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 이야기는 예술작품의 소재로 사랑받는다. 그들의 비극적 서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관계와 감정, 발전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음유시인이자 리라의 명수이고, 에우리디케는 그의 아내이다. 에우리디케는 양봉과 낙농을 상징하는 인물인 아리스타이오스에게 쫓기다 뱀에게 물려 치명상을 입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오르페우스는 지하계를 찾아가 하데스에게 아내를 돌려주길 간청한다.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리라 연주로 지하계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그의 음악과 정성에 감복해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아내를 이승으로 돌려주겠다 약속한다.
하데스의 조건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는 동안 이승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다.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뒤에 세워두고 앞장서 이승으로 향했다. 이승의 문턱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너무 그리웠기에 한발 앞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저승으로 끌려갔다.
사랑하는 아내의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오르페우스는 절망에 빠져 광야를 방황하며 노래 연주로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다 그는 마이나데스족 여인에게 살해돼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상실에서 창조되는 예술
음악, 시, 그림, 조각 등 대부분의 창조는 상실과 획득에서 파생된다. 특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에서 그가 뒤돌아 아내를 보는 행동은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뒤돌아봄으로 인해 그는 아내를 잃었지만, 대신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상실과 획득을 반복한다. 창작 과정의 대부분은 이후에 더 수준 높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초안을 폐기하는 등 여러 희생을 겪는다.
희생의 행동
고대 로마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인물인 베르길리우스(B.C. 70~B.C. 19)는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본 순간에 대해 “그는 멈춰서 빛의 경계에 서 있었다. 빛에 닿기 직전에 그는 아쉽게도 무심결에 에우리디케를 돌아봤다”라고 설명했다.
오르페우스는 그 순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는 동시에 두 번째 상실을 겪었다. 이 상실감은 아름답고 애절한 음악을 탄생시켰다. 이 과정은 모든 예술가가 겪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코로의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의 작품 ‘지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이끄는 오르페우스’는 신화 속 한 장면에 주목한다. 코로는 유화 물감의 질감과 색감을 활용해 미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채도가 낮은 회색, 녹색, 파란색을 사용해 하데스와 아직은 생명을 찾지 못한 에우리디케, 지하 세계를 묘사했다. 오르페우스에게만 사용된 희미한 살색이 그와 대조를 이룬다.
코로는 유화에 사용되는 안료와 기름의 비율을 조절해 작품 속에 여러 질감을 부여했다. 특히 그는 나뭇잎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붓을 사용해 붓의 거친 털이 물감을 긁어내도록 했다. 재료에 대한 많은 연구와 시도를 통해 이 작품은 지하 세계의 음울한 분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화면의 왼쪽에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감명받은 유령들이 몰려있다. 코로는 유령의 모습을 안개에 가린 듯 희미하게 그려내 원근감과 지하 세계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와 대조되게 섬세하고 선명하게 묘사된 오르페우스의 모습은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리라를 높이 들고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죽은 존재에까지 감동을 주는 예술의 가치와 승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화면을 전체적으로 채운 음울한 안개와 어두운 색채는 지상을 향해 힘차게 걷는 오르페우스의 희망과는 반대로 비극이 결말로 다가올 것임을 암시한다.
로댕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대리석 등의 돌은 딱딱한 물성을 지녀 영혼의 희미하고 연기 같은 본질과 상반된다. 그렇기에 영혼을 묘사할 때 대리석은 비교적 직관적이지 않은 매개체로 여겨진다. 하지만 근대 조각의 시초로 불리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대리석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모습을 발견해 그 모습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로댕은 신화 속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덜 가공된 대리석의 질감을 활용해 지하 세계에서 올라오는 부부의 모습을 묘사했다. 에우리디케의 머리 뒤쪽은 그녀가 나온 거대한 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가공이 덜 된 작은 대리석 덩어리가 그녀의 왼팔과 오르페우스의 몸을 연결하고 있다. 그들의 다리 사이에도 미가공 대리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그녀가 아직 저승에 묶여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비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 기법은 로댕의 또 다른 작품 ‘지옥의 문’에도 사용됐다.
에우리디케의 희생으로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그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이처럼 사랑하는 대상, 특히 예술가의 정체성과 삶에 의미를 부여한 대상의 희생은 또 다른 예술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 이는 조각가에게도 똑같이 해당한다. 조각가는 보다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해 대리석을 깎아내고 재료를 희생하고 소모해야 한다.
워터하우스의 묘사
코로와 로댕은 오르페우스 이야기 중 에우리디케가 존재했던 순간을 담고 있지만, 영국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는 그녀의 부재를 통해 만들어진 비극적 순간을 묘사했다.
마이다네스족 여인들은 자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오르페우스를 살해한 후 시체를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 워터하우스는 오르페우스가 사망한 후의 순간을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발견한 님프’(1900)에 묘사했다.
작품 속 두 명의 여인은 강둑에 앉아 물 위로 떠오른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가 평생 소지했던 리라는 그의 머리 곁에 함께 떠 있다. 고대 로마의 또 다른 시인 오비디우스(B.C. 43~B.C. 17)는 이 순간에 대해 “오르페우스의 생기 잃은 혀는 여전히 노래를 중얼거리고, 리라는 여전히 곡을 연주했다. 강둑의 새와 나무들은 그의 슬픔에 함께 애도했다”라고 묘사했다.
이 장면에는 에우리디케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그리움과 고통은 존재한다. 이 비극적 이야기에 대해 코로와 워터하우스는 유화를 통해, 로댕은 대리석을 통해 아내의 희생에서 피어난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