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② 1970년대 핵 개발을 둘러싼 대만과 미국의 갈등

[기획연재] 대만의 핵 무장은 가능할까? 좌절된 대만의 핵 개발 진상 ②

최창근
2022년 08월 12일 오후 2:51 업데이트: 2022년 08월 12일 오후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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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긴장이 고조됐다.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적할 만큼 국방력을 증대해 오고 있는 중국에 비하여 대만의 국방력은 절대 열세이다. 이 속에서 대만 방위를 위해서는 핵 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라 핵무기 관련 생산·개발·획득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을 확인하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실제 대만은 독자 핵 개발을 시도했었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부 간첩으로 인하여 좌절된 역사가 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대만 핵 개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관련자 증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했다.

미국의 딜레마 대만의 딜레마

대만의 비밀 핵 개발 계획인 ‘타오위안계획(桃園計畫)’이 성과를 냄에 따라 미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대만의 핵 개발이 가시화될 경우 양안 긴장 고조는 피할 수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대만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해야 했다. 대만도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 무렵 핵 확산 방지 문제는 미국뿐만 아니라 기성 5대 핵 보유국 공통 문제이기도 했다. 1968년 성립한 핵확산방지조약(Non Proliferation Treaty·NPT) 체제하에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 외 국가의 핵 무기 보유는 공식 금지됐다.

그 속에서 1974년 5월 15일, 인도는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소 짓는 부처(smiling Buddha)’였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수준의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는 ‘평화적 목적’이라 항변했지만, 핵무기임이 분명했다. 미국을 비롯한 핵 보유국들은 인도의 핵 보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인도 이외에도 파키스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대만 등을 ‘민감(敏感)국가’로 분류하고 동태를 주시했다. 해당 국가 출신 미국 유학생들의 행적을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 등 정보·방첩 기관들이 감시했다.

1974년 인도 첫 핵 실험으로 발생한 함몰.

1970년대 중반,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대만에 대한 사찰을 강화했다. 사찰 빈도를 늘리고 CCTV를 설치하여 핵 개발 관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대만의 비밀 핵 개발 계획은 IAEA 사찰단에 포착됐지만 대만은 공식 부인했다.

공식적으로 핵 개발 추진을 부인하는 대만을 두고 미국 정부는 기밀을 누설하는 작전을 썼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 유력 매체에 대만이 건설을 추진하던 핵 재처리 시설 관련 정보를 흘렸다. 언론 보도 후 공론화가 되자 이를 근거로 대만 정부를 압박했다.

1977년 미국 정부 사찰단이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은 핵 재처리 물질 반출 여부, 비밀 핵 실험장 건설 등을 집중 사찰했다. 대만은 핵 연료 재처리 샘플을 폐기하는 등 방해 공작을 벌였다.

미국의 핵 시설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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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78년 미국은 새로운 증거를 포착했다.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laser-isotope)’ 방식을 통해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미국은 동위원소 분리 관련 추가 정보를 입수했다. 다만 실제로 대만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미국 사찰단이 재차 대만을 방문했다. 사찰단 방문에 앞서 대만은 중수로 관련 기기를 은폐했다.

1974년 건설 중인 대만 제1기 원자력 발전소. 대만의 국가 인프라스트럭처 건설 계획인 ’10대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됐다. | CNA.

1978년 9월, 미국은 레이저동위원소분리 활동 관련 추가 증거를 입수했다. 대만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에 나섰다면 미국으로서는 원자력 협력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핵 역량 개발로 이어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대만을 압박했다. 당시 레오나드 엉거(Leonard Unger) 주대만 미국 대사는 장징궈 총통을 예방하여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했다. 장징궈는 “대만은 핵무기를 만들 의도도 없으며 대만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대만은 미국이 핵 관련 모든 시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미국의 정책은 대만의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미국의 강압적인 행동과 태도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지 않아왔다. 만약 알렸으면 반미(反美) 감정이 늘어났을 것이다. 대만의 핵 개발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엉거 대사가 “핵 연료 재처리나 농축에 나선 국가를 대상으로 군사·경제 제재를 강화하는 것이 카터 대통령의 뜻이다.”라고 전하자 장징궈 총통은 “대통령 각하 말씀대로 할 수밖에…”라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레오나드 엉거. 하버드대학 졸업 후 국무부에 입부하였고 주라오스 대사, 주태국 대사를 거쳐 1974년 주대만 대사로 부임하여 1979년 대만-미국 단교 때까지 재임했다.

미중 수교와 단교

대만을 전방위로 압박하던 카터 행정부는 또 다른 충격을 던졌다. 1978년 12월 16일, 미국 정부는 1979년 1월 1일부로 중국과 수교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단교 후 ‘중(대만)·미국 상호방위조약’ 폐기와 주대만 미군 완전 철수도 선언했다. 1971년 유엔 퇴출, 1972년 대만·일본 단교에 이은 3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충격파였다. 장징궈 총통은 대만지구 계엄령을 선포했다.

절체절명의 외교·안보 위기 속에서 대만 내에서는 핵무기 개발 여론이 비등했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의 판단으로는 대만은 이미 소형 핵무기를 생산할 정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 군사 전문사들은 2~3년 내에 대만의 핵무장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1978년 12월, 대만을 방문한 미국 특사단에 항의하는 타이베이 시민들.

1972년 2월, 상하이코뮈니케 발표 후 미·중 관계가 정상화 물결을 탔다. 이 속에서 미국과 중국은 대만 핵 개발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대만의 핵 개발 계획을 주시하던 중국은 수집한 정보를 미국 정보 당국에 넘겼다.

중앙정보국 등 미국 정보기관은 1975년부터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에게 “대만 핵 개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중국과 협력하는 게 좋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과 중국 정보요원들은 오페라 극장 등에서 비밀 회동을 하며 대만 핵 개발 정보를 공유했다.

미국은 대만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도 강구했다. 내부에 ‘간첩’을 심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만 핵 무기 개발 관련자 포섭 공작은 장기간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됐다. (계속)