 차세대 농업으로 거론되는 수직농장, 곤충관, 식물원, 기획전시실까지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햇살이 환히 들어오는 건물의 유리벽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지난 3일 국립농업박물관은 오늘(4일)부터 오는 8월 25일까지 열리는 2024년 상반기 첫 기획전 ‘땅의 기록, 흙의 기억’ 프레스 투어를 개최했다. 국립농업박물관이 실제 전시 개막에 앞서 주요 프로그램과 전시 시설을 소개하는 프레스 투어를 진행한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취재진을 맞이한 관계자들은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했다. 박물관과 전시를 이야기하는 관계자 모두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담뿍 묻어 있었다. 프레스 투어 전 간략히 브리핑에 나선 김유호 농업본부 본부장은 “국립농업박물관은 현재, 더 나아가서 미래를 다루고 있는 곳이다. 농업에 대한 가치는 아무리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런 국립농업박물관이 올해 첫 기획한 전시 ‘땅의 기록, 흙의 기억’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누구나 알지만 쉽게 정의하기는 어려운 ‘흙’과 ‘땅’의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는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이 일구고 이어온 땅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전시 전체를 땅과 흙이 관통하고 있다. 농경지에 대한 문자 기록부터 유물, 영상, 사진, 시 등 총 142점의 자료가 준비됐다. 이를 통해 ‘땅’과 ‘그 땅을 이루는 흙’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장을 마련했다.
특히 단원 김홍도의 산수인물도가 최초 공개돼 크게 주목받는다. 국립농업박물관이 농경지 관련 풍경화를 구입하다 소장하게 된 산수인물도는 단원 김홍도가 무성하게 자란 벼와 여름철 논의 모습을 부채에 그린 수묵화다.
아울러 농민의 농지 소유권을 최초로 인정한,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처음으로 명시된 헌법인 제헌헌법도 선보인다. 제헌헌법 제86조에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고 기재돼 있다.
그 밖에 전시 유물에 등장하는 땅의 형태를 모티브로 삼은 출입구를 전시관에 조성함으로써 관람객들이 전시 공간을 거닐며 다양한 땅의 모습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관련, 프레스 투어 진행을 담당한 김남희 전시팀 팀장은 “(전시관) 입구 바닥을 흙의 질감으로 구성했다. 흙 밟는 소리도 감상할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전시 제1부 ‘흙에서 농경지로’에서는 농사짓기 좋은 땅을 끊임없이 일궈 온 선조들의 기록, 회화, 노동요 등이 소개된다. 백제시대 대사촌 마을의 농경지 형태와 생산량 등을 나무에 적은 ‘백제 촌락문서 목간’, 조선시대 밭을 매매하면서 작성한 한글 계약서 ‘밭 매매명문’, 앞서 언급한 단원 김홍도의 ‘산수인물도’ 등을 1부에서 볼 수 있다.
김 팀장은 “신라시대 진흥왕 척경비를 보면 백전답(白田畓)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답(畓)은 ‘물이 있는 밭’으로 논을 뜻하는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한자”라고 설명했다. 또 “1부에서는 논을 매고 밭을 맬 때 지역별로 불렸던 노동요인 ‘논매기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무척 희귀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제2부 ‘땅과 사람’은 광복 이후 근현대 시기 사람들이 땅을 일구고 생명을 지켜온 과정을 영상, 뉴스, 시, 사진으로 전달한다. 흙과 땅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사진과 시, 흙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일종의 라이브러리 공간이다.
2부에서 이해인 수녀와 법정스님의 시 외에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전시 공간의 벽이다. 김 팀장은 “황토와 갈대를 섞어서 만든 벽인데, 우리나라에서 전시하면서 이런 벽을 쓴 것은 이번이 최초일 것”이라고 부연했다.
제3부 ‘땅, 먹거리, 재화’에서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땅이 나라 경제의 주요 기반으로 활용된 역사, 농경지의 소유와 분배에 관한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농사짓는 땅이 농경지로서 법적으로 보호받게 되기까지의 다양한 모습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에 땅의 모양과 크기를 재는 측량법을 적은 일종의 도구였던 길이 2.3m짜리 대형 전형도(田形圖)를 비롯, 오늘날 현행 헌법에서 ‘농지는 농민에게’ 원칙이 세워지게 된 기반인 1948년 제헌헌법 등 기록 자료가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제4부 ‘다시, 흙으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흙을 딛고 존재해 온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삶의 토대가 되는 땅과 흙의 가치에 주목한 현대의 다양한 활동들을 살펴본다. 4부에서는 국제연합이 선포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UN농민권리선언) 등이 전시돼 있다.
끝으로 땅과 흙에 관한 생각을 문장 키링으로 만들어보는 관객 참여형 체험존이 마련돼 관람객들로 하여금 땅과 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전시를 기획한 장명선 학예사는 ‘이 시기에 이 주제를 선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2013년 11월 UN정기총회에서 매년 12월 5일을 ‘세계 토양의 날’로 제정했고, 이듬해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토양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며 “2024년 올해로 10주년을 맞아 이 같은 전시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프레스 투어에 이어 치러진 개막식에서 황수철 국립농업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는 땅과 흙의 역사적 가치, 그 소중함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라며 “인류 문명은 땅과 흙을 배우는 데서 시작됐다. 우리 선조들은 흙과의 동행 속에서 독특한 농경문화를 탄생시켰고, 이러한 문화는 우리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자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황 관장은 “긴 시간 동안 우리가 땅을 일구며 남긴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땅과 흙이 우리 삶의 소중한 터전이자 온 생명의 바탕임을 깊이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전시 ‘땅의 기록, 흙의 기억’은 오는 4일부터 8월 25일까지 국립농업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된다. 휴관일인 월요일 제외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 가능하며, 관람료는 무료다. 아동, 노약자, 장애인에게는 유모차와 휠체어가 무료로 대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