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최장수 정당, 토리당부터 헤아리면 340년 역사
역사도 길지만 집권 능력도 탁월
보수 본연의 가치 지키지만 시대 변화 수용하고 변화하는 유연함도 지녀
30대 초선의원을 당수로 뽑는 파격
‘청년보수당(YC)’으로 대표되는 인재 양성 시스템
9월 5일, 영국 보수당 차기 당수(대표) 경선 결과가 발표된다. 차기 대표는 총리가 되어 영국 국정을 이끈다. 이번 당수 경선이 주목받는 것은 후보자들의 출신 배경이다. 최종 경선에 오른 리즈 트러스(Elizabeth Truss) 외무부 장관, 리시 수낵(Rishi Sunak) 전 재무부 장관은 모두 1970년대생, 40대이다. 리즈 트러스가 당선될 경우 3번째 여성 총리가 탄생한다. 리시 수낵은 힌두교도 인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색인종이다. 이러한 후보들은 ‘보수’정당의 개방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차기 보수당 당수 후보 6명 중 절반이 비백인
여성, 유색인종에도 개방적
공식 당명이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인 영국 보수당은 현존 세계 최장수 정당이다. 1834년부터 현재까지 188년 동안 당명을 바꾸지 않고 있다. ‘산적’ ‘도적’을 의미하는 아일랜드어 ‘toraidhe’에서 유래한 전신(前身) 토리(Tory)당까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는 340년에 달한다.
보수당은 긴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집권력’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줬다. 20세기 이후 3/4에 가까운 기간 동안 집권했다. 가장 최근 치러진 2019년 총선에서도 영국 하원(서민원) 의석 650석 중 365석을 점하며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브렉시트’ ‘코로나 19’ 등 대형 악재 속에서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 환경 변화 속에서 생존, 장기 집권
2000년대 들어 캐머런-메이-존슨 연달아 총리 취임
산적, 도적에서 유래한 토리당이 원래 당명
188년 째 현재 당명 유지
1834년 새로운 당명을 사용하게 된 보수당은 시련 속에서 출발했다. 당시 시대 과제는 의회 개혁과 참정권 확대였다. 전신 토리당은 ‘엄격하게 제한된 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속에서 여론은 악화됐고, 폭동 조짐까지 보였다. 1832년 성인 남성 5명 중 1명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는 의회 개혁법이 통과됐다. 그해 새로운 선거법하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토리당은 하원 29.2%를 득표하며 67%를 기록한 휘그당(Whig Party, 자유당의 전신)에 참패했다.
토리당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은 로버트 필(Robert Peel・1788~1850)이다. 난파선 선장 역할을 맡은 그는 토리당 대신 ‘보수당’이라는 당명을 적극 사용했다. 지지층 확대에도 나섰다. 필의 지도하에 보수당은 전통 지지 기반인 지주계층을 지키면서,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도시 중간계급을 적극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다. ‘개혁’에 있어서도 전향적 입장을 취했다. ‘온건하고 건설적 보수주의’를 당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했다. 산업혁명이라는 시대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했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고통받던 여성·아동 보호를 위해 일일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공장법’ 입법이 대표적이다. 1835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43.8%를 득표하며 하원 의석수를 98석 늘렸다. 1841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득표율 50.9%를 기록하며 하원 367석을 차지하며 집권당 자리를 되찾았다.
로버트 필, 온건하고 건설적 보수주의 주창
도시 중간계급 공략하여 집권 성공
집권당이 된 보수당은 새로운 시련에 직면했다. 당 분열이었다.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의 아사(餓死)자가 발생했다. 식량 가격을 낮추는 데 값싼 외국산 농산물 수입은 필수였다. 최대 장벽은 수입을 제한하는 곡물법이었다. 필 총리는 야당인 휘그당의 지지를 얻어 곡물법 폐기를 결정했다. 보수당은 곡물법 존폐 여부를 두고 필을 지지하는 자유무역파와 반대하는 보호무역파로 나뉘어 분열했다. 필 지지자들은 탈당, 휘그당과 더불어 1859년 자유당을 결성하게 됐다.
