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원을 점령하라” 시진핑 지시설까지…대만 당국 “예의주시”

강우찬
2024년 05월 30일 오후 4:23 업데이트: 2024년 05월 30일 오후 6:24

대만 ‘의회개혁법안’ 강행 통과 둘러싼 여야 갈등 지속
“시진핑, 국회 혼란 빠뜨리라고 지시했다” 의혹 확산

라이칭더 대만 신정부가 출범한 가운데 중국 공산당(중공)의 침투에 비상이 걸렸다.

대만 국가안전(안보)국은 최근 입법원(국회) 파행과 관련, ‘시진핑의 지시’가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반침투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29일 차이밍옌(蔡明彥) 대만 국가안전국장은 입법원에 출석해 “중국 공산당은 실제로 (대만) 중앙정부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 및 단체들 사이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다”며 이같이 답변했다.

앞서 지난 17일 대만 입법원에서는 국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정부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회개혁법안’ 통과를 두고 여야 의원들 사이에 몸싸움까지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소야대 정국인 대만 입법원에서 친중 성향의 제1야당 국민당이 주도하고 제2야당인 민중당 일부 의원들이 가세해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여당인 민진당은 육탄 공세로 이를 저지했다.

결국 이 법안은 28일 야당의 주도로 재석 의원 103명 중 58명 찬성으로 통과됐고, 대만 내각은 이를 거부하면서 입법원에 해당 법안 재검토를 요청하기로 했다.

‘의회개혁법안’은 입법원의 수사 권한을 더 확대하고 의원들이 총통과 기업은 물론 일반 개인까지 소환해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조사를 거부하면 최대 10만 대만달러(약 424만원), 허위 진술 시 최대 20만 대만달러(약 849만원)의 벌금을 중복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소환된 정부 관리나 기업인들이 의원들의 질의나 정보 제공 요구에 무조건 응할 수밖에 없어 국방 정보와 기업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지적되고 있다. 갓 출범한 라이칭더 정부를 시시콜콜 트집 잡아 국정을 방해하기 쉽게 하려는 포석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야당의 ‘의회개혁법안’ 강행 통과에 관한 논란의 불길을 더 크게 지핀 것은 이번 사태 배후에 “대만 입법원 고지를 점령하라”는 시진핑의 지시가 있었다는 의혹이다.

“시진핑, 통일전선공작 지시…입법원을 전쟁터로”

이 의혹은 지난 2월 해외의 중국 평론가가 제기한 바 있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입법원 몸싸움 사태가 불거진 이후 새롭게 조망을 받게 됐다.

호주에서 활동하는 중국 베이징 출신의 법학자 겸 중국 평론가 위안훙빙은 시진핑 중공 총서기가 “입법원을 전쟁터로 삼아 대만을 혼란에 빠뜨려라”는 통일전선공작 실행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위안훙빙은 “시진핑의 지시가 떨어지자 국무원 산하 대만사무판공실(중공의 대만 전담 기구)이 신속하게 움직였다”면서 “지난 1월 27일, 국무원은 시진핑과 왕후닝에게 ‘대만 입법원 고지 점령을 위한 통일전선전략 요점(占領台灣立法院制高點的統戰戰略要點)’이라는 문건을 제출했다”고 했다.

왕후닝은 현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시진핑의 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시진핑이 주창한 ‘중국몽’과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국민당이 라이칭더 정부를 사실상 식물정권으로 만들 수 있는 법안을 강행하면서 입법원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자, 위안훙빙의 ‘예견’에 가까웠던 주장은 ‘팩트’가 아니었냐는 인식이 대만과 중화권에서 퍼지게 됐다.

차이 국장은 이날 입법원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자 “중공의 대만 간섭에 관한 논의 중 특히 입법원 의석 구조가 실제로 변경됐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며 전임 차이잉원 정부 시절 여대야소 정국이 라이칭더 정부 들어서면서 여소야대로 바뀐 상황을 먼저 언급했다.

이어 ‘중공이 대만 각계각층에 접촉해 정치적 이익을 실현할 것’이라며 “이는 향후 (중공의) 대만 정책의 주요 초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공이 이번 대만 입법원의 여소야대 정국을 이용해 대만 사회 곳곳에 침투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의미다.

중공 통일전선 대비한 ‘반침투법’…대만의 구명절초될까

중공이 각국을 상대로 문화 교류, 경제 협력 등 민간 분야를 내세워 사회 지도층을 친중 인사로 포섭하고 현지 언어를 사용하는 댓글부대나 가짜뉴스 사이트를 동원해 친중 여론을 부추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달 29일 중공이 스파이 활동을 강화하면서 유럽 각국 안보당국이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전직 의회 연구관 등 영국인 2명이 중공에 정보를 넘긴 혐의를 받았고 독일에서는 방위산업 기술을 중공 정보기관에 빼돌린 혐의로 독일 국적자 3명이 체포됐다.

가장 최근에는 영국 BBC가 필리핀 루손섬 반반시의 여성 시장 앨리스 궈의 중공 간첩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중공 스파이들이 전 세계에서 암약하고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대만 역시 이러한 중공의 침투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난 2019년 12월 ‘반침투법안’을 가결했다.

‘반침투법’은 외부 적대 세력의 자금 지원이나 지시, 기부금을 받은 자의 선거 개입 및 로비, 공공질서 저해 행위 등을 금지하며 위반 시 5년 이하 징역형이나 최대 1천만 대만달러(약 4억 2천만원)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야당인 국민당은 ‘정치 탄압’에 악용될 수 있다며 이 법안의 통과에 극렬히 반대하며 표결에 불참했으나, 차이잉원 당시 정부와 민진당은 정치적 리스크를 무릅쓰고 법안을 통과시켰다.

차이 국장은 반침투법을 중심으로 이번 ‘시진핑 지시설’을 비롯해 대만 사회를 겨냥한 중공의 통일전선 공작에 대처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반침투법의 범위에는 중국 공산당이 대만 내 관련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원하는 행위, 관련 국가 기밀을 훔치는 행위, 첨단 기술 이전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이 포함된다”고 했다.

또한 “반침투법 제5조는 누구든지 침투를 요구한 측으로부터 ‘선거운동에 관한 법률(遊說法) 제2조에 규정된 로비 행위에 관여하도록 지시, 의뢰 또는 자금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민진당 소속 뤄메이링 의원의 질의에 대해서도 차이 국장은 “이 조항에 해당하는 증거가 있을 것”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한편, 중공 스파이 논란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22년 서울 송파구 소재 중식당 ‘동방명주’와 그 대표 왕해군(중국명 왕하이쥔)의 중공 비밀경찰 의혹이 제기됐다.

한국 당국은 왕하이쥔과 동방명주는 한국 내 중국인의 중국 송환 업무를 처리하는 등 사실상 중공의 비밀경찰 역할을 해왔다고 판단했지만, 현행법상 마땅한 처벌 조항이 없어 간첩죄가 아닌 ‘식품위생법’ 등의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에 지난해 6월 최재형 의원이 왕하이쥔 등 중공 부역자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외국대리인 등록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으나,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고 22대 국회가 시작하면서 자동 폐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