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명예도 없이 스러져간 애국자들 기려야…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창립

정향매
2024년 06월 3일 오전 11:46 업데이트: 2024년 06월 3일 오후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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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보국(精忠報國)!

남송(南宋) 시대 명장이자 중국의 대표 민족 영웅으로 손꼽히는 악비(岳飛)가 혼란스러운 나라 걱정을 하며 탄식하자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새겨 준 문신 글귀이다. 악비는 악가군(岳家軍)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 연전연승하여 북방 민족에게 빼앗긴 고토 수복의 일선에 섰다. 다만 금(金)과 화의를 주장한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음모에 빠져 서른아홉 살을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한족(漢族)의 역사관이 반영된 것이지만 중국에서 악비는 만고충신, 진회는 만고역적의 대명사이다. 비록 젊은 날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악비의 어머니가 그의 몸에 새긴 ‘정충보국’은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대표하는 글귀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면 정충보국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게 된다. 한편 국가를 위해 무한 헌신했건만 국가로부터 진실 규명도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명의 애국지사들의 처지를 보면 가슴 한편이 시리기도 하다.

6월 1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선양회는 이른바 ‘업무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국가를 위해 무한 헌신했지만 이름도 존재도 숨겨야만 하는 순직 군인·공무원을 추모하고 그들의 삶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모임이다. 주 대상은 이른바 블랙 요원(비공개 요원)으로 불리는 해외 공작관들이다.

선양회 창립 배경에는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명을 달리한 고(故) 최덕근 영사와 육군 첩보부대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대원들이 자리한다.

최덕근 영사는 국가정보원의 전신 국가안전기획부 해외 공작관이었다. 한국외대 러시아어과 졸업 후 학군사관(ROTC)으로 군 복무 후 국가안전기획부에 몸담았다. 유창한 러시아어 능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등에서 대북 공작의 최일선에 섰다. 주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던 1996년 10월 1일, 자택 앞에서 피살됐다.

화이트 요원(공개 정보 요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근무하던 최덕근 영사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의 자금줄이던 마약 생산·유통, 슈퍼노트라 불리는 100달러 위조 지폐 경로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사망 후 부검 결과 북한 공작원들이 만년필 독침에 주로 사용하는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 물질이 검출됐다. 최덕근 영사의 생전 활동, 관련 정황을 종합할 때 북한 공작원에 의한 암살을 뒷받침하는 유력 방증(傍證)이다.

최덕근 영사는 사후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됐고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관묘역 한편에서 영면(永眠)에 들었다. 정부는 이사관(2급 상당)으로 1계급 특진·추서하고 보국훈장 천수장을 추서했다. 오늘날 ‘최덕근 영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고인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있다. 최덕근 영사는 국가정보원 ‘보국탑’의 19개의 별 중 유일무이하게 신원, 사망 원인이 밝혀진 요원이다.

최덕근 영사를 비롯하여 보국탑의 19개의 별로만 남아 있는 국가정보원 순직 요원들의 처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북파 공작업무를 수행한 HID부대 소속 전사들은 국가로부터 보상은커녕 무관심과 냉대를 받아오고 있다.

1949년 창설된 ‘호림(虎林)유격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고 약칭하는 국군정보사령부 산하 특수부대의 원조이다. 6·25전쟁 발발 전 ‘전쟁 방지’ 업무를 수행했다. 1949년 2월 대통령령 37호에 따라 육군 수색(水色)학교가 설립됐다. 이후 호림유격대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대원 대부분이 임무 수행 중 전사하거나 포로가 돼 처형당했다.

조국을 위해 사선에서 일했건만 이들의 이름은 여전히 잊혀져 있다. 한국 정부도 이들을 외면했고 민간 차원에서 사단법인 호림안보협의회가 창설돼 이들의 넋을 기리고,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호림안보협의회 회장 정규필 예비역 육군 대령도 국군정보사령부 대북 공작관 출신이다.

호국보훈의달 첫날 공식 출범한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는 정충보국의 일념으로 이름도 명예도 없이 스러져간 애국지사를 기리는 모임이다. 모임 참여 인사들은 “오늘날 글로벌 중추 국가로 자리매김한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애국애족 열사의 피땀과 아낌없이 던진 목숨 덕분이었다. 이분들의 목숨값으로 인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구인들이 동경하는 경제강국·문화강국으로 올라섰으며 또다시 주변 열강이 탐내어 집어삼키려고 각축을 벌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다”고 선양회 결성 배경을 밝혔다.

윤재희 예비역 육군 대령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행사는 개회 선언, 국민의례내빈 소개개회사헌시 봉정추진 경과 보고구국혼선언문 낭독추모사추념사역사사축원사헌화진혼곡 제창대한민국 구국혼 선배에 대한 경례폐회선언 순으로 진행됐다.

행사에는 이건개 전 국회의원장종한 양지회장오현득 북파공작팀장연합회장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이재훈 국민생활안보협회 사무총장정성홍 5.18 민간진상조사위원장류재복 남북이산가족협회장 등 100명이 참석했다.

선양회는 석희태 사회정의를바라는전국교수모임(정교모) 공동대표,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신언 전 파키스탄 대사 등 3인이 공동 대표를 맡고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정규필 예비역 육군대령, 김석규 코리아글로브 이사 등이 이사로서 실무를 책임진다.

구성원들은 선양회 활동을 통하여 국가가 발굴하지 못하였거나 외면하고 무시해 왔던 숨은 구국영령들을 찾아내어 그 숭고한 구국정신을 이어받고, 구국혼을 추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대대손손 호국의 발판을 다지고자 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아울러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전쟁에서 희생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 국가와 국민에 의해 오래 기억되고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그 노력은 보훈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의지를 뒷받침하는 민간 차원의 강력한 자극제가 될 것으로 믿는다며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희망했다. 선양회는 고 최덕근 영사 추모 사업, 호림부대원 선양 사업 등을 지속 추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