1857년, 1859년, 1865년, 1868년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휘그당-자유당에 4번 연속 패배했다. 제1·2차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끈 파머스턴(Palmerston・1784~ 1865)이 자유당을 이끌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은 보수당을 ‘멍청한 당(stupid party)’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집권 희망이 요원해 보이던 보수당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은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였다. 유대인 출신에 자산가 계급도 아니었던 그는 보수당 비(非)주류였다. 수차례 낙선 끝에 보수당 의원이 된 그는 1867년 보수당 당수가 됐지만 이듬해 보수당은 총선에서 패했다. 그러다 1874년 총선에서 승리, 1874년 보수당은 28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선거 연속 패배하여 ‘멍청한 당’ 조롱받던 보수당
‘보수당의 아버지’ 디즈레일리 ‘일국보수주의’로 구원
디즈레일리는 당수로서 13년간 보수당 개혁을 주도했다. 선거권 확대 등 시대 변화를 수용했다. 문필가로서 1845년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다룬 소설 ‘시빌 혹은 두 국가(Sybil or The Two Nations)’를 발표하기도 했던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귀족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두 국가’로 나눠져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사회개혁을 통해 보수당을 특정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당이 아니라 ‘모두의 정당’임을 시현하고자 했다. “두 개의 국민(two nations)을 하나의 국민(one nation)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역설한 디즈레일리는 ‘일국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를 주창했다. 이는 보수당의 정치적 명분과 기반을 확대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의 미래 비전도 제시했다. 1872년 런던 수정궁(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장) 연설에서 “왕정·의회·영국국교회(성공회) 등 헌정 질서 유지, 대영제국 수호, 국민생활 수준 향상”의 세 가지 원칙을 보수당이 계승·발전시켜야 할 가치로 제시했다. 당 조직면에서도 전국보수주의노동자연맹을 조직, 전국 정당화를 도모했다. 당 중앙 사무국도 설치하여 조직·운영도 쇄신했다. 훗날 디즈레일리에게는 ‘보수당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
20세기 들어 보수당은 새로운 경쟁자를 만났다. 노동당(Labour Party)이다. 1884년 설립한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를 모체로 하는 노동당은 1906년 공식 창당했고, 그해 총선에서 하원 29석을 획득하며 원내 정당이 됐다. 1924년 자유당과 연정(聯政)하여 맥도널드를 총리로 하는 첫 노동당 내각을 구성했다. 이후 1929년 총선에서도 승리, 1931년까지 11년 집권했다. 자유당 퇴조 속에서 계급정당을 표방하는 노동당은 양당 체제의 새로운 축이 됐다.
날로 저변을 확대해 가는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보수당도 생존을 위해 대응해야 했다. 갑론을박 끝에 ‘국민의 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1867~1947)이다. 자수성가 기업가 출신인 그는 ‘신(新)보수주의(New Conservatism)’를 주창하고 사회개혁에 나섰다. 남녀동등 선거권 부여, 의무교육기간 연장, 사회연금제도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보수당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능력과 책임을 고루 갖춘 정당임을 강조해 유권자의 지지를 넓혔다. 노동조합·노동당에도 포용적 태도를 견지하여 노동계급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29년 46.%를 득표했으나, 하원 260석을 얻어 원내 2당에 그쳤던 보수당은 1931년(470석), 1935년(386석)을 얻는 압승을 거뒀다.
새로운 맞수 노동당 탄생
볼드윈, 신보수주의 새로운 방향 제시
1940~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시(戰時) 거국내각을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Spencer-Churchill・1874~1965)은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치러진 총선에서 패배,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의 노동당에 정권을 내줬다. 노동당은 보편적 복지를 내세웠는데, 이 새로운 비전이 선거에서 주효했다. 1942년 발간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골자로 하는 ‘비버리지 보고서’다. 무엇보다 제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영국인들은 사회개혁을 열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목전에 두고 참패한 보수당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노동당이 20년간 장기 집권을 할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참패를 당한 보수당은 분골쇄신(粉骨碎身)했다. ‘랍(Rab)’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리처드 버틀러(Richard Butler・1902~1982)가 개혁을 주도했다. “로버트 필 총리 재임기처럼 우리 보수당은 이제 사회적 혁명에 제대로 적응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선언한 그는 산업정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사회 개혁 정책을 초안했다. 1947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산업헌장(The Industrial Charter)’을 공표했다. 헌장은 산업 부문에 대한 국가 개입 필요성 인정, 주요 산업 국유화, 노사 협력, 국민의료보험(NHS)제도 시행 등을 망라했다. ‘완전고용, 복지국가 수호’라는 노동당의 명분에도 동의했다.
