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문한답] 정율성 기념사업 왜 문제인가?

에포크미디어코리아&한반도선진화재단 프리미엄 리포트

이윤정
2023년 09월 15일 오후 4:43 업데이트: 2024년 01월 10일 오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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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기념사업 왜 문제인가요?

답변_최창근 중국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후 대만 국립정치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대에서 박사를 수료했다에포크미디어코리아 산하 중국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위원을 맡고 있다.

-정율성은 어떤 인물인가요?

“다수 한국인에게 아직은 낯설지만, 중국에서는 ‘중국 군가의 아버지’라는 별칭도 얻을 만큼 유명한 작곡가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제2국가(國歌)로 꼽히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은 중국 국가 ‘의용군진행곡’을 작곡한 녜얼(聶耳), ‘황하대합창’을 쓴 센싱하이(洗星海)와 더불어 현대 3대 음악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도 정율성의 명성은 높습니다. 북한 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가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표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는 정율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정율성은 중국의 걸출한 작곡가이다. 또한 유명 국제주의 전사이다. 그중 ‘인민해방군행진곡’은 순박하고 간결한 언어와 울림이 있으면서도 힘 있고 장엄하고 호방한 곡조를 담고 있다. 인민군 군인의 이미지를 강하게 새겼다. 인민해방군의 무한한 전투 품격과 산이 첩첩이 줄을 서고 바다를 뒤집는 기세를 보여준다.’”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요?

“일각에서는 그를 항일(抗日)운동가이자 걸출한 음악가로 평가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반대편에서 북한·중국을 음악으로 찬미한 공산주의자일 뿐입니다.”

“정율성의 삶은 ‘희미한 항일행적, 뚜렷한 공산주의 궤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한평생 공산주의자로서 산 정율성의 항일 행적은 난징에서 도·감청 업무에 종사한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공산주의자로서 북한 노동당과 인민군,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을 위해 예술혼을 불태운 행적은 뚜렷합니다.”

-그의 성장 과정은 어땠나요?

“정율성은 1914년 광주광역시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호적상 이름은 정부은(鄭富恩)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정구모(鄭龜摸)’로 불렸습니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한학자 출신으로 미국 남장로회가 설립한 미션 스쿨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어머니 최영온(崔英溫)은 개명한 지역 유지 집안 출신입니다. 정율성의 친·외가는 기독교(개신교)와 인연이 있습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율성의 형제자매는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째 형 정효룡(鄭孝龍), 둘째 형 정충룡(鄭忠龍)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했고,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도 뒤를 따랐습니다. 이는 정율성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항일운동가로 평가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1933년 정율성은 중국 상하이를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난징 구러우(鼓樓)전화국에 잠입해 난징-상하이 간 일본인 전화 도청 업무를 수행했는데 이 경력이 정율성의 유일무이한 항일 경력입니다.”

“난징에서 활동할 때,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성악가 크리노바(Krennowa)로부터 음악을 사사(師事)했습니다. 이 무렵 ‘부은’이라는 본명 대신 ‘선율(旋律)로서 성공(成功)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개명합니다. 일설에는 의열단을 설립한 김원봉이 지어줬다고 전해집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행적은 어떤가요?

“1936년 정율성은 좌파 청년 조직 5월 문예사(五月文藝社)에 저우취타오(鄒趣濤)의 시에 곡을 붙여 ‘5월의 노래’를 발표하며 입회했습니다. 이듬해(1937) 공산주의 조직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했고, 그해 10월, 중국공산당 근거지 산시(山西)성 옌안(延安)으로 갔습니다.”

“옌안에서 정율성은 산베이공학(陝北公學·오늘날 중국인민대학, 베이징이공대학, 시베이정법대학, 옌안대학 전신)에 적을 두고 공부했습니다. 3개월 과정 이수 후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입교해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루쉰예술학원 재학 시절이던 1938년, 정율성은 삶의 전환점이 되는 ‘옌안송(延安頌)’을 작곡했습니다. 중국 공산당 혁명 근거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로 당시 여성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가던 모예(莫耶)의 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훗날 정율성은 ‘옌안송’을 작곡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옌안은 항일과 혁명의 성지였다. 아쉽게도 그런 옌안을 수많은 중국인에게 알리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옌안과 옌안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옌안 정신이란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 혁명 정신이다.’”

