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통증은 오직 개인적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층위 위에서 상연(相連) 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내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 연구자 이기병이 쓴 ‘연결된 고통’의 한 구절이다.
이기병 한림대 춘천성심병원 교수는 2011~2014년까지 3년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외노의원)에서 근무했다. 대학병원에서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곧바로 내과 전문의 면허증을 취득한 그는 외노의원에서 10개 문화권 국가의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언어, 문화의 장벽을 실감했다. ‘연결된 고통’은 외노의원에서 만났던 환자들과 씨름하며 겪었던 희로애락을 담은 책이다.
책에는 “갑상선 호르몬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추가 갑상선 검사를 받겠다”고 고집부리는 조선족 여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 질환에 시달리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네팔 남성,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 치료를 거부하는 가나 청년, ‘옴(진드기)’을 진단받고도 ‘쉼터’에서의 집단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조선족 남성 7명, 요통과 변비로 인해 실신하는 태국 남성 등 다양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교수는 책을 통해 의학이라는 단일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픈 몸들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복기했다.
지난 6월 유튜브 채널 ‘씨리얼’과의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대한민국은 이미 인구 절벽에 직면했다. 우리는 당장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조선족 간병사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먹는 쌀이나 채소를 생산하려면 외국인 노동자가 필수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정부는 올해 농촌에서 일하는 외국 인력을 전년보다 73%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사회 구성원을 고통받는 정도에 따라 상, 중, 하 세 등급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하위 그룹은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략적 기동성이 없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다. 이 교수가 외노의원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반면 상위 그룹은 고통의 구조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사회적 고통에 관심이 없으며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중간층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은 수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연대해서 상부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교수는 “나처럼 중간에 있는 사람이 감수성을 개발하고 밑바닥에 눌려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이 구조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천과 동력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2004년 개원한 외노의원은 2017년 폐원돼 역사로 남았다. ‘연결된 고통’은 외노의원과 그곳을 다녀간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유일한 기록물이 됐다.
이 교수는 “이 책은 가리봉동의 좁다란 진료실 안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복기한 것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이 오는 것은 한 세상이 오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내게 다녀갔던 외국인 노동자 신분의 환자들, 그들은 이 땅에 살며 고통을 견디던 우리 역사의 일부다. 이 기록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고통의 일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거나 적으나마 해석의 여지를 늘려주었기를 소망한다. 누군가가 그 고통에 개입하거나 고통을 완화시키기에 수월하기를, 또 다른 누군가의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신체적 고통이 잠시나마 줄어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한편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는 건강 보험료 이슈에 대해 이 교수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쓴 금액(지급액)은 220억 원이었고 납부액은 2조265억 원으로 집계됐다. 약 89%(1조8천억원) 흑자의 동력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