제2차 대전 영웅 처칠 1945년 선거 패배
복지국가 수용하여 재기에 성공
그 결과,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했고, 처칠은 생애 두 번째 총리가 됐다. 이어 앤서니 이든(Anthony Eden・ 1897~1977),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1894~1986)이 이끌던 보수당은 1955년, 1959년 총선에서 연승, 1964년까지 집권을 이어갔다.
보수당 집권기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경제지표가 이를 뒷받침했다. 1951~63년 평균 물가상승률은 45%였지만, 평균 임금상승률은 이를 상회하는 72%였다. 소비재 공급도 원활하여 영국인 평균 생활 수준이 올라갔다. 대중들은 맥밀런을 ‘수퍼맥’이라 부르며 환호했다. 장기 집권이 예상되던 보수당 정권을 몰락으로 몬 것은 스캔들이었다. 1963년 내각 국방부 장관 존 프로퓨모(John Profumo・1915~2006)가 사임했다. 1940년 25세에 최연소 하원의원에 당선, 1960년 국방수장이 된 차기 유력 총리 후보였다. 그는 크리스틴 킬러라는 고급 매춘부와 육체 관계를 맺었다. 당시 킬러는 주영국 소련대사관 무관과도 교제 중이었다. 섹스 스캔들은 국가 안보 문제로 비화됐고 정국을 강타했다. 프로뮤어는 사임했지만, 이듬해인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패했다.
1964년 선거 패배 후 보수당은 다시 한번 개혁을 추진한다. 당 지도부 선출 방식을 바꾼 것이다. 1965년 당원 투표에서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1916~2005)가 당수로 선출됐다. 중산층 출신 법조인이던 그는 보수당은 더 이상 귀족·기득권층 정당이 아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처칠 사임 후 이든-맥밀런으로 이어진 장기집권
중산층 출신 법률가 히스, 귀족 정당 이미지 탈피
1964년에 이어 1966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1916~1995)의 노동당에 패했다. 윌슨은 미디어 정치의 귀재였다. 스스로 ‘민중의 남자(man of the people)’라 칭하면서 권위적·관료적인 이미지의 보수당 정치인과 차별화했다. 노동당 당수 재임기 치른 5번의 선거에서 4번 승리했다. 정책 면에서도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현대적 관용사회(Permissive Society)’를 슬로건으로 각종 검열 완화, 낙태·동성애 허용, 사형제 폐지를 실시했다. 여성·소수민족 차별 금지도 법제화했다. 1970년 양성 동등 보수·대우 법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 보수당은 위기였다. 1970년 총선에서 정권을 찾은 히스는 총리 취임 초기 당면 과제이던 경제 회생에 주력했다. 골자는 자유시장 원칙에 입각한 경제정책이었다. 당내 신자유주의자들은 환호했다. 취임 2년 만에 히스는 개입정책으로 회귀했다. 노조의 반발이 주 원인이었다. 히스의 방향 전환은 당 안팎에서 위기를 초래했다. 당내 신자유주의자들은 ‘뉴 라이트’를 모토로 반(反)히스 진영을 공고히 했다. 유권자들은 오락가락하는 보수당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19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정당 지지율에선 37.9%의 얻어 37.2%의 노동당에 0.7%포인트 차이로 앞섰지만, 의석 수에서는 2석 적은 297석을 얻어 석패(惜敗)했다. 히스는 총리·당수직을 사임하고, 제2차 노동당 윌슨 내각이 출범했다.
