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아이돌 스타”…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

더스틴 바스
2024년 05월 30일 오후 6:45 업데이트: 2024년 05월 30일 오후 6:46

9세 때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 극장의 장학생으로 입학한 소녀가 있었다. 영혼을 울리는 순수한 목소리로 재능을 인정받은 소녀는 연기, 춤, 노래 등 오페라를 배웠다.

시간이 흘러 10대가 된 소녀는 아직은 여전히 어린 나이였음에도 스웨덴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주연을 맡았고, 말 그대로 ‘스웨덴의 최애’가 됐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럽의 연인’으로 이름을 떨친다.

19세기를 대표하는 가수, 제니 린드 이야기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 극장. 린드가 초기에 노래한 장소다.|Frankie Fouganthin /CC BY-SA 4.0

라이징 스타

린드는 1820년 스웨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린드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혼자 집에 남은 어린 린드는 온종일 창문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노래를 시작한 린드의 목소리에는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어느 날, 스웨덴 왕립 극장 관계자가 지나가다 우연히 이 같은 노랫소리를 들었고 린드는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 극장의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0대 후반이던 1840년, 린드는 스웨덴 궁정 가수로 임명됐다. 이즈음 성대 질환을 앓으면서 목소리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1844년, 린드는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1세의 대관식에 초청돼 노래를 부른다. 같은 해 스웨덴을 넘어 해외 투어를 시작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등지에서 공연했으며 독일 베를린의 궁정 오페라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멘델스존을 만났으며, 린드와 멘델스존은 1847년 멘델스존이 사망할 때까지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멘델스존 외에도 쇼팽, 슈만 등 당대 최고 음악가들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덴마크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린드의 노래를 듣고 동화 ‘나이팅게일’을 썼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연할 때쯤 린드는 몰려드는 관객들로 인해 기마경찰의 호위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1847년, 영국 런던에 도착할 때쯤 린드는 유럽 전역에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리고 있었다. 때때로 무료 공연을 열고 공연 수입을 기부하기도 하며 대중들 사이에서는 린드의 인기가 더욱더 높아졌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린드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다른 어떤 목소리보다 뛰어나며 모든 목소리의 완벽함을 묶은 듯하다. 그만큼 뛰어나기에 어떤 언어로도 린드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니 린드|퍼블릭 도메인

궁전과 은퇴

1849년, 린드는 영국 왕립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29세의 나이였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마지막 공연을 관람하러 와 린드에게 보석으로 만든 나이팅게일을 선물했다.

이렇듯 유럽에서의 엄청난 커리어를 가지고 은퇴한 린드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린드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에서 린드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변화가 찾아온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이 제작한 제니 린드 포스터|Chemical Engineer /CC BY-SA 4.0

린드마니아

당시 미국에서는 흥행업자로 이름을 날리던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바다 건너 유럽에서 린드라는 스타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접한 바넘은 린드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바넘은 린드에게 전용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60인조 오케스트라를 제공하는 한편 공연 1회당 1000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1000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만 달러, 한화 약 5500만 원이다. 이는 린드의 평생 꿈이었던 공공 무상 학교를 건립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린드는 바넘과 18개월짜리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계약 즉시 바넘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 미국에 날아왔다’고 광고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흥행업자였던 바넘은 단순히 린드의 가창력을 광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럽에서 린드의 위상, 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린드의 성격 등을 강조했다. 바넘은 린드의 목소리를 “고통을 치유하는 하늘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린드가 탄 배가 미국 뉴욕 항구에 입항할 무렵에는 바넘의 천재적인 홍보 감각이 빛을 발하며 이미 미국에서 ‘린드마니아’ 현상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3만 명에서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린드를 환영하기 위해 찾아와 항구를 가득 메웠다. 린드의 첫 공연 티켓은 경매를 통해 매진을 기록했다.

린드는 그 뒤로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15개 이상의 도시와 쿠바 아바나에서 100회 가까이 공연을 열었다. 티켓 판매량이 많은 것은 기본이었다. 입장하지 못한 군중을 위해 린드가 건물 탑에 올라 노래를 한 적도 있었다.

린드가 탄 기차가 정차하는 도시마다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린드 시가’, ‘린드 장갑’, ‘린드 스카프’, ‘린드 모자’, ‘린드 향수’, ‘린드 인형’ 등 ‘린드’가 붙은 다양한 상품이 제조돼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거의 모든 곳에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던 시대였다. 린드는 그 자체로 미국에서 문화가 된다.

미국 뉴욕의 캐슬 가든은 제니 린드의 첫 미국 투어 무대였다.|퍼블릭 도메인

사랑과 마지막

린드는 자신의 전용 작곡가로 고용된 오토 골드슈미트와 서로 호감을 느꼈고, 이내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852년 미국 보스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열린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 린드의 아메리카 대륙 투어는 총 70만 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800만 달러(한화 약 386억 원)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후 린드는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왔다. 공연 수익 대부분을 자선 사업 및 학교 건립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으며, 남은 여생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을 하며 살았다.

린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축음기가 등장하기 전이었으므로 안타깝게도 린드의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따뜻하고 사랑 넘치던 린드의 면모는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더스틴 배스는 팟캐스트 방송 ‘더 선 오브 히스토리’의 공동 진행자다. 에포크타임스에 매주 ‘역사 속 프로필’과 ‘역사 속 이번 주’ 두 가지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다.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