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중공)은 27일 리커창(李克强)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원 총리가 전날 6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중공 관영 CCTV는 이날 오전 8시에 “구조에 전력을 다했지만 효과가 없었다”며 리커창의 사망을 보도했다.
리커창은 26일 오후 숨졌지만 관영 CCTV는 최소 8시간이 지난 27일 오전에야 이를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왜 8시간의 시차를 두고 리커창의 죽음을 알린 것인지에 관해서는 중공 지도부가 모종의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웨이보 등 중국 소셜미디어에서는 한때 리커창에 대한 검색이 제한되었는데, 이를 두고 시진핑(習近平) 중공 총서기와는 다른 견해를 내세우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총리였던 그에 대한 지우기가 벌써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엘리트 경제학자…공청단 소속 중공 2인자
시진핑이 집권한 10년 동안 리커창은 총리로서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장 일관된 평가를 받은 인물이자, 가장 입지가 약한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리커창은 장시성 우닝(武寧)을 본관으로 1955년 7월 1일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펑싼(李奉三)은 안후이성 펑양현 현장과 벙부시 중급법원 법원장을 역임했다.
아내 정훙(鄭虹)은 베이징 수도경제무역대학에서 영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한 명이 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에 진학한 후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했다.
어린 시절 리커창은 허페이에서 성장해 안후이성 펑양현에서 공산당 지부장을 지낸 적도 있으며, 1970년대 말 대학입시제도가 재개되면서 베이징대 법학부에 진학해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베이징대 경제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리커창은 베이징대학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이후 중앙조직에 진출, 1993년 제1서기에까지 올랐다. 이후 허난성 및 랴오닝성 성장을 거쳐 2007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작년 퇴임), 2008년 국무원 부총리, 2013년 총리에 올라 시진핑 집권 10년간 중앙정부 최고책임자가 됐다.
친서민 이미지가 강한 리커창의 주된 과오로는 성장을 맡았던 기간 허난성에서 발생한, ‘수혈용 혈액 오염’으로 인해 에이즈(HIV) 바이러스가 확산한 사건이 거론된다. 실제로 이 기간 허난성에서는 에이즈 감염자가 증가했었다.
이로 인해 천빙중(陳秉中) 중국보건교육연구소 전 소장은 “과거 책임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총리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시진핑과 대립각…“6억 명 월 소득 17만원 이하” 발언도
리커창은 중국의 부정확한 통계수치에 관해서도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리커창은 랴오닝성 성장이었던 시절 주중 미국 대사와의 회동에서 당시 중국의 GDP 수치에 관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불신감을 드러냈다.
엘리트 경제학자였던 그는 랴오닝성 경제를 평가할 때 중요한 세 가지 지표로 전력 소비량, 철도 운송량, 은행 대출량을 꼽으며 “이 수치는 조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세 지표는 지금도 일부 중국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국 경제의 실상에 가장 가까운 지표로 평가되며, 리커창 총리가 추진한 경제정책이자 시진핑 집권 초 효력을 냈던 ‘리커노믹스(리커창+리커노믹스)’는 이 지표들에 상당 부분 의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리커창은 많은 시사평론가와 여론에 의해 자유주의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러한 리커창의 경제 철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진핑이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리커창의 행동반경은 점점 좁아졌고, 점차 두 사람의 불화설이 불거지게 됐다.
2019년 말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이듬해 1월부터 중국 전역으로 확산하자, 시진핑은 엄격한 봉쇄 조치와 대규모 PCR 검사를 시행하는 ‘코로나 제로’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대량의 인도주의적 문제를 일으켰고, 봉쇄 2년이 흐른 2022년에는 경제 침체가 뚜렷해졌다. 이 과정에서 리커창 총리는 경제 침체를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도입했고 여기에는 노점상을 장려하는 정책도 포함됐다.
작년 연말, 코로나 제로 정책에 반대하는 ‘백지 운동’이 베이징 명문대생들을 중심으로 발생해 전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자, 시진핑은 제로 코로나를 철회했지만 중국 경제는 여전히 침체한 상태다.
리커창은 지난 3월 퇴임 전까지 시진핑과 의견이 맞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특히 2020년 “중국인 6억 명의 월 소득이 1000위안(약 17만원) 이하”라며 공개적으로 발언해 당시 ‘빈곤퇴치 완료’를 선전하던 시진핑 정권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고별인사로 “하늘이 보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 남겨
작년 8월, 중공 수뇌부의 베이다이허 회의 이후 리커창은 선전을 방문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을 추모했다. 이런 행보는 마오쩌둥식의 철권통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된 시진핑과의 정치적 대립 입장을 시사하는 것으로 외부에서는 해석됐다.
이 모습을 담은 영상은 중국판 카톡인 위챗을 통해 퍼지며 당시 제로 코로나 상황에서 불만이 누적되던 여론의 호응을 얻었으나 곧 삭제됐다.
올해 2월 말, 퇴임을 코앞에 둔 리커창 총리는 약 800명의 국무원 직원과 함께한 고별인사 자리에서 짧은 연설을 하며 “하늘에는 눈이 있고, 하늘이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말로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특정 인물을 향한 경고처럼 해석될 여지를 남겨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이 영상 역시 소셜미디어에서 확산되다가 당국의 검열로 삭제되면서 자취를 감춰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었다.
지난 3월, 중공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열렸고 리커창은 전인대 대표들 앞에서 국무원 총리로서 퇴임 전 마지막 정부활동 보고를 수행했다.
이후 동영상에는 시진핑이 총리로서 마지막 직무를 수행한 리커창과 건성으로 악수하고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돌아가는 모습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