1960~70년대 ‘노동당의 시대’를 끝낸 인물은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2013)다. 1970년대 영국이 ‘영국병’으로 신음할 때, 대처는 대처주의(Thatcherism)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한 그의 이념은 시장경제 활성화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추구했다. 1979년 총선에서 승리, 영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된 대처는 국영기업 민영화, 사회 복지 축소, 정부 재정 지출 삭감, 노동시장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영국병은 호전됐고, 1983년, 198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내리 승리했다. 이어 1992년 존 메이저(John Major・1943~ 현재)도 승리, 보수당은 1997년까지 18년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첫 여성 총리이자 장수 총리
‘젊은 총리’ 블레어-브라운에 맞서 39세 초선 캐머런을 당수로 선출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하원 659석 중 165석을 얻는 데 그쳐 야당으로 전락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1953~현재)-고든 브라운(Gordon Brown・ 1951~현재)으로 이어지는 노동당은 2001년, 2005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젊고 역동적인 영국)’를 내세운 두 젊은 총리 블레어-브라운에 대항하여 보수당도 맞불 전략을 펼쳤다. 세대교체였다. 2005년 총선 패배 후, 전당대회에서 39세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1966~현재)을 당수로 선출했다. 2001년 첫 하원에 입성한 30대 ‘정치신인’을 당수로 선출한 것은 ‘파격’이었다. 당수 취임 후 젊음·역동성과 더불어 ‘따뜻한 보수주의’를 내세운 캐머런은 보수당 정당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2010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통해 노동당 장기 집권 시대를 종식했다. 이후 2015년, 2017년, 2019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했다. 그 속에서 브렉시트, 코로나 19 사태 등으로 총리(보수당 대표)가 사임하여 총리는 테레사 메이(Theresa May)에 이어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으로 바뀌었고, 3번째 여성 총리 탄생을 앞두고 있다.
풍파(風波) 속에서도 보수정당이 생존하고 ‘정당 본연의 임무’인 집권 면에서도 성공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정당의 생명력 : 영국 보수당’ 저자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는 ▲ 과거의 실패를 두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재정비에 나서는 결속 ▲ 이념이나 정책에서 유연성과 현실 적응력 보여주는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처 ▲국가경영 능력과 통치에 적합한 정당 이미지 구축 ▲ 계급과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국민의 당 ▲ 정당 조직력과 선전(캠페인) 능력 등 5가지 요소를 보수당 영속력의 비결이라 정리한다. 박지향 교수는 “‘컨서버티브Conservative)’가 한국어로는 보수(保守)로 번역돼 ‘수구(守舊)’라는 이미지가 겹치지만 실제 보수당은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 보수당은 ‘집권’을 해서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개혁을 추구해 왔다. 중요한 사실은 영국인들이 보수당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집권하면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리당으로부터 따지면 200년 넘게 존속하고 있는 보수당을 영국인들은 ‘헌정(憲政) 속에 당연히 존재하는 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결속력, 유연성, 정당 이미지, 국민 전체의 당, 선거 능력
영국 헌정 속에 당연히 존재하는 제도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를 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보수당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보수당은 권력 의지가 확고하다. 집권이라는 정당 본연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급격한 사회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거 승리다. 다음으로 보수당은 유연하다.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용했다. 과거의 정치적 갈등과 단절을 꾀하며 새로운 리더십으로 당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외연을 넓히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귀족·유산자(有産者) 정당에서 출발하여 상공업자, 노동자 계층으로 지지 기반을 확장했다. 상공업자 출신 볼드윈, 자수성가한 중산층 히스와 대처, 고졸 은행원이던 존 메이저 모두 보수당이 배출한 총리다. 옥스브리지(Oxbridge·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로 대표되는 엘리트 출신만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집권 의지, 변화 수용과 리더십 교체
청년보수당이 상징하는 인재 수혈 시스템
인재양성 시스템도 보수정당 영속성의 핵심이다. 한국 정당이 ‘이미 준비된’ 인물을 수혈이라는 이름으로 영입한다면, 영국 보수당은 당원이 15세 전후부터 정당 활동을 시작하며 정치적 훈련을 받는다. 20세 여대생이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는 배경이다. 박지향 교수는 “청년보수당(Young Conservatives・YC)으로 대표되는 청년 조직을 운영하며, 정치에 열망 있고 재능 있는 젊은 인재를 키운다. 대처, 메이저, 캐머런은 모두 고등학교, 대학 시절부터 YC에서 활동하다 의원이 되고, 당수가 되고 총리가 된 사례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보수당은 ‘보수당’이라는 브랜드를 200년 가까이 고수하면서도 변화와 개혁에 맞서며 생존하고 집권하고 있다. 선거에 패배할 때마다 당명을 바꾸는 한국 보수 정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