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연방법원에 출석해 불법 기밀반출 등 37건의 중범죄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트럼프 측 변호인 도트 블란치 변호사는 이날 오후 3시께 플로리다주 남부 연방지방법원(마이애미 연방법원)에서 열린 기소인부 절차에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참석해 “우리는 확실히 무죄를 주장한다”고 말했다.
기소인부 절차는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기소 내용을 고지하고 공소사실에 대해 신문한다.
트럼프의 또 다른 변호인인 앨리나 하버 변호사는 법원 앞에서 기자들에게 “우리는 미국의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며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표적 수사는 쿠바나 베네수엘라 같은 독재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 법무부·연방수사국( FBI)과 트럼프의 악연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화당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부터 시작됐다.
법무부는 트럼프 본인은 물론 그 일가 친척까지 샅샅이 수사했다.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 승리해 대통령이 된 후에는 특검을 구성해 러시아와의 공모설을 수사했으나 기소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탄핵 시도에 직면했으나, 두 번의 탄핵 모두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퇴임으로 악연이 매듭지어지진 못했다.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트럼프는 기밀문건 반출 혐의로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자택 압수수색,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첫 연방법원 형사기소 등 또다시 법무부와의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됐다.
하버 변호사는 이러한 법무부의 수사를 비판하며 “트럼프에게 가해지고 있는 일은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 것”이라며 “이곳은 더는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기소인부 절차 예정시각인 오후 3시를 한 시간가량 앞두고 법원에 도착한 트럼프는 연방 보안관에 체포됐으며 법원 직원이 그의 지문을 채취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법인 식별용 얼굴 사진인 ‘머그샷’은 찍지 않았다.
“정치적 동기에 따른 기소” VS “사법 시스템 건전성 입증”
법원 앞 광장에는 트럼프 지지자 수백 명이 모였고 반대 진영 시위대도 일부 집결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 병력도 출동해 법원 주위를 둘러싸고 엄밀한 경비를 펼쳤다. 지지자와 시위대 간 물리적 충돌이나 사고는 없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파란색 양복과 빨간색 넥타이를 착용하고 출석한 트럼프는 약 45분간 진행된 기소인부 절차 내내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법정에는 기소인부 절차를 진행하는 조나단 굿맨 치안판사와 잭 스미스 특별검사 등이 참석했다.
법정 청중석에는 시민 방청객 몇 명이 앉아 있었으나 청중석 대부분은 임의 추첨을 통해 자리를 배정받은 취재진과 법원 소속 스케치 작가 중 역시 임의 선정된 1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트럼프가 1급 기밀로 분류된 일부를 포함해 31개의 정부 문서를 불법적으로 보관했으며,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사법방해) 일부 문건 은폐를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문서에는 ‘미국과 외국의 방어 및 무기 능력에 관한 정보’,’ 미국의 핵 프로그램’, ‘군사 공격에 대한 미국 및 동맹국의 잠재적 취약성’, ‘외세의 공격에 대한 보복 가능성’ 등이 담겨 있었다고 공소장에서는 밝혔다.
검찰은 또 트럼프가 2021년에 기밀 취급인가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해당 기밀문서를 두 차례 보여줘 ‘연방 간첩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연방법에 따르면 유죄로 인정될 경우 국가기밀 반출은 건별 최대 10년, 사법방해는 최대 20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 다만 최고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형사기소에 대해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정치적 동기에 따른 부당한 탄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연방법원으로 이동하는 도중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슬픈 날 중의 하나”, “법원으로 가는 중”, “미국은 쇠퇴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조시 홀리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라이벌인 유력 후보를 기소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일이다. 조 바이든 자신은 수십 년간 기밀문서를 사적인 장소에 보관해 왔다”고 썼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와 경쟁하고 있는 다른 후보들도 바이든 행정부의 법무부가 검찰권을 남용하며 정치적 무기가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법 집행기관이 정치적 무기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비난했고 니키 헤일리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는 “미국인들은 검찰의 도발에 지쳐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공화당 소속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와 에이사 허친슨 아칸소 주지사는 트럼프를 비난했다. 크리스티 전 주지사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화당이 왜 트럼프라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느냐고 말했고, 허친슨 주지사는 8일 성명에서 트럼프의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민주당과 트럼프 반대 진영은 이번 기소는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미국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입증했다는 입장이다.
아담 쉬프 하원의원(민주당)은 트위터에 “검찰의 고소장은 법치를 확인해 줬다”며 “트럼프는 4년 동안 법 위에 군림했지만 다른 범법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오늘 그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레그 랜즈만 하원의원 역시 “트럼프로 인한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며 “그가 이 나라에 하고 있는 일, 그와 그의 동맹들이 벌여온 극단주의와 위험은 끝나야 한다”고 트위터에서 주장했다.
트럼프, 원칙전으론 유죄 판결받더라도 대통령 당선 가능
기소인부 절차는 공판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하면, 재판부는 배심원의 유죄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인정해 증거조사 없이 판결로써 형을 선고한다.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하면 공판으로 이행한다.
이날 트럼프가 혐의를 부인함으로써 추후 본격적인 공판이 진행된다. 스미스 특검은 신속한 재판을 주장했지만, 공판은 몇 달 후에나 열릴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기밀정보 유출 사건의 특성과 트럼프 측 변호인단의 전략이 더해지면 공판이 1년 이상 늦춰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공판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트럼프가 실제로 기밀문서의 기밀을 해제했는지다.
유명 헌법학자인 앨런 더쇼비츠 전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뉴스맥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기밀을 해제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검찰은 몇 가지 대응책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기밀을 해제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기밀을 해제하지 않았다고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헌법에는 기소되거나 복역 중이더라도 대선에 출마하거나 대통령 취임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 물론 수감된다면 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다만 수정헌법 14조에 따르면 내란에 관여했거나 미국 헌법을 위협하는 적에게 협조한 자는 상하원 3분의 2 찬성이 있어야 의원 선출, 공직 진출 등이 가능하다.
미국 현지에서는 남북전쟁 후 추가된 이 조항을 이용해 트럼프의 출마를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 이 기사는 자카리 스티버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