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내정 간섭성 발언으로 한중 관계가 냉각된 가운데, 야당 의원들이 중국 방문 기간 접촉한 ‘차하얼학회’에 관심이 집중된다.
지난 12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민주당 민생경제위기대책위원회(민생경제대책위) 소속 김태년, 홍익표, 고용진, 홍기원, 홍성국 의원 등 5명이 15일 귀국했다.
이들은 방중 이틀째인 13일 차하얼학회를 방문해 한팡밍(韓方明·한방명) 회장을 만났다.
여당은 이를 두고 싱하이밍 논란 속에 야당 의원들이 중국을 강행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비판했으나 대책위는 두 달 전부터 중국 측 초청으로 마련된 일정이며, 한국 기업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방문 사실과 함께 차하얼학회의 조직과 활동 목적도 언론에 오르내렸다. 민간 싱크탱크이지만, 실상은 공산당의 통일선전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이 야당 정치인을 친중 인사로 포섭하고 ‘정부-여당-한미동맹’ 대 ‘야당-진보진영-친중인사’ 구도를 짜려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회의원들이 외교 활동 차원에서 외국 정부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차하얼학회가 한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의원들의 행보만 부각됐지만, 최근 차하얼학회를 찾은 국내 인사가 민주당 의원들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차하얼학회에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앞서 지난 13일에는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의 차하얼학회 사무실을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다.
민주당 방문 이틀 전, 국내 인사들 차하얼학회 방문
이 자리에는 한국 측 인사로는 노재헌 이사장을 비롯해 김진호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창주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한팡밍 차하얼학회 회장과 학회 동북아 담당 수석연구위원 추궈훙(邱國洪) 전 주한 중국대사, 장충이(張忠義) 차하얼학회 연세대학교 연구센터장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궈훙은 주한 중국대사 재직 시절이었던 2014년 12월 한 포럼에서 사드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추궈훙은 “사드는 북한 핵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고 본다. 사드가 커버하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며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김진호 교수는 중국 본토는 물론 대만, 홍콩 등에서 거주한 경험을 지닌 중국 전문가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시진핑 총서기가 주창한 ‘인류운명공동체’ 이념 연구의 국내 권위자이기도 하다.
인류운명공동체는 시진핑이 2015년 9월 유엔(UN) 총회 연설에서 처음 들고나온 개념으로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내세우고 있지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표방하는 ‘중국몽’의 대외 선전용 버전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김진호 교수는 지난 3월 인민화보가 발행하는 잡지인 ‘중국’ 기고문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인류공동운명체 정신은 이를 서로 실천하며 상호존중을 이어간다면 아시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널리 통용될 수 있는 가치관”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미국과 동맹국, 유럽연합(EU)이 자유민주 이념을 공유하는 ‘가치 동맹’을 결성하고 공산주의 이념 확산을 노리는 중국과 맞서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견해다.
김진호 교수는 연세대에 설치된 중국 공자학원인 ‘공자 아카데미’가 작년 9월 개최한 강연 ‘중국을 논하다’에도 강사로 참여해 ‘인류 운명공동체와 한중일 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한중 국민 간 우호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팡밍 회장, 한국 정계·종교계와 협력관계 구축
차하얼학회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도 교육 중심지로 알려진 하이뎬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주변에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최고 명문대를 포함한 유명 대학들이 밀집한 곳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공공외교와 국제관계이며, 2009년 당시 중국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외사위원회 부주임(차관급)인 한팡밍 회장에 의해 설립됐다.
국제관계는 물론 한반도 문제, 신장 위구르, 티베트 인권 및 외교 부문에서 중국 공산당 고위층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한 중국대사였던 추궈훙이 퇴임 후 동북아 담당 수석연구위원으로 초청됐다는 사실도 민간 싱크탱크 차하얼학회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러한 한팡밍 회장이 힘을 쏟는 곳이 한국과의 관계다. 차하얼학회 공식 홈페이지의 학회 동정란을 들어가면 최근 10개 소식 중 6개가 한국과 관련됐다.
올해 4월 11일 한팡밍 회장은 한국 서울을 방문해 ‘한중의원연맹’ 회장인 홍영표 의원(민주당)을 만나 오찬을 갖고 한중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장충이 차하얼학회 연세대학교 연구센터장 등도 함께 했다.
한중의원연맹은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은 작년 12월 초 공식 출범한 국가 간 의원연맹으로 여야 의원 100명이 모인 대규모 조직이다. 홍영표 의원이 연맹 설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팡밍 회장은12일 정명근 화성시장(민주당)과도 만났다. 화성시는 차하얼학회와 ‘공공외교 강화 및 EGS 가치 실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학회 측은 홈페이지에서 한팡밍 회장은 경기도청 수석 외교고문을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
13일에는 김진표 국회의장(민주당)이 한팡밍 회장을 환대했다. 두 사람은 만찬을 같이했고 이 자리에는 싱하이밍 중한 중국대사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지난달 26일 국회의장 관저에서 한팡밍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차하얼학회 전국협으회 대표단을 만나 연회를 갖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한중관계, 경제무역협력, 문화교류에 관해 논의하고 협력증진의 중요성을 만장일치로 강조했다고 학회 홈페이지에서는 밝혔다.
차하얼학회, 한국 불교 1·2위 종단과 접점
중국 공산당은 무신론을 신봉하며 원칙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한팡밍 회장은 한국에서 종교단체와의 우호관계 구축에도 힘써왔다.
한팡밍 회장은 한국을 방문한 지난 4월에도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도 예방했으며, 앞서 작년 10월에는 차하얼학회 관계자들과 원불교 중앙총부를 방문하고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에 중국 전문서적 200여 권을 기증했다.
태고종과도 돈독한 관계를 이어왔다. 한팡밍 회장은 2014년 3월 서울 종로 태고종 총무원을 방문했는데 한국 매체 ‘불교저널’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한팡밍 회장은 태고종에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중국에서 매년 열리는 종교 교류회에 참석해줄 것, 다른 하나는 중국 정부가 공식 초청할 테니 같은 해 5월 베이징 차하얼학회를 방문해달라는 것이었다. 한중 간 불교 교류와 관련해 긴밀히 협의하자는 취지였다.
같은 해 7월, 박근혜 정부 시절 이뤄진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한국 국빈 방문에 정협 외사위원회 부주임 신분으로 수행했던 한팡밍 회장은 서울 종로구의 태고종 총무원을 또다시 찾았다. 석 달 뒤 태고종은 한팡밍 회장을 태고종 총고문으로 위촉했다.
한팡밍 회장은 2014년 한 해에만 태고종과 4차례 이상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태고종은 순천 선암사의 소유권을 두고 조계종과 오랜 법적 분쟁 중이었다. 2014년 4월 법원 판결(1심)으로 승소했으나 문제가 해소되진 않았다. 현재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으나 두 종단 간 갈등은 진행 중이다.
차하얼학회와 한팡밍 회장은 태고종과 갈등 중인 조계종과도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다. 조계종과 태고종은 한국 불교계 주요 종단이며, 신도 수나 소속 사찰 숫자에서 각각 1위와 2위 규모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2011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차하얼 공공외교 연례회의 2011’에는 당시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이 참석해 중국이 위협적인 이미지를 바꾸려면 불교를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2013년에는 한팡밍 회장이 조계종 관계자를 초청해 함께 티베트를 답사했으며, 조계종은 중국이 추진하는 허베이성 숭덕사 복원 사업에 설계를 지원하기도 했다. 사업 자금은 차하얼학회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