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부동산 시장 구제 의지 약해…지방정부 빚 청산 우선”

FT, 중국 정부 관계자 인용해 “리스크 관리부터”
1경 넘는 지방정부 부채 폭탄…부동산 축소 불가피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몰린 중국 부동산 대기업 비구이위안이 지난 5일 2250만달러(약 300억원)의 달러화 채권을 지급하며 급한 불을 껐다.
앞서 지난 1일에는 비구이위안 채권단이 표결을 통해 39억4천만 위안(약 7152억원)의 위안화 채권 상환 기한을 2026년까지 연장한 데 이어 또 한 번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채권단의 결정과 무관하게 비구이위안 주택을 구매한 자들의 불만은 거의 해소되지 않았다.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내 돈 내고 산 내 집에 왜 입주할 수 없냐”는 구매자들의 항의 영상이 줄 잇고 있다.
중국 경제의 위험 신호는 비구이위안과 헝다 등 부동산 분야 대기업들의 채무불이행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방 은행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이용객의 계좌를 동결하거나 조건을 까다롭게 해 예금 인출을 막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고를 연속 갱신해 발표를 중단했고 ‘철밥통’ 공무원과 교사들의 임금이 수개월씩 체불돼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잇따른다.
중국 공산당 정권 입장에서는 권력 안정을 위해 처리해야 할 청구서가 산더미다. 특히 중국 경제의 30%를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의 안정이 시급한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현재 중국 당국의 우선순위는 판매 감소로 위축되는 부동산 시장 구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통제력 강화다. 경제 성장 둔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서방에 대한 벽을 높이며 정권 안정을 우선시하는 외교 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일 칼럼에서 “(중국) 국가 경제 문제의 핵심은 주택 판매 부진”이라며 “이러한 현상의 일부는 시진핑이 의도한 결과”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정보통신(IT), 핀테크, 사교육 시장에서 잘나가던 중국 민영 기업들이 최근 수년간 “무질서한 자본 확장”, “규제 위반”, “소비자 착취” 등의 이유로 탄압받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익명의 중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중국 중앙은행의 우선순위는 부진한 주택 판매를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중국 정부는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심각해 충격을 감수하더라도 시장을 위축시키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경제 성장의 방향성을 이전까지의 부동산과 인프라에서 서비스 분야로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NYT는 시진핑이 지난해 말 ‘제로 코로나’ 종료 이후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을 단행하면 경제가 회복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주택 판매가 감소하는데도 부동산 분야 길들이기를 계속했으며 여기에는 지방정부 부채 리스크 해소가 포함됐다고 전했다.
중국 지방정부들이 재정 수입의 50% 이상을 부동산 기업들에 토지 사용권을 팔아 충당해왔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동산 기업들의 부진이 지방정부 채무 리스크로 직결되는 이유다.
다만 시진핑의 부동산 시장 위축 정책이 중국 경제의 또 다른 문제점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아시아안보구상 중국문제 선임연구원 덱스터 로버츠는 “중국 정부는 재무재표에 잡히지 않는 지방정부의 9조 달러(약 1경2천조원) 규모의 채무를 청산하려 한다”며 부동산 개발과 인프라 구축을 동결할 것으로 전망했다.
로버츠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되면 이미 부유한 연안지역과 낙후된 서부 내륙지역 간 격차가 확대돼 경제에 악영향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여 년 이상 공들인 서부 대개발 산업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문제와 관련해 미국 정부의 정책 수립에 영향력을 발휘해 온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EIP)의 마이클 페티스 선임연구원은 “경제 침체 속에서 중국 당국이 부채 처리에 착수하면서 발전된 지역과 낙후된 지역 간의 격차는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페티스 선임연구원은 비구이위안의 2250만 달러 채권 상환에 관해서도 “물론 채무불이행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한 조치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당국 역시 그렇게 보일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의 경제 전문가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 하락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타이베이해양과기대 우젠충(吳建忠) 교수는 “경제적 어려움과 재정적 손실이 지속되면서 중국인들의 인내심이 약해지고 있다”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조금 참아보자’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4일 중국 최대 민영 자산관리사인 중즈(中植)그룹의 베이징 본사 앞에서는 투자자 수십여 명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중즈그룹이 대주주로 있는 유명 부동산신탁회사인 중룽(中融)국제신탁의 투자상품에 투자했으나, 만기 후에도 회사 측이 약속했던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지 못했다. 미상환 금액은 약 3500억 위안(약 64조원)으로 피해자는 약 15만 명에 이른다.

소셜미디어에 확산된 영상을 보면 투자자 수십 명은 중룽신탁 류양(劉洋) 회장의 이름을 외치며 해결을 요구했으나, 짧은 머리에 흰 셔츠를 맞춰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사람 키보다 높은 흰색 판자를 들고 이들을 둘러싸 보이지 않도록 했다.
현재 중국의 부동산 투자상품에 묶인 금액 중 약 543억 달러(약 72조원) 규모가 관련 업체의 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중국 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업에 중국에 대한 투자 촉진에 나서고 있어 부동산 분야에서의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