-한국인이 중국 공산당에 헌신한 셈이군요.

“1938년 루쉰예술학원 졸업 후 정율성은 중화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華人民抗日軍事政治大學·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습니다. 그 시절 작곡에 매진해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10월 혁명 행진곡’을 비롯해 ‘항전 돌격가’ 등을 작곡했습니다. 항일군정대학 재직 시절 정율성은 중국인과 결혼했다. 대학 여학생대 간부로 일하던 딩쉐쑹(丁雪松·정설송)입니다.”

“조선인 정율성은 1939년 1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을 신청했습니다. 훗날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이 되는 무정(武亭·김무정), 북한 정치보위상 등 요직을 역임하는 박일우 등이 신원보증을 했습니다.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정율성은 중국공산군과 마오쩌둥을 위한 찬양곡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을 작곡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갔다면서요?

“1945년 일본 패망 후 정율성은 고국행을 택했지만, 목적지는 고향 광주가 아닌 북한이었습니다. 1945년 12월 정율성은 아내 딩쉐쑹, 딸 정샤오티와 함께 조선으로 갔습니다.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에는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조선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원회 선전(宣傳)부장,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장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장으로서 2년여 동안 북한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작곡에도 힘을 쏟아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중조우의(中朝友誼)’, ‘동해 어부’ 등을 작곡했습니다. 그중 ‘조선인민군행진곡’은 북한 군가로 공식 채택됐고,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 받았습니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모범노동자’로 선정됐습니다.”

-6·25전쟁 당시 행적도 설명해 주세요.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발발 무렵, 중국으로 귀환했던 정율성은 1950년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따라 다시 북한에 왔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지원군’이라 칭했지만, 실체는 정규 인민해방군이었습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를 명분으로 참전했습니다.”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 음악이 나의 무기다’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정율성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전선에 투입된다. 비록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인민지원군을 따라 서울까지 내려온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최전선을 피하지 않는다. 책상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정율성의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송서평 중국 시난과기대학(西南科技大學) 교수의 2009년 논문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서는 6·25전쟁 당시 정율성의 음악 활동을 ‘조선(한국)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 정율성은 중국 인민 지원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맹세’, ‘지원군 10찬(讚)’ 등을 작곡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군은 정율성이 작곡한 군가를 부르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침 전쟁을 일으켰고 정율성은 전장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셈입니다.”

-중국 군가의 아버지로도 불립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중국으로 돌아온 정율성은 ‘공산당 찬가’ 작곡에 힘을 쏟았습니다. 재앙적인 공산주의 실험이 행해지던 문화대혁명(1966~1976년) 기간에는 중국 공산당 영수(領袖) 마오쩌둥 찬가(讚歌)를 작곡했고,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주로 맡았습니다. 당시 활동에 대해 송한용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정율성의 사상형성과 지향: 1945년 이전 중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정율성은 철저히 마오쩌둥의 문예강화정신을 추구하면서 성장한 혁명 현실주의 예술가였다. 그는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혁명의 무기이며 전투의 무기라고 하면서, 혁명적 노래는 반드시 새로운 세대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혁명적 정신을 양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생의 대부분을 마오쩌둥 관련 작품 활동을 했던 정율성은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사그라들 무렵인 1976년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광주에서 추진하는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데요.

