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마한 로켓군 사령관, 시진핑이 가장 신임하던 장성
공들인 로켓군, 부정부패 만연…‘군사굴기’에 적신호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 사령관 교체가 사실상 기존 수뇌부 ‘숙청’이었다는 관측이 유력한 가운데, 시진핑의 지도력이 시험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뉴욕의 싱크탱크 아시아 소사이어티 정책 연구소의 라일 모리스 연구원은 전 해군 부사령관을 로켓군 사령관으로, 공군 중장을 로켓군 정치위원으로 임명한 군 인사와 관련해 “여러 면에서 중요한 숙청”이라고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지난달 31일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 상장(대장) 진급식을 열고 로켓군 새 사령관에 왕허우빈 전 해군 부사령관을, 로켓군 정치위원에 남부전구 공군 정치위원이었던 쉬시성을 임명했다.
왕허우빈과 쉬시성은 모두 중장이었으나, 이번 진급식을 통해 상장으로 진급했다. 두 사람 모두 로켓군 복무 경력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해군 출신 인사(왕허우빈)를 로켓군으로 옮긴 결정은 전례 없는 것”이라며 “이는 인민해방군의 하이브리드 전쟁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령관 교체를 두고 ‘군 통합의 일환’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중국 매체나 중국 측 인사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견해다. 로켓군 숙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리스 연구원은 시진핑이 인민해방군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시진핑이 지난 10년간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왔지만, 아직 절대적인 충성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6월,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기율감찰위원회는 작년 10월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고위 군·정치 간부 39명 이상을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정확한 명단은 공개하지는 않았다.
모리스 연구원은 이를 언급하며, 시진핑이 반부패 조사를 통해 당과 군에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여전히 솎아내기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중국 체제 내에 반대세력이 아직도 상당수 잔존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SCMP는 물러난 로켓군 사령관 리위차오는 기율감찰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국 발표나 관영 언론 보도가 없어 확정된 일로 볼 순 없지만 사령관 교체 인사가 단행되면서 사실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모리스 연구원은 이번 숙청의 중요한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시진핑이 가장 신뢰하는 군 장성이자 중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감독해 온 인물(리위차오)을 숙청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대규모 핵전략 변혁을 추진해다는 점, 마지막으로 로켓군이 핵운용 중추 전력으로서 정부가 쏟아부은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는 동시에 부패의 기회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가장 신뢰하는 장군과 가장 공을 들인 부대를 자기 손으로 수술하게 됐다는 점에서 모리스 연구원은 이번 사건이 “제법 오랜 시간을 돌이켜보더라도 시진핑의 리더십에 가장 큰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소사이어티 정책 연구소 중국연구센터의 닐 토마스 연구원 역시 새로 임명된 로켓군 사령관과 정치위원이 각각 해군과 공군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토마스 연구원은 트위터에서 “이는 로켓군 숙청을 확인한 것”이라며 시진핑이 로켓군을 정치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프로그램에 대규모 부패가 있음을 방증한다고 평가했다.
앞서 지난달 28일 SCMP는 리위차오 외에도 현 부사령관 류광빈과 전 부사령관 장전중도 감찰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계 컨설팅 전문업체인 캐나다의 셀시우스에 따르면 로켓군 전·현직 간부 10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모리스 연구원은 이번 사건이 중국선박중공그룹(CSIC)의 후원밍 전 회장의 체포와 유사하다고 전했다.
후원밍 전 회장은 중국의 첫 자국산 항공모함인 랴오닝함 개발을 주도했으며 두 번째 항모인 산둥함 제작까지 총괄한 인물이지만, 2021년 1월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혐의로 체포됐다. 중국 ‘항모 굴기’의 핵심 책임자가 부패 몸통이 된 셈이다.
시진핑 정권이 야심 차게 추진한 사업이 부패로 부실화되는 것은 국방 분야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반도체 굴기’ 역시 정부 투자기금에서 수십조 원대 부패 스캔들이 발생해 좌절한 바 있다.
반부패로 시작한 시진핑 정권, 이전 정권 망령과의 싸움
중국 관료계의 부패는 개혁개방을 타고 확산됐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심했던 때는 장쩌민 전 공산당 총서기 시절이다. 장쩌민의 통치 철학은 ‘3개 대표론’이 대표적이지만 실상은 ‘부패치국’으로 요약된다.
에포크타임스가 발간한 장쩌민 분석집 ‘장쩌민 그 사람’에는 그의 통치하에서 중국이 어떻게 부패대국으로 변모했는지 상세하게 설명됐다.
이에 따르면 장쩌민은 어려서부터 일본 앞잡이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권력과 돈에 눈을 떴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지역 명문 중학교인 양저우 중학교 진학을 시도했으나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1940년대 일본의 난징 괴뢰정부에서 선전부 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권력에 힘입어 양저우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다시 아버지의 힘으로 난징중앙대학에 입학했다. 이 경험은 장쩌민이 권력과 돈에 집착하는 계기가 됐다.
장쩌민은 친일 매국노였던 아버지 대신 공산당에 입당해 투쟁하다가 숨진 삼촌의 양자로 들어가 ‘혁명 투사의 아들’로 신분 세탁을 한 까닭에 삼촌 동료들의 도움으로 상하이 시장직에까지 오르며 승진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권력이 집단지도체제로 균형을 이루던 1989년 6월 24일 총서기에 선출됐고 같은 11월 군사위 주석을 겸직하며 최고 지위에 올랐다. 정부 수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에는 1993년 3월에야 임명됐다.
장쩌민은 최고 지위에 오르자 그해 6월 발생한 톈안먼 학살 사건을 계기로 이전까지 중국의 체제가 “정치적으로 연약했다”고 비판하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당은 표면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했으나, 이면에선 독주체제로 재편됐다.
이 과정에서 당 간부들의 충성심을 이끈 수단이 부패였다. 장쩌민은 집권 후 그 자신이 앞서서 대량의 비리행위를 저질렀다. 이를 본 다른 간부들도 부정축재를 시작했다. 이 기간 군 역시 밀수를 비롯해 불법적인 이권사업에 적극 뛰어들었다.
중국이 2000년대 들어 전 세계인에게 원정장기이식 메카로 떠오른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불법으로 적출한 장기를 이식해 주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환자들에게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이다.
시진핑은 집권 후 2014년 장쩌민의 측근인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를 반부패 조사로 몰락하게 했다. 두 사람은 군인으로서는 최고 서열인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으나, 2000년대 들어서 낙마한 군 최고위직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반부패 운동은 시진핑이 부패한 간부 조직을 도려내는 동시에 당내 최대 라이벌 세력인 장쩌민파를 축출하고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정치투쟁이었다는 게 중국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나 가장 신임했던 로켓군 사령관을 해임하고 수뇌부를 감찰조사하면서 아예 로켓군과 무관한 해군과 육군 장성을 로켓군의 새 사령탑으로 세우는 시진핑의 행보는 그가 3연임에 성공했지만 당내 권력 암투가 여전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