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터민스터모델(Westminster model)로 불리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 원조 영국에서 사상 3번째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리즈 트러스 외무·영연방개발부 장관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47세인 리즈 트러스는 토니 블레어(43세), 데이비드 캐머런(42세)에 이어 ‘40대 총리’ 기록을 이어 나가게 됐다. 신임 총리는 9월 6일 스코틀랜드 영국 왕실 별장인 밸머럴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하고 조각을 명 받을 예정이다. 불문 관습 헌법 헌정 체제의 영국에서 총리 임명은 여왕의 핵심 권한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70년 재위 기간 총리는 윈스턴 처칠부터 신임 리즈 트러스까지 15명으로 늘어난다.
영국 집권 여당 보수당 당원 약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차기 당수(당 대표) 선거가 9월 2일 마감됐다. 당 대표 경선을 관할하는 보수당 평의원 모임 ‘1922 위원회’는 5차례에 걸친 의원 투표에서 최저 득표자를 탈락 시키는 방식으로 후보 10명을 2명으로 추린 뒤, 8월 1일부터 9월 2일까지 당원 16만 명을 대상으로 우편·인터넷 투표를 실시했다.
9월 5일 개표 결과, ‘승리의 여신’은 리즈 트러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최종 경합을 벌인 리시 수낵 전 재무부 장관은 ‘첫 유색인종 출신 총리’의 꿈을 접어야 했다. 리즈 트러스는 당원 투표에서 총 8만 1326표(57.4%)를 얻어 6만 399표(42.6%)의 수낵을 제쳤다.
경선에는 투표 자격을 가진 보수당원 17만2437명 중 82.6%가 참여했다. 보수당 하원의원 투표 단계에서는 수낵 전 장관이 1위를 달렸지만 전체 당원 투표로 넘어간 직후부터는 전세는 트러스의 우세가 유지됐다.
영국 보수당원의 주류는 보수 성향 백인 중상층 남성이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당원의 97%가 백인이었다. 2020년 조사에서는 당원의 63%는 남성이고 연령대로는 65세 이상이 39%로 가장 많다. 당원의 80%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상층에 속하고, 76%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에 찬성한다.
수낵 전 장관은 존슨 내각 2인자였으나 지난 7월5일 존슨 총리가 ‘측근 비호’ 논란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을 때 사직하여 보수당원들의 반감을 산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트러스는 존슨 총리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아 ‘충성파’ 이미지를 쌓았다. 트러스는 영국 경제를 침체에서 살려 낸 대처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강한 영국의 부활을 꿈꾸는 보수당원의 마음을 얻은 것으로 풀이된다.
리즈 트러스는 ‘마가릿 대처 전 총리에 버금가는 강경 보수파로 분류된다. 사상 첫 40대 여성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는 어떤 인물일까?
리즈 트러스는 1975년 7월 26일, 잉글랜드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즈대 수학과 교수, 어머니는 간호사 출신 보건교사였다. 출신 배경으로 볼 때 리즈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계급이다.
리즈 트러스의 초등학생 시절 영국은 ‘대처의 시대’였다.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압승한 보수당은 연이은 총선에서 승리하며 장기 집권했다. 7살의 리즈는 당시 교내 모의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학 전공으로도 이어졌다. 리즈 트러스는 명문 옥스퍼드대에 입학하여 ‘정치·경제·철학(PPE)융합’을 전공했다. 노동당 출신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 전 총리, 보수당 출신으로 최연소 총리가 됐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등이 거쳐간 엘리트 전공으로 보수당 당수를 두고 최후 경합을 벌인 리시 수낵도 같은 전공을 했다.
1996년 대학 졸업 후 로열 더치 쉘, 유선&무선(Cable & Wireless) 등 대기업에서 경영 매니저로 일했다. 그 시기에 실시된 2001년, 2005년 총선에 보수당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연달아 낙선했다. 출마 지역구가 노동당 텃밭이었던 것이 낙선 주원인이었다.
비록 낙선했지만 보수당은 젊은 여성 정치인의 도전 정신을 높이 샀다. 그 결과 2010년 보수당 강세 지역인 잉글랜드 동부 노퍽 남서구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았고, 당선 되어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2015년, 2017년, 2019년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4선 하원의원이 됐다. 초선의원 시절 트러스는 도미닉 랍, 프리티 파텔 등과 함께 자유기업 그룹이라는 대처리즘 성향의 우파 초선 의원 모임을 주도했다.
2010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보수당 내각에서 리즈 트러스는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등 3명의 총리 밑에서 6개 장관·부(副)장관 직을 수행하고 있다. 의회 입성 2년 만인 2012년 캐머런 내각 교육부 부(副)장관(Parliamentary Under-Secretary of State)으로 발탁됐고, 2014년 환경부 장관을 맡았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여파로 메이 내각이 출범하자 법무부 장관(Lord Chancellor)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7~2019년 재무부 수석 부장관(Chief Secretary to the Treasury)으로 좌천되기도 했었으나 이후 보리스 존슨 내각에서 국제통상부 장관으로 영전했고, 외교력을 인정받아 외무·영연방개발부 장관 겸 브렉시트 협상 대표로 발탁됐다.