광주 남구 양림동 정율성 생가 인근에 조성된 정율성거리 | 연합뉴스

“정율성의 행적을 감안할 때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을 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율성 추모 기념 사업은 고향인 광주광역시와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 화순군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2014년 7월, 민선 윤장현 시장 취임 후 광주광역시는 총 사업 예산 71억 원 규모의 ‘차이나 프렌들리(중국과 친해지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6대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친중국 문화관광콘텐츠 활용을 통한 대중국 한류 관광 기반 구축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대중국 홍보 ▲정율성 브랜드 활용 도시마케팅 ▲차이나 프렌들리 도시환경 구축 ▲대중국 문화예술교류 활성화 ▲광주시 대중국 교류 역량 확대·강화 등입니다. 그중 정율성 관련 세부 사업으로는 ▲정율성 사적지 등 주변 정비 ▲정율성 한중음악제 프로그램 확대 추진이 명시됐습니다. 이 밖에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평균 4억 6000만 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정율성 음악제’ 개최 동기에 대해 광주광역시는 ‘광주가 낳은 중국의 3대 음악가인 정율성을 매개로 한 한중(韓中) 문화교류 및 관광 활성화와 공연문화 발전 도모’라고 밝혔습니다. 정율성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광주광역시에는 생가터가 복원됐고 정율성 거리도 조성됐습니다. 48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친북·친중 공산주의자로서 행적이 뚜렷한 정율성을 기념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정율성 기념사업 실무자였던 정창재 전 광주문화예술회관 관장의 2015년 ‘전남일보’ 기고문 ‘정율성 콘텐츠, 이젠 중국 시장에서 돈 벌 때다’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정 전 관장은 글에서 ‘지금 중국은 경제력으로 하루가 다르게 그 위상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는 너무 가까워졌다. 한ㆍ중 FTA 체결, 위안화 직접 결제, 후강퉁(邑港通),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등이 그 가교다. 또 시진핑 주석은 한국 방문에서 정율성은 중국 건국 100대 인물이라며 친밀감을 표시하고 우리를 손짓하고 갔다. 우리(광주)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한다. 중국과 공연 직접투자로 예술을 발전시키고, 중국서 돈도 벌고 관광객을 불러들여 일거삼득의 기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습니다.”

-광주에선 뛰어난 음악가로서 정율성의 업적을 내세웁니다.

“광주가 낳은 음악가 정율성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이를 잘못된 곳에 사용했습니다. 1949년 공산혁명 성공 후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재앙적인 공산주의 실험 속에서 수천만 명의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중국공산당과 그 지도자 마오쩌둥을 찬양했습니다. 정율성이 작곡한 군가를 부르며 북한 인민군은 남침 동족상잔 전쟁을 벌였고, 그는 전쟁 기간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고취했습니다.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을 위한 찬가도 작곡했죠. 이러한 전력을 지닌 정율성을 동향(同鄕) 출신 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찬양하고 기리는 것은 조국을 위해 산화(散花)한 6·25전쟁 호국 영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발상지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지(聖地)입니다. 지난날 광주시민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분투(奮鬪)했습니다. 정율성은 호국 영령도 반일 투사도 아닙니다. 북한과 중국을 위해 평생 자신의 천부(天賦)적 재능을 사용해 봉사한 반(反)대한민국 인사일 뿐입니다. 광주 정신을 욕보이는 정율성을 광주시민들이 기념해서는 안 됩니다.”

-광주시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가 목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중국 관광객 자본 유치를 위한 ‘문화 상징’으로 정율성을 이용하겠다는 발상도 문제입니다. 시쳇말로 돈만 된다면 마오쩌둥 동상을 세울 수도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는 행사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발상이 광주의 민주화 정신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변명입니다.”

“출생지가 광주이고 성장지가 전라남도 화순일 뿐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북한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여러 군가를 지어 북한 정권에 충성했던 정율성으로부터 우리는, 민주 성지 광주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국에서 유명한 작곡가로 알려졌다 해서 그의 사상과 전력을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 걸까요?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용감하게 남한 괴뢰 군대를 무찌르자’던 그의 음악을 이용한 선동은 받아들여도 되나요? 이처럼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으로부터 배울 교훈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정율성 추모·기념 사업은 철회되는 게 합당한 순리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광주시민의 용기 있는 결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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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선진화재단 한선브리프 통권2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