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안에서도, 밖에서도 ‘품위’를 지킨 사나이…그레고리 펙

루돌프 램버트 페르난데스(Rudolph Lambert Fernandez)
2024년 05월 20일 오후 8:27 업데이트: 2024년 05월 20일 오후 8:46

1962년작 영화 ‘앵무새 죽이기’ 속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흑인을 변호하던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결국 소송에서 지고 만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애티커스의 법정 싸움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었고, 애티커스가 패소하는 순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비인간적 조건에 처한 타인을 향한 인류애를 보이는 인물, 다시 말해 도덕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애티커스를 연기한 배우는 그레고리 펙이었다. 할리우드의 전설로 불리는 그레고리 펙은 공정의 목소리와 진실의 얼굴을 지닌 배우였다. 자신의 출연작 중 가장 좋아했던 이 작품으로 펙은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에서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역을 맡은 그레고리 펙이 억울한 누명을 쓴 토마스 로빈슨을 위해 변호 중인 장면|MovieStillsDB

패밀리 맨

영화 ‘오멘’에서 펙과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리 레믹은 펙에 대해 “펙은 강인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단단한 모든 것들을 대표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사실 펙의 유년 시절은 결코 단단하지 못했다. 1916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난 펙은 5살이 채 되기 전 부모가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친할머니 손에 큰 펙은 어린 시절 내내 안정적인 가족을 꿈꿨으며, 경제적인 형편 또한 어려워 어려서부터 신문 판매, 웨이터, 설거지, 운전기사, 잡역부, 안내원, 연극 단역 등 일거리가 주어지는 대로 일했다.

펙은 가족이 없는 설움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 성숙한 마음가짐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 신자인 펙은 한때 사제가 되기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1946년 영화 ‘가장 특별한 선물’에서 펙은 가출한 10대 초반 아들을 둔 자상한 아버지를 연기했다. 극 중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장면에서 펙은 이런 대사를 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은 순탄하고 편하길 바란다. 그래. 괜찮다, 아들아… 하지만 쉽지 않단다.”

그 시대 배우로서는 드물게 전속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던 펙은 자신의 의지대로 배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펙이 선택한 대부분의 배역은 도덕적 권위와 공감 능력이 있는 캐릭터였다.

일각에서는 펙이 ‘갈등 요소가 있는 악역 연기를 지나치게 피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펙은 격투기를 즐긴 다른 동료 배우들보다 주먹을 덜 사용했다.

그러나 펙은 그들보다 더 자주 싸웠다. 펙은 폭력성, 자존심, 자기 연민과 싸우는 인물들을 연기했다. 펙은 알고 있었다. 선(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고요한 전투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1943년, 그레고리 펙|퍼블릭 도메인

품위를 지킨다는 것

청년일 때부터 펙은 생물학적 나이를 뛰어넘는 지혜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무대에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자신의 영화 데뷔작인 ‘천국의 열쇠(1944년 작)’에서 당시 28세였던 펙은 80대 노인이 되는 젊은 신부를 연기했다. 펙은 영화 연기 관련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으나, 선(善) 그 자체를 연기하며 해당 배역을 뛰어나게 소화했다.

189cm의 큰 키와 깊고 당당한 목소리의 소유자인 펙은 존 웨인이나 찰턴 헤스턴 같은 육체적 마초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펙의 남성성은 성실함, 온화함 같은 것들에서 발현됐다.

열정이 넘치는 몇몇 감독들은 펙이 ‘주먹으로 벽에 구멍을 뚫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랐을 테다. 펙은 대신 다른 행동들로 감정을 표현했다. 입술을 다물며 침묵을 지키고, 이마에 주름을 잡고, 넓은 가슴을 꼿꼿하게 펴고, 고개를 숙이거나 들어 올리고, 턱을 괴는 방식들로 자신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펙은 “두려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영웅은 믿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펙은 화를 낼 때에도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고, 소리를 지르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통제력을 잃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에 출연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MovieStillsDB

이러한 성향에서 비롯된 자신의 한계를 펙 본인도 알고 있었다. 품위 있는 면모로 인해 펙은 액션이나 코미디 장르를 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대로 펙이 빛나는 장르는 드라마였다.

성직자, 언론인, 외교관, 변호사, 의사, 군인, 대통령… 펙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한을 책임감 있게 행사하는’, 혹은 ‘큰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남용하는 악(惡)에 맞서 싸우는’ 배역을 연기했다. 도덕 신념이 확고한 인물상은 펙의 상징과도 같았다.

언젠가 펙은 수만, 수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이야기 대신 엔터테인먼트의 질을 높이는 방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수백만 달러를 버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공감을 키우고,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위선과 탐욕과 허위를 꿰뚫고, 유머 감각이 살아 있으며, 우리에게 빛을 남겨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펙의 이 같은 발언은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 크고 진실되게 울려 퍼지는 측면이 있다.

펙은 개인주의자였으나, 결코 개인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미국암협회,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미국영화연구소 등 각종 단체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1967년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상하자 펙은 “그저 나의 신념대로 살았을 뿐인데 박애주의자로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배우 본인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도덕과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인물들을 연기한 배우, 펙은 ‘미국, 미국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레고리 펙의 이 같은 면모는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루돌프 램버트 페르난데스는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는 독립작가다.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