2022년 보수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수낵 전 장관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세금 인상을 고수하고 있는 것과 달리, 리즈 트러스는 300억파운드(약 47조1597억원) 규모의 세금 감면을 공언했다. 이를 통하여 강한 보수성향을 내세워 당내 우익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다만 차기 총선에서 노동당을 상대하는 것에는 약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언론의 트러스의 리더십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소신을 바꾸어 온 이력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야망’이라는 단어가 트러스에게 따라 붙는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입지를 위해서라면 이념 전향도 마다하지 않는 출세 지향적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리즈의 부모는 1960~1970년대 반핵운동으로 명성을 떨치던 핵무장 해제운동(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핵심 멤버일 정도로 좌파 성향이다. 대처 총리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부모 영향을 받아 트러스는 옥스퍼드대에 입학하자마자 자유민주당에 가입해 옥스퍼드대 자유민주당 위원장을 맡는가 하면 자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군주제 폐지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인 1996년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리즈 트러스는 “군주제는 영국 헌정 체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라는 정치 소신을 밝힌다.
정계 진출 후에도 이념 지향은 변화해 왔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CIT·브렉시트)가 자유시장경제에 위배된다고 반대했으나 보리스 존슨 총리 내각에 들어서면서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를 두고서 영국 공영방송 BBC는 ‘웨스트민스터의 야망’이라고 묘사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러스를 두고서 “‘변신자(shapeshifter)’라고 해도 무방하며 일각에서는 그가 승진에 적합할 때 회전하는 ‘풍향계’라고 부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내각 구성원의 평가는 엇갈린다. 존슨 내각의 벤 윌리스 국방부 장관은 트러스가 일관되지 않은 정치적 행보를 걸어온 것에 대한 비판을 두고서 “그가 능란한 판매원이 아니라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정직하다.”며 비호했다. 반면 도미닉 커밍스 전 존슨 총리 수석 보좌관은 “그는 존슨 총리보다 더 나쁜 총리가 될 것이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사상 3번째 여성 총리가 된 트러스의 ‘롤 모델’은 마거릿 대처 전 총리(1979~1990년 재임)인 것은 분명하다. 패션을 통해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인 지난 2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트러스가 검정색 털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1987년 대처 전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착용한 갈색 계열의 털모자와 코트를 연상하게 했다.
2021년 11월, 에스토니아에서 군용 헬멧과 방탄 조끼를 착용하고 탱크에 탑승하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를 두고서 1986년 서독 방문 당시 탱크에 올라탔던 대처 전 총리를 오마주(homage·존경의 표시로 인용하는 것)한 것이란 반응이 나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같은 트러스의 패션이 “대처 코스프레(Thatcher cosplay)로 불린다.”고 전했다.
트러스 총리의 앞길은 험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은 경제 침체에 직면해있다. 영란은행(BOE)은 내년 말까지 영국의 경기 침체를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치솟는 에너지 비용도 문제다.
설상가상으로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영국인들의 생계에도 직격탄이 되면서 철도 근로자, 집배원 등 수십만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일손을 놓은 가운데, 파업은 이제 각계로 번져나가는 양상이다.
영국 파운드화의 미국 달러화 대비 가치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결정이 나온 2016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내려갔다. 파운드화 약세가 지속되면 에너지를 포함한 수입 물가가 더 뛰어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의 벤 자란코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에너지 소비가 많은 일반 가정,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라며 “(에너지값 급등에) 다른 분야 지출을 크게 줄이게 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이 속에서 브렉시트 투표가 있었던 2016년 이후 4번째 총리가 등장할 정도로 영국 정치는 불안정하다. 1978년 말 사회서비스가 마비됐던 ‘불만의 겨울’도 소환되고 있다. 그해 영국 전체를 마비시킨 공공부문 파업 등이 노동당 정부의 몰락을 불렀다.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에게는 ‘대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국병으로부터 영국을 구원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사회복지 축소로 빈부차이를 확대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대처를 극복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대처는 ‘불만의 겨울’ 극복을 내세워 1979년 총선에서 압승하여 보수당 장기 집권기를 열어갔다. 신임 총리의 앞날은 오리무중이다. 제2의 대처를 표방했지만 브렉스티 후폭풍 등으로 중도 사임해야 했던 테레사 메이 전 총리의 그림자도 아른거린다.
트러스의 임기는 정기 총선이 예정된 2024년 12월까지이다. 다만 보수당이 과반 의석인 40석을 웃도는 절대 우세의 현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 해야 할 처지로 몰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