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이된 현대 미술…어둠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진정한’ 예술이란

워커 라슨(Walker Larson)
2024년 06월 1일 오전 10:28 업데이트: 2024년 06월 1일 오후 2:47

전통을 부정하는 예술 운동인 다다이즘이 유럽과 미국 전역에 퍼지며 오랜 시간 쌓여온 예술의 가치와 성취는 조롱당했다.

1917년 4월, 프랑스 실험 조각가이자 다다이즘의 중심인물인 마르셀 뒤샹(1887~1968)은 미국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에 도자기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는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 서명하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를 예술이라 불렀다. 이는 조각, 형식,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 관념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소변기가 예술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평범한 사물이라도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 작품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예술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 덧붙였다.

‘샘’(1917), 마르셀 뒤샹 | 퍼블릭 도메인

또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판화 인쇄물에 수염을 그려 넣고 외설스러운 문장을 써넣어 훼손하고는 이 또한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행태와 그림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조롱이다.

‘모나리자’(1503), 레오나르도 다 빈치 | 퍼블릭 도메인

반(反)예술주의

뒤샹은 미국 뉴욕에서 반이성・반예술・반진실 문화 운동 사조에 속해 있었다. 그가 소변기를 미술전에 출품한 사건은 ‘다다이즘’의 창설 계기가 됐다. 그들은 예술의 본질의 재정의를 목표로 합리성・아름다움・비례・의미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부르주아적 산물로 치부하며 이를 배척했다. 그들은 추악함과 혼돈, 비합리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극좌 정치와 반부르주아 정서를 추구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카엘 뢰비(1938~ )는 다다이즘을 좇는 예술가들에 대해 “이 젊은이들이 기성 질서의 가치에 대한 분노와 극도의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경멸과 조롱, 블랙코미디를 무기로 사용했다. 그들은 모든 부르주아적 관습과 전통, 기대를 깨끗이 청산하려 했다”라고 설명했다.

1919년 베를린 다다이즘 중앙위원회의 세계 혁명 선언문은 다다이즘이 급진적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공개 선언했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고전 예술이 자본주의의 ‘억압적인’ 체제와 결부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비합리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황폐함 속에서 자라났다. 그들은 전쟁의 부조리와 혼돈, 비극에 대한 항의의 방식으로 원칙 추구 대신 비합리를 택했다.

‘게르니카’

‘게르니카’(1937), 파블로 피카소 | 퍼블릭 도메인

전쟁과 관련한 환멸을 비합리로 표현한 예술가는 다다이스트들만이 아니다. 입체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1881~1973) 또한 전쟁의 여파를 화폭 위에 묘사했다. 피카소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게르니카 지역이 폐허가 되고 민간인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언론 보도를 통해 목격했다. 그는 당시의 충격과 공포를 혐오스럽고 기괴한 이미지로 그렸다.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뒤틀린 형태와 혼란스러운 선, 균형이 맞지 않고 절단된 신체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얼굴이 가득하다. 많은 사람은 이 작품을 반전(反戰)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는다.

현대 미술이 추악해진 이유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의 추악함을 반영해 그대로 묘사한 작품이다. 일부 미술 비평가들은 현대미술의 반(反)미학적 요소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 작품을 들기도 한다. 다다이즘을 추종하는 이들과 피카소가 보여주듯 예술이 사회의 문제를 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예술은 철학, 정치, 역사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 전통과 보수를 거부하고 급진적으로 변하는 정치 형태와 전쟁에 대한 불안은 현대미술의 대다수가 추한 형태를 띤 큰 이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허무주의적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깃들어 있다. 피카소가 인간의 형상을 부서진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전통적인 진리 개념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이 질서를 망가뜨리는 것을 상징한다.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1801), 자크 루이 다비드. 대칭과 아름다움, 이상주의가 잘 묘사된 작품 | 퍼블릭 도메인

반면 고전 예술은 질서 있고, 밝으며 내포한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조화롭다. 이는 과거 인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기준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미술은 세상에 대한 환멸과 회의에서 비롯되었기에 조화와 질서가 모두 망가져 있다.

현대미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과 의미에 대한 객관적인 관념을 거부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다. 현대미술이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예술의 목적

‘아테네 학당’(1509), 라파엘로 | 퍼블릭 도메인

서양의 고전과 전통에 따르면 예술은 단지 사회적인 사실과 철학,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많은 사상사들은 예술이 특정 시대나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시학 4부에서 예술을현실의 모방으로 정의하며 예술이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특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을 통해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요셉 피퍼(1904~1997)는 저서 ‘예술과 관조’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예술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구나 인간의 행위와 사건을 숙고함으로써 운명과 역사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응시할 수 있고, 누구나 장미나 인간의 얼굴을 관조함으로써 창조의 신비를 접할 수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태초부터 위대한 철학자들의 마음을 자극했던 탐구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의 창작에서 그러한 활동의 또 다른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는 현실의 복사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예술가)이 지각할 수 있는 특권으로 만물의 원형적 본질을 말, 소리, 색, 돌 등 가시적이고 실체화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쟁의 추악함이라는 ‘보편적인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과연 전쟁이 심오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현실일까?

‘이소스에서의 알렉산더 전투’(1529),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 퍼블릭 도메인

역사상 세계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피카소가 그린 산업화 이후의 전쟁은 비인간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고전 예술에서 전쟁 묘사는 이 작품처럼 추악하지 않았다.

과거 선조와 예술가들은 전쟁과 같은 큰 재앙과 고통 속에서도 어떤 의미와 목적을 볼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문인 베르길리우스(영어명 버질, B.C. 70 ~ B.C. 19)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아스’ 속 주인공이자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패전으로 아내와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도망친다. 그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부조리하거나 단순한 혼돈이 아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어둡고 추악한 전쟁의 외형 너머에 있는 더 깊고 진실한 진리를 발견했다.

데니스 퀸의 저서 ‘추방된 아이리스’에서 그는 전쟁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관점에 대해 “이것은 비극적인 관점이나 악의적인 운명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반대로 선한 운명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트로이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로마도 없었을 것이다”라며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베르길리우스의 관점이 조화와 질서, 대칭을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운 예술이라 설명했다.

베르길리우스(가운데)와 의인화 한 ‘역사’(왼쪽)와 ‘비극’(오른쪽)(A.D. 3세기) | 퍼블릭 도메인

진정한 예술

게르니카와 아이네이아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진정성을 추구한다. 각각 진실을 내포하고 있지만, 현실과 진정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태도는 정반대에 가깝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대문호 단테(1265~1321)는 “만물은 사랑으로 묶인 한 권의 책이며 우주는 흩어진 나뭇잎들”이라 말했다. 단테의 견해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보는 그림자, 즉 어두움은 빛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부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예술은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추악함 속에서도 긍정적이며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 그것을 세상에 공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워커 라슨은 위스콘신에 있는 사립 아카데미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아내와 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영문학 및 언어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헤밍웨이 리뷰, 인텔리전트 테이크아웃, 뉴스레터 ‘헤이즐넛’에 글을 기고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