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가난한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여류화가 안젤리카 카우프만(1741~1807)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초상화가 중 한 명이다. 신고전주의 작품을 주로 그린 그녀는 400점에 달하는 초상화를 남겼다.
안젤리카는 18세기 여성 예술가로는 이례적인 삶과 경력을 지녔다. 10대 때부터 초상화가이자 오페라 가수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그녀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안젤리카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오가며 견문을 넓혔다. 반짝이는 재능으로 예술계를 사로잡은 그녀는 12세 때 주교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초상화가로 이름을 알렸고, 교회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 주요 예술 중심지에서 본격적으로 예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젊은 예술인들을 화폭에 담다
20세 무렵의 안젤리카는 로마에 거주하며 예술적 시각을 본격적으로 넓혔다. 다양한 고대 조각품, 르네상스 회화를 접하며 전통 예술 양식에 대해 배웠고 귀족과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지도를 높였다. 당시 그녀가 그린 작품 중 하나인 ‘존 모건의 초상화’는 젊은 청년의 기개를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안젤리카는 그녀의 친구이자 의사인 청년을 반짝이는 눈과 야심 찬 표정으로 묘사했고, 그의 손은 ‘나는 살아서 조국에 뮤즈를 데려오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편지를 가리키고 있다.
같은 해, 안젤리카는 독일 출신의 그리스・로마 고대 학자이자 고전 미학의 이상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저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웅장함’의 저자 요한 요아힘 빈켈만의 초상화를 그렸다.
빈켈만은 한 손에 깃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안젤리카는 예술에 대한 깊은 탐닉과 고뇌를 추구하는 빈켈만의 위대한 학자적 이미지를 사실적이면서도 우아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초상화가 완성된 지 1년 후 빈켈만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과 문화 발전에 대한 선구적이자 기념비적인 저서 ‘고대 예술의 역사’를 출간했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미술과 생활의 관계, 정신적 영역까지 재정비하는 새로운 양식을 수립했고 현대 예술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빈켈만과 그 주변의 식자층들은 안젤리카에게 예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 덕에 안젤리카는 고전적인 역사 회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전통적 예술의 구성 기술, 문학적 지식을 습득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인간의 행동을 역사적이며 서사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안젤리카는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예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영국 귀족과 후원자들은 인물과 풍경화에 주로 관심을 뒀기에 안젤리카는 자신이 원하던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주제를 다룰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재개했고, 남은 생을 로마에서 보내며 전통 미술을 추구하게 되었다.
신화와 전통을 그리다
1782년, 제8대 로마 시장 겸 이탈리아 왕국 외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인 오노라토 카에타니(1742~1797)는 안젤리카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 두 개를 그려주길 요청했다.
소설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고대 문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를 모티브로 하여 17세기 프랑스에서 쓰인 작품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여행기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전쟁과 사치를 비난하고 인류애와 진실, 아름다움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당시 루이 14세의 독재 통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내포하고 있기에 장 자크 루소, 토머스 제퍼슨 등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안젤리카는 텔레마코스와 노인으로 변장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칼립소 해변에 도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과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텔레마코스의 모습을 담은 그림 두 개를 그렸다. 그녀는 온화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와 표현기법으로 고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구현했다. 이 작품들은 당대 지식인 사회와 대중에게 큰 호평을 얻었다.
많은 예술인과의 교류로 시대를 이끈 예술가
로마로 돌아온 안젤리카는 이후 20여 년 동안 로마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독일의 고전주의 작가이자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와도 돈독한 친분을 쌓으며 괴테의 초상화와 그의 저서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여행’에서 안젤리카를 재능 있고 근면한 예술가이자 사려 깊은 여성으로 자주 묘사했다. 또한 그는 한 서신에서 안젤리카에 대해 “그녀는 매일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예술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도 항상 ‘자신(안젤리카)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안젤리카는 당대 예술인과 끊임없는 교류와 자기 성찰, 노력을 바탕으로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수많은 예술품을 남기고 떠나다
안젤리카는 1807년 11월 5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00여 점의 작품과 다양한 미술 및 서적 수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신고전주의 조각가이자 ‘신의 조각가’로 불리는 안토니오 카노바가 지휘를 맡았다. 또한 장례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장례식을 모티브로 해 화려하고 웅장하게 거행되었다. 그녀의 그림 두 점이 행렬에 실렸고, 그녀의 흉상은 판테온 내 라파엘로 흉상 옆에 안치됐다.
안젤리카 카우프만의 장례식 풍광과 규모는 그녀가 당시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그리고 다수의 위대한 남성 예술가들 사이에 그녀가 차지한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증명한다.
다얀(Da Yan)은 유럽 미술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자란 그는 미국 북동부에 거주하며 미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